입력 : 2010-10-12 21:27:36ㅣ수정 : 2010-10-12 23:15:54
ㆍ외날개 ‘말똥가리’와 ‘아픈 곳’ 서로 감싸며 장터 길동무가 되어
옛말에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 오래 걷다보면 주머니 속의 동전이나 볼펜마저 거추장스럽고 자꾸 무거워지니 참으로 절묘한 속담이다. 그런가 하면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말도 있으니 이 또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들어 ‘길동무’라는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길벗이라는 좋은 우리말도 있고 도반(道伴)과 더불어 동지·동행·동반·반려자 등도 있다. 하지만 길벗은 한껏 멋을 내는 것 같고, 도반은 왠지 품격이 높아 보이고, 동지는 또 너무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니, 정겹고도 눈물겨운 어감의 ‘길동무’라는 말에 온몸의 솜털이 쏠리는 것이다.
갈수록 하수상한 시절에 10년 넘게 ‘길 위의 스승’이자 도반으로 삼았던 수경 스님이 결연히 ‘환계’(還戒)를 선언하고 사라진 뒤부터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리산에 깃들어 13년 넘게 살아오면서 수많은 세월을 스님과 함께 한반도 남쪽의 길바닥에서 천막생활을 했으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먼 길을 걸어서 왔다. 순례단의 ‘총괄 팀장’이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낙동강을 두 번 걷고, 지리산 둘레를 세 번 걷고, 도법 스님과 함께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으로 1년 동안을 걷고, 4대강을 다 걸어보고,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오체투지 등 2만리 이상을 걸었으니 생각만 해도 참으로 피할 수 없는 업보이자 기가 막히는 시절인연이 아니었던가. 유장한 강물처럼 흘러온 길들이 꿈속에까지 따라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번은 순례 중에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2000년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저녁 무렵 경남 창녕군의 낙동강변을 걸을 때였다. ‘낙동강을 살리자’는 깃발을 든 20여명의 건장한 순례단이 강변 외딴집을 지나는데 40대 초반의 한 여인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뒤를 따라왔다. 등까지 내려오는 길고도 검은 생머리의 여인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간절한 눈빛이었다. 순례단 후미로 처진 내가 유인물을 주며 “민족의 젖줄인 낙동강을 살리기 위해 걷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유인물을 읽으며 따라 걷기만 했다. 오래 앓은 환자처럼 얼굴은 창백했지만 의외로 콧날이 오똑하고 눈썹이 짙은 계란형의 미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니 촉촉한 눈빛이 흔들리며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듯했다.
날은 저물어가고 가을비는 내리는데 갈 길이 바빠졌다. “아주머니, 저희는 아직 2㎞를 더 걸어가야만 천막 치고 밥 해 먹고 잘 수 있습니다. 우산도 없이 이제 그만…”하고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여인이 눈빛을 빛내며 나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라꼬예? 낙동강을 살리자꼬? 멀쩡한 낙동강 말고 나부터 쫌 살려주이소, 청상과부인 나부터!”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의 우비 소매단을 잡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아주머니, 이러심…”하는데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홱 돌아서서 자기 집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면 문득 지독한 외로움에 이성을 잃고 발작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남정네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한다는 이른바 ‘날궂이’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빗속의 천막 속에서는 “누군가 하나는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농담 아닌 농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잠깐 오줌을 누러가는 순례자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니 사실은 끝내 아무도 그 여인의 집에 갈 수 없었다. “멀쩡한 낙동강 말고 나부터 쫌 살려주이소!”라는 말이 부산 을숙도까지 따라와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정말로 죽어가는 낙동강을 생각하면 더욱 생생해진다. 그 여인의 말대로 당시의 낙동강은 ‘페놀 오염’ 사고 이후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 확실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그야말로 멀쩡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채소값 파동 등으로 4대강 주변의 농경지와 하천부지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또 하나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유월 초에 경북 고령지역의 낙동강마을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온 들판에 흰빛 자줏빛 감자꽃이 피어있었다. 우연히 101세 된 할머니의 백세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 1910년생이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던 통한의 시절에 태어난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너무나 건강했으며, 잠깐 홀로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소녀처럼 꼭 거울을 보며 백발의 머리에 두 손으로 물칠을 한 뒤 단정한 모습으로 나오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흥겨운 잔치가 모두 끝나고 조금 피곤해진 할머니가 잠시 쉬더니 마을회관 방에서 한 말씀하셨다. “내 참 마이 살았제. 일제시대도 살았고, 난리도 치르고, 대통령도 마이 봤제. 그란데 이 뭐꼬? 나라에서 한다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 한참 숨을 몰아쉬더니 입술을 떨며 “하이 참, 내 생전에 농사 못 지 먹게 하는 나라도 첨(처음)이고, 갱빈(강변)에 감자 마늘 양파도 못 심게 하는 대통령도 첨이라카이, 난생 첨!”하는 것이었다.
일순 조용해졌다. 사실이 그랬다. 수십년간 낙동강 하천부지에 봄이면 하지감자를 심고, 장마철 넘기면 배추와 무를 심고, 늦가을이면 양파나 마늘을 심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4대강 사업으로 하천부지에 감자는커녕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자기 땅이 있는 사람들의 논에는 하지감자가 꽃을 피우는데, 하천부지에 기대어 생계를 꾸려오던 이들은 남의 감자밭 일이나 거들어주며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날마다 먹장구름 끼듯이 가슴이 먹먹하다. 젊은 여인도 길동무인 남편을 잃었고, 나이 든 할머니도 인생의 마지막 길동무인 땅을 빼앗겼다. 나 또한 지난 10여년 함께 먼 길을 걸어온 수경 스님이 이 땅 이 시대에 큰 화두를 던지며 상처를 입은 채 사라진 뒤부터 지리산에 머물며 허허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반려동물’을 만났다. 애완동물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 ‘반려’와 ‘동물’의 합성어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적막한 산중의 외딴집에 충남 서산의 천수만에서 날개를 다친 맹금류인 말똥가리가 새 식구로 들어온 뒤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참매를 키웠다. 해마다 5월 하순이면 고향 마을 입구의 부엉이벼랑에 리어카 고무밧줄을 타고 내려가 채 흰털이 빠지지 않은 참매 새끼 한 마리를 데려오곤 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주눅들고 의기소침했던 나에게 어깨 위의 늠름한 참매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할 수호신이었다. 이러한 얘기가 서산의 야생동물보호와 시민환경운동의 대부인 김신환 박사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혹시 참매는 아니지만 말똥가리를 키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전화를 받는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이미 나의 가슴은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35년 전에 키웠던 나의 참매들이 다시 살아 지리산으로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참매는 천연기념물이니 일반인이 키울 수 없고, 말똥가리 또한 멸종위기종이니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게 온 말똥가리들은 천수만에서 밀렵꾼들의 총에 날개를 맞아 수술을 마쳤으나 끝내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 상태였다. 김 박사는 “동물원에서도 데려가지 않으니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데,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키워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산으로 달려가 말똥가리를 데려왔다. 천수만에서 데려왔으니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며 ‘수’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왼쪽 날개의 후유증이 심해 채 1m도 날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김 박사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어이구, 미치겠어유. 이번에는 또 큰말똥가리가…. 외롭지 않게 데려가세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마리를 데려와 그의 이름은 ‘휘이휘이 천’으로 지어주었다.
한 번도 내 집을 지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빈집만을 떠돌며 살고 있지만 ‘수’와 ‘천’을 위해 멋진 집을 지어주었다. 집의 천장을 3분의 1쯤 열어두었으니 언제든 야생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수술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수’는 끝내 죽고야 말았다. 텃밭에 잘 묻어준 뒤 근처에 들깨 모종을 심으니 무성무성 잘 자랐다. 하지만 차마 깻잎 하나 따먹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더니 들깨 꽃 향기에 온갖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천’은 건강하게 회복돼 지금은 2∼3m까지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세상 휘휘 둘러보면 이 세상에 날개를 다친 것이 어찌 말똥가리뿐이겠는가. 나 또한 지리산 입산을 처음 결심할 무렵에는 스스로 날개를 꺾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꺾인 것이며, 다만 또 다른 길을 자청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천’과 함께 날개가 꺾이고 다친 채로 서로의 한쪽 날개가 되어 의지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뿐이어서 짝을 이뤄야만 날 수가 있다는 상상의 새 비익조(比翼鳥)처럼,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어(比目魚)처럼!
나의 ‘애마’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들을 ‘장돌뱅이’처럼 찾아갈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모든 것들을 도반이자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따로 또 같이’ 낮은 자리, 젖은 자리에서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울고 웃는 길동무가 되어….
옛말에 ‘천리 길에는 눈썹도 짐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 오래 걷다보면 주머니 속의 동전이나 볼펜마저 거추장스럽고 자꾸 무거워지니 참으로 절묘한 속담이다. 그런가 하면 ‘길동무가 좋으면 먼 길도 가깝다’는 말도 있으니 이 또한 절창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들어 ‘길동무’라는 말이 새삼 가슴을 친다. 길벗이라는 좋은 우리말도 있고 도반(道伴)과 더불어 동지·동행·동반·반려자 등도 있다. 하지만 길벗은 한껏 멋을 내는 것 같고, 도반은 왠지 품격이 높아 보이고, 동지는 또 너무 어금니를 꽉 깨물게 하니, 정겹고도 눈물겨운 어감의 ‘길동무’라는 말에 온몸의 솜털이 쏠리는 것이다.
날개에 총을 맞은 말똥가리 ‘천’과 함께. | 사진작가 우종덕씨 촬영
갈수록 하수상한 시절에 10년 넘게 ‘길 위의 스승’이자 도반으로 삼았던 수경 스님이 결연히 ‘환계’(還戒)를 선언하고 사라진 뒤부터는 더더욱 그러하다. 지리산에 깃들어 13년 넘게 살아오면서 수많은 세월을 스님과 함께 한반도 남쪽의 길바닥에서 천막생활을 했으니 돌이켜보면 참으로 먼 길을 걸어서 왔다. 순례단의 ‘총괄 팀장’이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낙동강을 두 번 걷고, 지리산 둘레를 세 번 걷고, 도법 스님과 함께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으로 1년 동안을 걷고, 4대강을 다 걸어보고, 새만금 해창갯벌에서 서울까지 삼보일배, 지리산 노고단에서 임진각까지 오체투지 등 2만리 이상을 걸었으니 생각만 해도 참으로 피할 수 없는 업보이자 기가 막히는 시절인연이 아니었던가. 유장한 강물처럼 흘러온 길들이 꿈속에까지 따라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번은 순례 중에 이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2000년 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저녁 무렵 경남 창녕군의 낙동강변을 걸을 때였다. ‘낙동강을 살리자’는 깃발을 든 20여명의 건장한 순례단이 강변 외딴집을 지나는데 40대 초반의 한 여인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뒤를 따라왔다. 등까지 내려오는 길고도 검은 생머리의 여인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간절한 눈빛이었다. 순례단 후미로 처진 내가 유인물을 주며 “민족의 젖줄인 낙동강을 살리기 위해 걷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유인물을 읽으며 따라 걷기만 했다. 오래 앓은 환자처럼 얼굴은 창백했지만 의외로 콧날이 오똑하고 눈썹이 짙은 계란형의 미인에 가까웠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니 촉촉한 눈빛이 흔들리며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듯했다.
날은 저물어가고 가을비는 내리는데 갈 길이 바빠졌다. “아주머니, 저희는 아직 2㎞를 더 걸어가야만 천막 치고 밥 해 먹고 잘 수 있습니다. 우산도 없이 이제 그만…”하고 말을 꺼내는 순간 그 여인이 눈빛을 빛내며 나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뭐라꼬예? 낙동강을 살리자꼬? 멀쩡한 낙동강 말고 나부터 쫌 살려주이소, 청상과부인 나부터!”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나의 우비 소매단을 잡는 것이었다. 화들짝 놀란 내가 “아주머니, 이러심…”하는데 더욱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홱 돌아서서 자기 집 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비가 부슬부슬 내릴 때면 문득 지독한 외로움에 이성을 잃고 발작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남정네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한다는 이른바 ‘날궂이’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날 밤 빗속의 천막 속에서는 “누군가 하나는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농담 아닌 농담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주 잠깐 오줌을 누러가는 순례자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니 사실은 끝내 아무도 그 여인의 집에 갈 수 없었다. “멀쩡한 낙동강 말고 나부터 쫌 살려주이소!”라는 말이 부산 을숙도까지 따라와 귓전을 맴돌았다.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정말로 죽어가는 낙동강을 생각하면 더욱 생생해진다. 그 여인의 말대로 당시의 낙동강은 ‘페놀 오염’ 사고 이후 지속적으로 공을 들여 확실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그야말로 멀쩡했던 것이다.
그리고 요즈음 채소값 파동 등으로 4대강 주변의 농경지와 하천부지에 대한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또 하나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오른다. 지난 유월 초에 경북 고령지역의 낙동강마을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온 들판에 흰빛 자줏빛 감자꽃이 피어있었다. 우연히 101세 된 할머니의 백세잔치에 참석하게 되었다. 1910년생이니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던 통한의 시절에 태어난 ‘살아있는 박물관’이었다.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너무나 건강했으며, 잠깐 홀로 화장실에 다녀올 때도 소녀처럼 꼭 거울을 보며 백발의 머리에 두 손으로 물칠을 한 뒤 단정한 모습으로 나오시는 분이었다.
그런데 흥겨운 잔치가 모두 끝나고 조금 피곤해진 할머니가 잠시 쉬더니 마을회관 방에서 한 말씀하셨다. “내 참 마이 살았제. 일제시대도 살았고, 난리도 치르고, 대통령도 마이 봤제. 그란데 이 뭐꼬? 나라에서 한다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 한참 숨을 몰아쉬더니 입술을 떨며 “하이 참, 내 생전에 농사 못 지 먹게 하는 나라도 첨(처음)이고, 갱빈(강변)에 감자 마늘 양파도 못 심게 하는 대통령도 첨이라카이, 난생 첨!”하는 것이었다.
일순 조용해졌다. 사실이 그랬다. 수십년간 낙동강 하천부지에 봄이면 하지감자를 심고, 장마철 넘기면 배추와 무를 심고, 늦가을이면 양파나 마늘을 심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4대강 사업으로 하천부지에 감자는커녕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자기 땅이 있는 사람들의 논에는 하지감자가 꽃을 피우는데, 하천부지에 기대어 생계를 꾸려오던 이들은 남의 감자밭 일이나 거들어주며 속으로 끙끙 앓을 수밖에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날마다 먹장구름 끼듯이 가슴이 먹먹하다. 젊은 여인도 길동무인 남편을 잃었고, 나이 든 할머니도 인생의 마지막 길동무인 땅을 빼앗겼다. 나 또한 지난 10여년 함께 먼 길을 걸어온 수경 스님이 이 땅 이 시대에 큰 화두를 던지며 상처를 입은 채 사라진 뒤부터 지리산에 머물며 허허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반려동물’을 만났다. 애완동물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이 없지 않았지만 사실 ‘반려’와 ‘동물’의 합성어도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적막한 산중의 외딴집에 충남 서산의 천수만에서 날개를 다친 맹금류인 말똥가리가 새 식구로 들어온 뒤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참매를 키웠다. 해마다 5월 하순이면 고향 마을 입구의 부엉이벼랑에 리어카 고무밧줄을 타고 내려가 채 흰털이 빠지지 않은 참매 새끼 한 마리를 데려오곤 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주눅들고 의기소침했던 나에게 어깨 위의 늠름한 참매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할 수호신이었다. 이러한 얘기가 서산의 야생동물보호와 시민환경운동의 대부인 김신환 박사에게까지 흘러들어가 “혹시 참매는 아니지만 말똥가리를 키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전화를 받는 아주 짧은 시간에도 이미 나의 가슴은 마구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35년 전에 키웠던 나의 참매들이 다시 살아 지리산으로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사실 참매는 천연기념물이니 일반인이 키울 수 없고, 말똥가리 또한 멸종위기종이니 마찬가지다. 그러나 내게 온 말똥가리들은 천수만에서 밀렵꾼들의 총에 날개를 맞아 수술을 마쳤으나 끝내 야생으로 돌아갈 수 없어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 상태였다. 김 박사는 “동물원에서도 데려가지 않으니 안락사를 시켜야 하는데,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으니 키워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서산으로 달려가 말똥가리를 데려왔다. 천수만에서 데려왔으니 휘이 휘이 휘파람을 불며 ‘수’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왼쪽 날개의 후유증이 심해 채 1m도 날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뒤에 김 박사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어이구, 미치겠어유. 이번에는 또 큰말똥가리가…. 외롭지 않게 데려가세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마리를 데려와 그의 이름은 ‘휘이휘이 천’으로 지어주었다.
한 번도 내 집을 지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채 빈집만을 떠돌며 살고 있지만 ‘수’와 ‘천’을 위해 멋진 집을 지어주었다. 집의 천장을 3분의 1쯤 열어두었으니 언제든 야생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수술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한 ‘수’는 끝내 죽고야 말았다. 텃밭에 잘 묻어준 뒤 근처에 들깨 모종을 심으니 무성무성 잘 자랐다. 하지만 차마 깻잎 하나 따먹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더니 들깨 꽃 향기에 온갖 나비들이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천’은 건강하게 회복돼 지금은 2∼3m까지 날아오를 수 있게 되었다.
세상 휘휘 둘러보면 이 세상에 날개를 다친 것이 어찌 말똥가리뿐이겠는가. 나 또한 지리산 입산을 처음 결심할 무렵에는 스스로 날개를 꺾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꺾인 것이며, 다만 또 다른 길을 자청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천’과 함께 날개가 꺾이고 다친 채로 서로의 한쪽 날개가 되어 의지하며 살기로 다짐했다.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뿐이어서 짝을 이뤄야만 날 수가 있다는 상상의 새 비익조(比翼鳥)처럼,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어(比目魚)처럼!
나의 ‘애마’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의 장터와 마을들을 ‘장돌뱅이’처럼 찾아갈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모든 것들을 도반이자 스승으로 삼을 것이다. ‘따로 또 같이’ 낮은 자리, 젖은 자리에서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울고 웃는 길동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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