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규 | 시인
입력 : 2010-11-02 21:32:11ㅣ수정 : 2010-11-03 00:55:23
ㆍ“여자가 씨름을 한다꼬… 어데 아무데서나 자빠지노”
“말만 잘하면 공짜라카이. 어서 오이소~.” 사시사철 시끌벅적하던 화개장터가 왠지 조용하다. 장터뿐만이 아니라 연인과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화개십리 벚꽃길’(혼인길)도 썰렁하고,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하동군 수류화개동천(水流花開洞天)의 9개 리 20여개 마을 전체도 텅 비었다. 단풍놀이 온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없는 11월 첫째주 월요일, 어른들은 모두 장터에서 가까운 섬진강변 남도대교 아래 체육공원에 모였다.
제11회 화개면민의 잔칫날이자 22회 체육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잔치는 순전히 주민들만의 축제다. 봄이면 고로쇠 물을 받거나 야생 녹차의 찻잎을 따고 덖는 것으로 시작해 매실을 따고 약초를 캐며, 벚꽃축제부터 차축제·여름휴가철·단풍철까지 쉴 틈 없이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장사를 하다가 단 하루, 관광객들이나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잔칫상을 스스로 차린 것이다. 3600여명의 면민 가운데 2000여명 가까이 모였으니 아이들과 노약자를 빼고는 거의 다 모인 셈이다. 대단한 집중력이다.
직업도 다양하다. 수제차를 만드는 차인, 찻집 여주인, 매운탕집 사장도 참가하고 슈퍼 아줌마, 장터 할매, 대장간 할배, 엿장수, 산중의 흑발 도사, 절간의 스님도 나오고 민박집·여관과 펜션 주인들도 모두 나왔다. 지리산 약초꾼인 김씨는 “올개는 그래도 송이도 마이 나고 4년 만에 ‘일능이 이표고 삼송이’라는 말도 있듯이 능이버섯을 100㎏나 땄다”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종목에 출전해요?” 하고 물으니 “아이고, 내사 마 산이라면 천날만날 날다람쥐처럼 쏘댕기지만 씨름 같은 건 몬 해요. 구경이나 하지요 뭐. 참, 어제 반야봉에서 귀한 하수오 백작약 좀 캤는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 하이소?” 하고는 말문을 돌린다.
나 또한 올봄부터 하동군민이자 화개면민이 되었으니 마을별로 따로 구입한 체육복을 입고 당당하게 참석했다. 이미 보름 전부터 마을이장이 몇번을 찾아와 간곡한 부탁을 했다. “11월 첫째주 월요일에는 어데 가지 마이소. 한 명도 빠지면 안 된다카이. 오전 9시30분까지는 꼭 나와야 됩니데이.” 아예 못을 박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장님 어쩌지요? 전라도며 다른 지역 다녀와야 하는데” 하는 말이 목젖까지 차오르다 꼴까닥 삼켜졌다.
“다른 기 아이라, 이번에는 마을별로 입장상을 주는데 3등까지 1000만원씩이나 준다카능기라. 알다시피 우리 마을은 노인들이 태반이니 체육대회 출전으로 상 받기는 애초에 글렀고, 입장상이라도 받아야 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면 꽝 인기라. 마을인구 대비 참가비율을 따진다카이 핵교에 간 애들 빼고는 환자도 태워 가야 할 판이라꼬.”
그러니까 상으로 주는 마을의 사업비라는 뜻의 ‘상사업비’ 1000만원이 효과를 발휘해 마을마다 참가율이 엄청 높아진 것이다. 현주소지에서 잠시 멀리 가 있는 사람들마저 참가해야 할 정도였다. 실제로 우리 아랫집의 유명 도예가이자 차인인 ‘가야산 박달요’의 여상명씨는 해인사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 행사 직전에 도착하는 열의를 보였다. 체육대회나 노래자랑 등의 상금과 상품을 상대적으로 낮추고 상사업비라는 특이한 이름의 ‘입장상’을 만들어 파격적인 상금으로 격상시킴으로써 단단히 효과를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마을이 탈락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리하여 섬진강변 남도대교 아래 체육공원에는 천막이 쳐지고 한마당 큰 잔치가 시작됐다. 마을마다 제각기 잔치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 마을도 이미 하루 전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부녀회의 막내인 도시 출신의 뒷집 새댁은 “난생처음 들었어요, 돼지 멱따는 소리. 꿰엑 꿱, 아이고 무서버라. 소름이 쫙 돋더라니깐요” 하며 상기된 얼굴에 큰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바로 이 귀농자 새댁의 어린 딸 가연이가 이사를 오자마자 내게 시 한 편을 쓰게 했으니 그 사연은 이렇다.
섬진강과 벚꽃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집에 이사를 오자 지리산권의 문화예술인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친구들이 집들이다 뭐다 핑계 삼아 수시로 드나드니 날마다 새벽까지 술추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보름 가까이 그렇게 취중에 살다 보니 마을에서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매화꽃이 피었다가 어느 새 벚꽃이 화르르 지던 어느 날 아침, 뒷집 귀농자의 딸이 우리 집 강아지 ‘얼씨구’ ‘지화자’ ‘좋다’를 보러 왔다. 그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문밖에서 강아지와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결인가 싶어 잠을 뒤척이는데 분명히 어린이들이었다. ‘어라, 이 마을엔 남자 중학생 말고는 아이들이 없을 텐데’ 하며 드르륵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니 초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때 막내딸 아홉 살 가연이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는데, 나는 술이 확 깨고야 말았다.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두 눈이 빨개,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이 질문 하나가 내 생의 화두가 되었다. 밤새 너구리처럼 술을 마시느라 두 눈이 빨개진 나를 보고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하고 믿어주는 이 천진무구한 소녀의 질문 앞에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날 모처럼 ‘뒷집 소녀 때문에’라는 반성의 시를 한 편을 썼다. ‘기필코 좋은 시를 써야겠다(중략) 슬그머니 눈곱을 닦으며/ 마침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평생 좋은 시를 써야겠다/ 단지 뒷집 귀농자의 딸 가연이의 저 머루포도 눈빛 때문에.’
섬진강변 잔치는 서서히 무르익어갔다. 각 마을의 천막에서 삶은 돼지고기에 술 한 잔씩 걸치며 차례가 되면 경기에 출전하고 또 잠시 쉴 틈에 국밥도 말아 먹었다. 단연 인기종목은 씨름이었다. 남녀 혼성팀으로 구성된 씨름은 남자들의 경기보다 여자들의 경기가 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씨름을 해본 적도 없는 여성들이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리도 그렇지만 서로를 껴안고 모래판에 나뒹구는 몸짓도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출전한 한 민박집 아주머니는 허벅지의 샅바를 고쳐 매려는 청년회의 젊은 심판에게 “야가 이거, 어딜 만지노? 새파란 총각이, 그것도 남들 다 보는 데서” 하고 농을 거는 바람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여자씨름을 생전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하이고, 여자가 씨름을 다하고 난리네. 시상 참 마이 변했다 아이가. 저 낯바대기 좀 보소. 저 벌러덩 나자빠지는 꼴 좀 보소. 어데 여자가 함부로 아무데서나 자빠지노” 하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응원을 했다. “허허, 그 참 아녀자들 씨름이 훨씬 더 재밌구먼. 쟈가, 천수 며느리 아이가? 가랑이를 너무 마이 벌려도 안 되능기라. 쪼끔 오므리며 느닷없이 멧돼지처럼 밀어붙여야 한다카이. 그렇다고 서방한테 대들듯이 하지는 말고” 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 말을 들은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 구시렁거린다. “쯧쯧, 어이구 저 등신 같은 놈은 저 혼자 주저앉네. 밤중에 지 마누라도 못 자빠뜨릴 놈이 뭐하러 나왔노?”
씨름판이 벌어지는 동안 밧줄당기기와 단체 줄넘기가 이어지고 윷놀이까지 벌어졌다. 축구 골대 앞에서는 여자들의 공차기가 이어졌다. 여자가 차고 여자가 막는 게임이었다. 생전 처음 차보는 축구공이 제대로 날아갈 리가 만무했다. 화개장터에서 식당을 하는 아주머니는 결승전에서 헛발질을 하고는 “하이고, 저리 큰 구멍에도 안 들어가뿌네. 우리 서방님은 대단해, 대단하다꼬. 우야다가 엉뚱한 구멍에 넣을까봐 항상 그기 문제지”라고 말해 응원단에게 실수를 큰 웃음으로 만회했다.
체육대회가 끝나자 노래자랑이 이어졌다. 마을의 대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나이불문 남녀불문 무대 앞에서 춤을 추었다. 마지막 순서는 경품 추첨이었다. 어찌됐든 아침의 입장상과 저녁의 경품 추첨은 참가자들을 잘 묶어둔 셈이다. 섬진강변에 노을이 질 무렵 김치냉장고가 걸린 마지막 추첨이 벌어졌다. 나의 번호는 997번, 당연히 꽝이었다. 어릴 적 보물찾기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에 덤으로 얻은 공짜는 없었다. 사회자가 “2055번!” 하는 순간 두 손을 치켜드는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번호표를 땅바닥에 버리며 돌아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저무는 마을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 잔치는 끝났다. 그러나 내일은 또 가게 문을 열고 겨우살이 준비를 할 것이다.
“말만 잘하면 공짜라카이. 어서 오이소~.” 사시사철 시끌벅적하던 화개장터가 왠지 조용하다. 장터뿐만이 아니라 연인과 함께 걸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화개십리 벚꽃길’(혼인길)도 썰렁하고, ‘겨울에도 꽃이 핀다’는 하동군 수류화개동천(水流花開洞天)의 9개 리 20여개 마을 전체도 텅 비었다. 단풍놀이 온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없는 11월 첫째주 월요일, 어른들은 모두 장터에서 가까운 섬진강변 남도대교 아래 체육공원에 모였다.
제11회 화개면민의 잔칫날이자 22회 체육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잔치는 순전히 주민들만의 축제다. 봄이면 고로쇠 물을 받거나 야생 녹차의 찻잎을 따고 덖는 것으로 시작해 매실을 따고 약초를 캐며, 벚꽃축제부터 차축제·여름휴가철·단풍철까지 쉴 틈 없이 밀려드는 관광객들에게 장사를 하다가 단 하루, 관광객들이나 아이들을 위한 게 아니라 자신들만의 잔칫상을 스스로 차린 것이다. 3600여명의 면민 가운데 2000여명 가까이 모였으니 아이들과 노약자를 빼고는 거의 다 모인 셈이다. 대단한 집중력이다.
가을볕이 따가운 섬진강변에 화개면민들이 다 모였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화개면민 한마당 잔칫날. 동네 명예를 걸고 출전한 아낙네들이 씨름판에서 젖먹던 힘까지 발휘하고 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 즐거운 동네 잔치는 또 한 해의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직업도 다양하다. 수제차를 만드는 차인, 찻집 여주인, 매운탕집 사장도 참가하고 슈퍼 아줌마, 장터 할매, 대장간 할배, 엿장수, 산중의 흑발 도사, 절간의 스님도 나오고 민박집·여관과 펜션 주인들도 모두 나왔다. 지리산 약초꾼인 김씨는 “올개는 그래도 송이도 마이 나고 4년 만에 ‘일능이 이표고 삼송이’라는 말도 있듯이 능이버섯을 100㎏나 땄다”며 환하게 웃었다. “무슨 종목에 출전해요?” 하고 물으니 “아이고, 내사 마 산이라면 천날만날 날다람쥐처럼 쏘댕기지만 씨름 같은 건 몬 해요. 구경이나 하지요 뭐. 참, 어제 반야봉에서 귀한 하수오 백작약 좀 캤는데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 하이소?” 하고는 말문을 돌린다.
나 또한 올봄부터 하동군민이자 화개면민이 되었으니 마을별로 따로 구입한 체육복을 입고 당당하게 참석했다. 이미 보름 전부터 마을이장이 몇번을 찾아와 간곡한 부탁을 했다. “11월 첫째주 월요일에는 어데 가지 마이소. 한 명도 빠지면 안 된다카이. 오전 9시30분까지는 꼭 나와야 됩니데이.” 아예 못을 박는 것이었다. “아이고, 이장님 어쩌지요? 전라도며 다른 지역 다녀와야 하는데” 하는 말이 목젖까지 차오르다 꼴까닥 삼켜졌다.
“다른 기 아이라, 이번에는 마을별로 입장상을 주는데 3등까지 1000만원씩이나 준다카능기라. 알다시피 우리 마을은 노인들이 태반이니 체육대회 출전으로 상 받기는 애초에 글렀고, 입장상이라도 받아야 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면 꽝 인기라. 마을인구 대비 참가비율을 따진다카이 핵교에 간 애들 빼고는 환자도 태워 가야 할 판이라꼬.”
그러니까 상으로 주는 마을의 사업비라는 뜻의 ‘상사업비’ 1000만원이 효과를 발휘해 마을마다 참가율이 엄청 높아진 것이다. 현주소지에서 잠시 멀리 가 있는 사람들마저 참가해야 할 정도였다. 실제로 우리 아랫집의 유명 도예가이자 차인인 ‘가야산 박달요’의 여상명씨는 해인사에서 이른 새벽에 출발해 행사 직전에 도착하는 열의를 보였다. 체육대회나 노래자랑 등의 상금과 상품을 상대적으로 낮추고 상사업비라는 특이한 이름의 ‘입장상’을 만들어 파격적인 상금으로 격상시킴으로써 단단히 효과를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마을이 탈락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리하여 섬진강변 남도대교 아래 체육공원에는 천막이 쳐지고 한마당 큰 잔치가 시작됐다. 마을마다 제각기 잔치음식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 마을도 이미 하루 전에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부녀회의 막내인 도시 출신의 뒷집 새댁은 “난생처음 들었어요, 돼지 멱따는 소리. 꿰엑 꿱, 아이고 무서버라. 소름이 쫙 돋더라니깐요” 하며 상기된 얼굴에 큰 두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바로 이 귀농자 새댁의 어린 딸 가연이가 이사를 오자마자 내게 시 한 편을 쓰게 했으니 그 사연은 이렇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섬진강과 벚꽃길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집에 이사를 오자 지리산권의 문화예술인뿐만이 아니라 전국의 친구들이 집들이다 뭐다 핑계 삼아 수시로 드나드니 날마다 새벽까지 술추렴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보름 가까이 그렇게 취중에 살다 보니 마을에서도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매화꽃이 피었다가 어느 새 벚꽃이 화르르 지던 어느 날 아침, 뒷집 귀농자의 딸이 우리 집 강아지 ‘얼씨구’ ‘지화자’ ‘좋다’를 보러 왔다. 그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문밖에서 강아지와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결인가 싶어 잠을 뒤척이는데 분명히 어린이들이었다. ‘어라, 이 마을엔 남자 중학생 말고는 아이들이 없을 텐데’ 하며 드르륵 방문을 열고 빼꼼히 내다보니 초등학교 여학생 두 명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때 막내딸 아홉 살 가연이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는데, 나는 술이 확 깨고야 말았다.
“아찌, 정말 시인이세요? 두 눈이 빨개,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이 질문 하나가 내 생의 화두가 되었다. 밤새 너구리처럼 술을 마시느라 두 눈이 빨개진 나를 보고 “밤새 시 쓰다 나왔어요?” 하고 믿어주는 이 천진무구한 소녀의 질문 앞에 나는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몰랐던 것이다. 그날 모처럼 ‘뒷집 소녀 때문에’라는 반성의 시를 한 편을 썼다. ‘기필코 좋은 시를 써야겠다(중략) 슬그머니 눈곱을 닦으며/ 마침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일평생 좋은 시를 써야겠다/ 단지 뒷집 귀농자의 딸 가연이의 저 머루포도 눈빛 때문에.’
섬진강변 잔치는 서서히 무르익어갔다. 각 마을의 천막에서 삶은 돼지고기에 술 한 잔씩 걸치며 차례가 되면 경기에 출전하고 또 잠시 쉴 틈에 국밥도 말아 먹었다. 단연 인기종목은 씨름이었다. 남녀 혼성팀으로 구성된 씨름은 남자들의 경기보다 여자들의 경기가 더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씨름을 해본 적도 없는 여성들이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리도 그렇지만 서로를 껴안고 모래판에 나뒹구는 몸짓도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강요에 의해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출전한 한 민박집 아주머니는 허벅지의 샅바를 고쳐 매려는 청년회의 젊은 심판에게 “야가 이거, 어딜 만지노? 새파란 총각이, 그것도 남들 다 보는 데서” 하고 농을 거는 바람에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여자씨름을 생전 처음 보는 할아버지는 “하이고, 여자가 씨름을 다하고 난리네. 시상 참 마이 변했다 아이가. 저 낯바대기 좀 보소. 저 벌러덩 나자빠지는 꼴 좀 보소. 어데 여자가 함부로 아무데서나 자빠지노” 하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응원을 했다. “허허, 그 참 아녀자들 씨름이 훨씬 더 재밌구먼. 쟈가, 천수 며느리 아이가? 가랑이를 너무 마이 벌려도 안 되능기라. 쪼끔 오므리며 느닷없이 멧돼지처럼 밀어붙여야 한다카이. 그렇다고 서방한테 대들듯이 하지는 말고” 하며 박장대소를 했다. 이 말을 들은 할머니가 들으라는 듯 구시렁거린다. “쯧쯧, 어이구 저 등신 같은 놈은 저 혼자 주저앉네. 밤중에 지 마누라도 못 자빠뜨릴 놈이 뭐하러 나왔노?”
씨름판이 벌어지는 동안 밧줄당기기와 단체 줄넘기가 이어지고 윷놀이까지 벌어졌다. 축구 골대 앞에서는 여자들의 공차기가 이어졌다. 여자가 차고 여자가 막는 게임이었다. 생전 처음 차보는 축구공이 제대로 날아갈 리가 만무했다. 화개장터에서 식당을 하는 아주머니는 결승전에서 헛발질을 하고는 “하이고, 저리 큰 구멍에도 안 들어가뿌네. 우리 서방님은 대단해, 대단하다꼬. 우야다가 엉뚱한 구멍에 넣을까봐 항상 그기 문제지”라고 말해 응원단에게 실수를 큰 웃음으로 만회했다.
체육대회가 끝나자 노래자랑이 이어졌다. 마을의 대표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나이불문 남녀불문 무대 앞에서 춤을 추었다. 마지막 순서는 경품 추첨이었다. 어찌됐든 아침의 입장상과 저녁의 경품 추첨은 참가자들을 잘 묶어둔 셈이다. 섬진강변에 노을이 질 무렵 김치냉장고가 걸린 마지막 추첨이 벌어졌다. 나의 번호는 997번, 당연히 꽝이었다. 어릴 적 보물찾기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에 덤으로 얻은 공짜는 없었다. 사회자가 “2055번!” 하는 순간 두 손을 치켜드는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번호표를 땅바닥에 버리며 돌아섰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저무는 마을을 향하여 걸어가는 사람들, 잔치는 끝났다. 그러나 내일은 또 가게 문을 열고 겨우살이 준비를 할 것이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이원규의 길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6) 슬로시티 악양면의 ‘동네밴드’ (0) | 2010.11.17 |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5) 천태산 은행나무 ‘詩祭’ (0) | 2010.11.10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3) ‘낙동강 소녀가수’ 강언나 (0) | 2010.10.27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2) 순천만 갈대밭과 벌교장터 (0) | 2010.10.20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 연재를 시작하며 (0) | 201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