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6) 슬로시티 악양면의 ‘동네밴드’

이원규 | 시인

ㆍ서로의 아픔 보듬는 어우러짐… ‘전설 속 청학동’이 여기더라

아무리 험하고 힘든 세상일지라도 살아남을 만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굳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던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날마다 화려한 꽃의 날들은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되어 환한 억새꽃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날도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절망과 아픔과 슬픔의 맨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낸 뒤에 오는 희열의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열망의 사람들이 모여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바로 그런 날이 있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늦가을, 형제봉 노을이 대봉감 홍시처럼 주렁주렁 내걸리던 11월13일 저녁이었다. ‘슬로시티’ 하동군 악양면의 매계청소년수련원 공연장에서는 내내 박수소리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동네밴드’ 세 번째 공연이 열린 것이다. 말 그대로 촌놈들의 ‘동네밴드’는 자치·생명·살림의 지역공동체를 지향하는 ‘섬진강과 지리산사람들’(섬지사)이 지역의 문화적 자립을 꿈꾸며 3년 전에 야심차게 결성한 팀이다. 지역주민과 귀농·귀촌자들로 구성된 ‘동네밴드’는 올해 멤버가 조금 바뀌었다. ‘버들치 시인’ 박남준씨가 하모니카 연주와 보컬을 맡고, 옻칠공예가인 성광명씨가 베이스 리더기타, 하동군청 공무원인 정대영씨가 드럼, 음악치료사 이소영씨가 신시사이저, 지리산학교 교무처장이자 ‘고아르피엠 여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신희지씨가 보컬, 싱어송라이터인 한보리씨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내 얘기 같은 노랫말, 내 심정 같은 연주로 무대와 객석은 한몸이 됐다. ‘섬진강과 지리산사람들’이 지역의 문화적 자립을 꿈꾸며 결성한 ‘동네밴드’ 공연이 지난 13일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매계청소년수련원 공연장에서 열렸다. 사진은 ‘동네밴드’ 공연 | 이원규 시인 촬영


지난 두 번의 공연처럼 기존의 팝송과 ‘7080 노래’를 벗어나 밴드 구성원마다 자신들의 아픈 사연들을 직접 작사·작곡한 창작곡들을 발표했다. 보컬 중심의 공연이 아니라 연주자들도 모두 한 곡씩을 돌아가며 부른 것이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공연장을 꽉 채운 300여 청중들은 교감의 탄성을 질렀다.

특히 옻칠공예가 성광명씨의 노래는 귀농·귀촌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한때 잘나가던 사업이 1997년 외환위기 때 완전 파산하는 바람에 홀로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리산,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듯이 왔다. 사실은 죽으러 왔다고 했다.

‘다 망해서 왔네/ 서른 네 살이었네/ 먼 곳을 찾아서 숨어들었지/ 서른 네 살이었네/ 세상은 이제 끝났다 생각했었네/ 서른 네 살이었네/ 내 나이 지금 마흔 하고도 여덟/ 흰 머리 돋기 시작했지/ 내 나이 지금 마흔 하고도 여덟/ 아직 마누라도 없지만/ 이제는 포기하지 않아/ 내게도 꿈이 생겼으니/ 세상을 아름답게 색칠하는 꿈/ 아직 희망은 있지/ 다 망해서 왔네/ 서른 네 살이었네/ 세상이 온통 어둡게 보였었네/ 서른 네 살이었네.’

그는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사업을 했고 또 돈도 꽤 많이 벌었다. 그러나 그마저 한순간의 꿈이었다. 물거품이었다. 그리하여 자살하러 왔으나 차마 죽지는 못했다. 오지의 청학동에 처음 들어온 그는 “상투머리에 수염을 기른 채 한복을 입고 마치 조선시대처럼 사는 유·불·선의 청학동 도인들을 보자 정말 ‘웃기게도’ 죽을 맛이 싹 사라졌다”고 한다. 오히려 ‘저렇게도 사는 데 나는 왜 못사나?’ 오기가 생겼다.

가난과 외로움과 세상에서 버려졌다는 서러움을 누르며 대나무 수공예품을 만들었다.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다 마침내 우리의 전통 옻칠을 배우게 됐다. 죽음을 부르던 절망의 빛들이 어느 순간 옻칠의 화려한 오방색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마침내 입산 15년 만에 직접 지은 집에 갤러리를 만들어 전시회도 하고, 지리산학교에서 옻칠공예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는 마흔여덟의 노총각이다.

이런 그가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노래를 남들 앞에 처음으로 덜덜 떨며 불렀으니 관객들의 엄청난 호응은 당연했다. 원주민이든, 이미 귀농·귀촌을 하거나 준비하는 사람이든, 단지 여행을 온 사람이든 저마다 깊숙이 숨겨둔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신도 모르게 그 어떤 카타르시스의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입동(立冬) 무렵의 섬진강. | 이원규 시인 촬영



섬진강 벚꽃길을 지키기 위해 2003년에 만든 ‘섬지사’의 이 날 행사는 이미 그 감동이 예견된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 모두 스스로 감동할 준비가 다 돼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행사는 악양의 특산물인 대봉감 등의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파는 동네장터, 생태해설사와 함께 하는 체험, 주은이 아빠 근수씨의 진땀나는 노력으로 마련된 ‘추억의 뻥튀기’, 홍현숙(보리출판사 대표)·안혜령(괴산 귀농자) 등 중년 여성들의 ‘진도북춤’ 찬조출연, 중학생들의 그룹사운드 ‘구멍난 양말’의 발칙한 공연, 동네주민들이 마련한 350인분의 저녁밥과 술판이 이어졌다.

지방의 면단위 시골 마을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공연팀이 세 개나 있기 때문이다. ‘동네밴드’와 더불어 마을 아줌마·아저씨들의 ‘필’ 통기타반과 중학생들의 ‘구멍난 양말’이 있는데 그 실력도 만만치 않다. 더욱이 이 동네 ‘중딩들’은 ‘동네밴드 주니어’라는 종속된 타이틀을 거부하며 독립을 요구해 그룹사운드 ‘구멍난 양말’이라는 명칭을 쟁취했다. 이 날도 오후 5시에 단독으로 공연할 정도였다. 특히 도시에서 온 사람들은 ‘시골 중딩들의 반란’과 창작곡 및 연주 실력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연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막간에 서울 사는 문종오씨가 무대에 올라와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며 관객들의 합창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지리산으로 시집온 대구댁 문혜아씨가 객원보컬로 깜짝 출연했다. 무대에 오르기 몇 시간 전부터 가슴이 떨린다며 “소주를 마셔야 하나, 청심환을 먹어야 하나” 전전긍긍하더니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끄러운 듯 과감하게 불러 갈채를 받았다.

‘동네밴드’ 드러머 정대영씨의 창작곡 ‘이런 친구’, 신시사이저 연주자 이소영씨의 부친 이동섭 시인의 시를 노래한 박유경씨의 ‘진달래’, ‘필’ 통기타반의 연주 등이 맛깔스럽게 이어졌다. 또 박남준 시인의 창작곡은 단연 주목을 받았다. ‘노랑 오토바이’를 익살스러운 포즈로 부르더니 어느새 독특한 저음으로 ‘이런 세상이 괜찮나/ 삽질로 죽어가는 4대 강물/ 삽질로 죽어가는 사람들’하며 당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문밖의 세상’을 불러 숙연케 했다.

필통기타반 연주 장면. | 이원규 시인 촬영



차마 여기에서 언급하는 게 팔불출 같지만, 사실 ‘동네밴드’의 보컬은 나의 아내다. 신희지씨는 그동안 객원보컬이었는데 하동으로 이사 오면서 ‘객원’ 딱지를 뗐다. 이 날도 세 곡의 창작곡을 불렀다. 나의 시에 한보리씨가 곡을 붙인 ‘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와 ‘무정처’, 그리고 본인이 직접 작사·작곡한 ‘나를 사랑해’였다. 성광명씨의 노래처럼 자신의 상처를 드러낸 이 노래는 특히 큰 호응을 받았다. ‘난 아파서 왔어/ 아무도 모른 곳에 숨고 싶었어/ 사랑이 날 버렸어(중략)/ 이제 난 그대가 좋아/ 이제 난 여기가 좋아/ 지나간 아픔들은 아무것도 아냐/ 내가 날 사랑하면 돼’라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박수를 치며 흐느끼는 여성들도 있었다.

공연 마지막은 출연진과 관객들이 다함께 일어서서 ‘목화밭’을 하동의 자랑인 ‘녹차밭’으로 바꿔 불렀다. 사회자이자 ‘필’의 멤버인 유로제다의 백철호씨는 “휴우, 코드 잡는 왼팔이 마비되는 줄 알았어. 틀릴까봐 보는 사람이 더 떨리는, 관객들의 손에 진땀이 나는 무대였다”며 웃었다. 그러나 진짜 공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참가자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뒤풀이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마실 나온 비구니 스님도 장미꽃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전주 사람들은 풍물을 치고, “잘난 남편들만 노느냐. 우리도 놀 줄 안다”며 결성된 ‘놀자매’와 리자매(저녁밥 등 궂은일을 한 마을 아줌마들) 등의 열창과 춤판이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지리산의 겨울맞이 잔치는 이렇게 끝이 났다. 후원금 200만원은 조손가정과 북한 어린이 돕기에 쓰기로 했다. 이 행사가 벌어진 매계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전설 속의 청학동’으로 거명된 곳이다. 천년 전 신라의 고운 최치원 선생은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까지 왔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찾으려고만 했지 그 스스로 청학동을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여는 시’를 낭송했는데 그 제목이 ‘청학동에선 길을 잃어도 청학동이다’였다.

그렇다. ‘앉은자리가 꽃자리’라고 했으니, 어쩌면 지금 지리산에선 전설 속의 청학동이 현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법 스님이 있는 실상사의 산내면에서, 그리고 슬로시티 악양면에서 실험되고 또 실현되고 있다. 전설과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 길 위에서 길을 잃으면 또 어떤가. 그 또한 길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