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31) 학교종이 땡땡땡

공지영 | 소설가경향신문

ㆍ“뭣이라! 누가 와? 오라고 해, 내 본때를 보여줄 것이여”

젊었을 때 한시를 공부하러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스승은 공자와 노자, 장자를 비교하면서 원래 기후가 춥고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무엇이든 손을 보아야 하고 바로잡아야 하고 규율을 엄격히 해야 하는 사상이 발전하는 특징을 가졌고, 기후가 온난하고 들이 넓어 먹거리가 풍성한 남쪽 지역에서는 나무 그늘에 앉아 명상을 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다 제대로 될 터이니 가만히 있으라는 식의 사상들이 발전해 온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스승이 이렇게 단순히 이야기하셨을 리야 없지만 어쨌든 자연과 인간이 서로 밀고 당기며 서로를 만들어가는 이치를 엿본 것 같아 아주 신기했었다. 그래서 가끔 남북으로 긴 나라에 가면 남쪽과 북쪽 사람들(남반구의 경우는 반대겠지만)을 비교해 보곤 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지리산 인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 중에 <88만원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있다. 경제학자인 그는 주로 지리산 북사면, 그러니까 실상사와 남원 근처를 자주 방문하곤 했다는 것이다. 실상사 부근이라면? 남원시 산내면이다. 이곳에는 실상사 도법스님의 주도로 귀농학교와 대안학교, 온갖 학술 세미나가 열리곤 했다. 내가 이 글에서 다룬 사람 중에서 카페 소풍 주인인 목공예가, 사진작가 강병규씨, 그리고 목수 박문수씨가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 이름 옆에 괄호를 열면 들어갈 직업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 최도사 버들치 낙시인 고아르피엠 등은 남쪽사면에 사는 사람들인데 도사, 시인 아르피엠 혹은 기타리스트 등이 이름 옆에 들어갈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지리산 말로 거시기한 점이 있다. 경제학자가 그런 지리산 북사면을 방문해 세미나에 참석하고 학교들을 연구하는 동안 작가인 내가 남사면을 방문해 술을 마시고 화전을 부치고 천렵을 하고 동네밴드를 감상하고…,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위에서부터) 지리산학교 기타연주반, 옻칠공예반, 공개강좌 뒤 뒤풀이 장면 | 지리산학교·신지희씨 제공

그러던 어느날 고아르피엠은 수경스님을 뵈러 갔다가 북사면 사람들이 이 학교 저 학교 이 세미나 저 세미나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모두 공부하러 갔으니 심심하기도 해서 이제는 재미있게 놀던 자신의 생을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무슨 공부를 할까 생각했으나 아무래도 맘에 드는 공부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지리산에 다니러 온 사진작가를 만나 대뜸 사진을 공부할 수 있겠느냐고 묻게 되었던 것이다. 사진작가는 부산의 자신의 작업실에 언제든 오라고 그녀를 초대했고 그녀는 부산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으며 다시 자신을 반성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사진작가 이창수씨이다. 그는 십년 전쯤 지리산에 왔다. 그가 이곳으로 온 동기는 이랬다. 어느 겨울날 회사 앞의 시끌벅적한 삼겹살 집에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오는 순간 찬바람 같은 이상한 기운이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내년이면 사십, 사진기자 생활 16년 동안 열심히 뛰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았단 말인가.”

사람이라는 존재는 정말 신비롭다. 이런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일어나 해일처럼 덮치며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지리산으로 왔다. 그런데 십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어떤 질문 하나가 머리를 내밀고 신선한 바람처럼 스며들었다. “이곳에 와서 참 재미있게 잘 먹고살았다. 그런데 너무 나 하나만을 위해 산 것은 아닐까?”

이 소식은 곧 가까운 버들치와 낙장불입 시인과의 술자리로 이어졌다. 옳은 일이면 무엇이든 무조건!! 해야 한다고 하는 버들치시인의 강력한 동의와 좋은 일이면 좋다는 낙장불입시인의 동의로 그날 ‘지리산 학교’가 태동한다. “그려 우리가 술만 먹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이 기회에 보여주어야 혀.” 버시인이 외쳤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낙시인이 물었다.

“누구한테 보여주는데?” 버시인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그건 몰라, 그러나 알려야 혀” 하며 술이 가득 든 잔으로 건배를 제의했다. 돌아보니 주변에 수많은 예술가 선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살며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만 꼽아보아도 목공예반, 천연 염색반, 도자기반, 사진반, 기타 연주반, 퀼트반, 그림반, 숲길걷기반, 시문학반 등의 9개 과목을 꾸릴 수 있었다. 학생들의 학비는 석 달에 10만원, 강사들의 급료는 한 달에 7만원, 그나마 시문학반은 버시인과 낙시인, 두 사람이나 있어 둘이서 3만5000원씩 받기로 했다. 이상은 교사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결의였다. 겨우 거기까지 결의하는데 수많은 시간이 들었다. 왜냐하면 친구가 와서 술을 마시느라, 꽃구경 가느라, 깜빡 잠이 들어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교사가 많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겨우 사람들을 모아다 놓으면 그들은 회의 내내 “나 잠깐만 누워서 들을게” 하고는 코를 골기 일쑤였다. 어쨌든 구례와 하동 지리산 인근에 소문이 퍼져나갔다. 술집에서 몇이 떠들면 바로 그렇게 온 지리산 자락이 알게 되기 때문이었다. 의외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70명의 학생을 받은 그들은 면사무소 2층 소강당을 빌려 입학식을 치렀다. 20대에서 60대 노인까지 구례, 하동, 순천, 전주는 물론 부산에서까지 학생들이 몰려왔다. 처음부터 지리산 학교는 ‘움직이는 학교’였다. 카페 마을회관 선생들의 공방이 교실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문의를 해오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묻는 질문 중 가장 큰 것은 “대체 그게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아무리 움직이는 학교이고 지리산 전체가 다 학교라고 해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사진작가 이창수가 자신의 작업실로 쓰던 한옥을 한 채 내놓았다. 그것을 교무처로 삼기로 한 것이었고, 이 학교를 태동시킨 고아르피엠 여사를 교무처장으로, 고아르피엠이 아무리 아르피엠을 올려도 자신만의 낮은 아르피엠으로 버티는 뚝심의 저아르피엠 여사를 간사로 모셨다. 처음 시문학반이 열리던 날, 버시인과 낙시인은 첫 수업이라 함께 들어갔다. 이곳에서 시를 습작하던 문학소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낯선 얼굴이 하나 눈에 띄었다. 그녀는 고개를 외로 꼬며 자기 소개를 했다.

“지는 마 하동서 속옷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사람인데예, 시까지는 모르겠고 마 인터넷 안 있습니꺼. 거기 댓글을 기똥차게 달고 싶어서 등록했어예. 그러니께네 지보고 시를 써온나, 샘이 그러시므는 저는 다시는 못 옵니더. 지는 예 우리 훌륭하신 버시인 낙시인 얼굴만 보고 있어도 지는 마 교양이 팍팍 이 가슴속으로 차오르는 것 같으니께네 너무 좋심더 앞으로 혼자 사시는 버시인님 속옷은 지가 책임지겠어예, 그라고 앞으로 빤스 난링구 어무이들 사리마다 이런 거 사실 분들은 하동 버스터미널 앞에 비너스로 오이소 내가 마 잘해드리겠습니더 그리고 지 이름은 밝히기가 좀 거시기 허니께 그냥 비너스로 불러 주이소.”

시문학반 모습. | 지리산학교·신지희씨 제공


수업은 일주일에 두시간. 그런데 한시간 강의를 하고 나서 5분을 쉬고 나면 학생들은 슬그머니 테이블 위에 고구마 찐 것, 집에서 가져온 매실주, 면서기는 읍내에서 튀겨온 통닭을 내밀었다. 버시인은 망설이다가 말했다.

“우리가 술만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로 했는데 이러면 곤란한 것인데… 허지만 뭐 술만 마시는 게 아니라 시 공부도 하면서 술도 마신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니께. 자 그럼 건배.” 이리하여 술자리, 아니 시 공부는 밤이 이슥도록 그칠 줄을 모르게 되었다. 시문학반은 그렇게 흘러갔으나 목공예반 같은 경우는 문제가 심각했다. 교사는 목공예라는 것을 가르쳐보기는커녕 그 자신도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뭐 굳이 개념을 정리하자면 “모태 목공예가” 정도라고나 할까. 그는 처음 수업 시간에 진땀을 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르치는 대신 가서 직접 시범을 보이게 되었는데 학생들의 말에 따르면 “그냥 선생님이 다 해주어서” 석달에 10만원짜리 강좌가 끝나갈 무렵에는 거의 백만원짜리 수공예품 밥상을 집에 가져다 놓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유명해진 지리산 학교에 어느날 문화부 장관이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하동군은 긴장했고 지원을 더 이끌어내면 수월하지 않으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실제로 장관은 이 학교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많은 지원을 시사하는 발언을 보내오고 있었다. 교사 회의는 그것 때문에 열리게 되었는데 그 장관은 마침 취임하자마자 임기가 다 차지 않은 진보적인 단체장들을 마구 내쫓은 것으로 유명한 전직 탤런트 출신이었다. 여느 때처럼 길게 누워 자고, 머리 기대고 자고, 휴대폰으로 문자 보내던 교사들은 거의 코까지 골던 버들치시인이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다들 놀라 깨게 되었다.

“뭣이라! 누가 와? 니들 우리가 언제 돈 받자고 이 학교 시작했냐? 그래 좋다. 오라고 해. 내 본때를 보여줄 것이여.” 버들치시인이 팔을 걷어붙이자 비몽사몽간 사태를 얼른 파악한 다른 이가 덧붙였다.

“형님 말이 맞습니다. 오라 하십시오. 지는 달걀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기타리스트가 자신의 집 암탉이 낳은 달걀을 머릿속으로 헤아리다가 말했다. “형님들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저도 준비하겠습니다. 제 것은 유기농 유정란입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