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입력 : 2010-08-24-21:14:39ㅣ수정 : 2010-08-24 21:20:35
ㆍ“스님들 안주는 식물성으로 준비하나” “고기 채 썰어 드려”
마흔이 되던 해 어느 날 아침 대기업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강병규는 출근길의 밀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곧 마흔이었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이었다고 그는 스스로 자부해 왔었다. 친구들은 이 회사 저 회사로 이직을 하고 혹은 벌써 퇴직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졸업 후 줄곧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회사는 그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이제 마흔이니 뭐 기어이 승진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앞으로 15년 정도는 무난히 근무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별일이 없으면 아파트를 열평 정도, 차를 1500㏄ 정도 늘릴 수 있을 것이었다. 15년. 그러면 그는 당연히 쉰 다섯 살이 될 것이었다. 쉰 다섯 살. 문득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고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는 새삼 생각했다. “내 인생 이것이 전부였단 말일까? 마지막 젊음이 가는 15년을 바친 후 내게 남겨질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 고작 열평 넓은 아파트와 1500㏄가 더 큰 자동차란 말일까?
그날 그는 하루 종일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황당하게도 인생이, 청춘이 억울하고 덧없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때도 하지 않았던 그런 생각들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등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방 안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지리산이 거기 있었다. 휴가 때마다 휴일 때마다 남들 다 가는 놀이도 마다하고 그는 지리산을 찍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여러 번 상도 받았다. 안정된 직장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지리산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삶은 언제나 여기 아닌 저 너머에 있었다는 랭보의 말을 읽던 해부터 그는 그런 분열과 체념 혹은 포기 등과 사이좋게 지내왔었다. 그런데 새삼 이제 그것은 분열이었고 지금 이 삶이 어쩌면 껍데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되던 해 그는 그렇게 늦은 사춘기라면 사춘기 혹은 성장통을 시작했다.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기차를 탔다. “꿈을 이루고 싶은 열망이 이 모든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내 손으로 내 영토를 일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15년 후보다 열평 작은 아파트를 팔고 15년 후보다 1500㏄ 작은 차를 팔았다.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고 했다. 그는 이를 꾹 물고 지리산으로 갔다. 그동안 지리산을 다니며 보아두었던 해발 460m의 땅 만 오천평을 샀다. 가파른 비탈에 고도가 높아 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보성 화순으로 가서 흙집학교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황토로 집을 짓는 법을 배웠다. 빡빡한 스케줄과 공부를 소화하고 났을 때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글쎄, 역경은 뜻밖에도 그가 그토록 안기고 싶었던 그 지리산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왔다. 그것도 귀농자들에게 말이다. 터를 닦으려는데 경고장이 날아왔다. 이웃에서 고소가 접수되어 공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경관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지리산에 호젓하게 살고 싶어 왔다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지어 놓은 집 근처에 다른 이웃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설마 뒷산이었던 해발 460m에 어떤 미친 인간이 집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 사람들 집의 조망권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고 소음이나 먼지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지만 알다시피 한 번 고소나 소송이 걸리면 모든 것은 지체된다. 공무원들이 그의 꿈을 위해 발벗고 나서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땅을 팔고 다른 곳에 땅을 사려고 해도 이미 아무것에도 쓸모없어진 땅은 소문이 날 대로 나 사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경우 도시에서 오는 어수룩한 귀농자를 속여 땅을 팔라는 권고도 들어왔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내려온 지리산이니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정직이 밥 먹여 주지 않았고 이웃들은 집요했다. 공무원들은 귀찮아 했고 소송이 하나 끝나면 다른 곳에서 가처분이 들어왔다. 지리산? 좋지… 하며 반신반의의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이 여름휴가 때 놀러 온다는 전화를 할 때면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리산 어귀에 작은 방을 얻어 놓고 술을 먹고 울고 술을 먹고 울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이 작은 소망이 모두 산산조각나는 듯한 절망감만 가득한 나날이었다.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여기는 그의 전부였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 동안 지리산에서 그는 점차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생각으로 도시를 떠나 지리산에 와서 살게 된 귀농자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해장국을 끓여주었다. 관청과 고소인들을 오가는 동안 그는 그보다 더 많은 따뜻한 이웃과 지리산 사람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그를 도왔다. 그 역시 술을 먹는 틈틈이 집을 설계하고 전체 조경을 그렸다. 먼저 터를 닦는 데 필요한 포클레인을 알아보니 기사와 함께 하루 일당이 엄청났다. 그는 지리산 사람들과 의논 끝에 300만원짜리 작은 포클레인을 샀다. 드디어 집을 지어도 좋다는 당연한 허가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떨어지던 날, 그는 그 포클레인을 타고 집터로 올라갔다. 새벽부터 일하고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고 일했다.
“한마디로 그때 밤이 참 짧았어요.”
그는 웃었다.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온몸은 땀투성이였고 손발 여기저기 상처가 새겨졌다. 끝이 좋게 끝난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일년 반 동안 그의 손발을 묶어 놓은 이웃은 실은 그의 열망과 소망과 꿈을 다지고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신의 고통과 땀방울쯤은 이미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황토로 그의 사진을 전시하는 갤러리를 짓고 그 아래 살림집도 지었다. 일년 반의 허송세월 아닌 허송세월 동안 그는 지리산의 집짓는 품앗이를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오자 집은 뚝딱뚝딱 바로 완성되었다. 함께 집을 지어본 사람들… 그들은 진정한 삶의 동반자들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유명 사진작가 반열에 이름이 오르지 않아도 그는 행복했다. 이제 사진을 찍고 차를 끓이고 숯불을 치워 동반자들과 삼겹살이라도 구우면 행복했다. 그러던 즈음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리산 둘레길이 그의 집 바로 뒤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리산 높은 곳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자신의 사진을 전시할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에게는 이제 저절로 관객들이 몰려오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하늘의 선물 같았다. 서둘러 화개차를 준비하고 찻잔을 더 비치했다. 둘레길을 걷던 사람 누구라도 잠시 들어와 쉬면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 가도록 안내판도 달았다. 차는 무료이고 사진을 꼭 사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갤러리에 가보면 차를 마시고 사진을 구경한 사람들이 그에게 남긴 메모들이 천장 가득히 붙어 있다. 그는 느긋이 앉아 오늘도 집터를 돌본다. 어느날 실상사 앞의 소풍에 팥빙수를 먹으러 갔던 그는 지리산에서 볼 수 없는 멋진 바이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소풍 안에 들어가니 낙시인이 검정 가죽 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터프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는 낙시인에게 맥주를 사고 바이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앞으로 바이크에 대해서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지리산 자락에서는 멋진 바이크를 타는 사람이 둘로 늘었다. 낙시인과 강병규 사진작가.
그는 올해부터 그의 갤러리와 집 주변에 구절초를 대량으로 심었다. 넉넉한 마당에 서부영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바비큐 시설도 차리고 나무를 깎아 벤치와 테이블도 차렸다. 9월이 오고 구절초들이 지리산의 맑은 기운에 보랏빛 구름처럼 피어나는 날 그는 그 마당에서 잔치를 하기로 했다. 낙시인 버시인 고아르피엠 강남좌파 꽁지작가, 최도사 소풍주인… 도법 스님 수경스님 연관스님 다 모시기로 했다.
“스님들은 어떻게 맥주는 식물성이니 드신다 해도 안주는 따로 식물성으로 준비하나?”
꽁지 작가가 묻자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낙시인이 거든다. “고기를 채 썰어 드려, 가늘게….”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는 동안 강병규 작가는 휴대폰을 받은 후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300만원 주고 사서 5년 동안 내 수족 같았던 포클레인 오늘 드디어 170만원에 팔았어요! 자 그날 고기는 내가 삽니다.”
마흔이 되던 해 어느 날 아침 대기업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강병규는 출근길의 밀리는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곧 마흔이었다. 비교적 평탄한 인생이었다고 그는 스스로 자부해 왔었다. 친구들은 이 회사 저 회사로 이직을 하고 혹은 벌써 퇴직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대학 졸업 후 줄곧 모두가 부러워하는 이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평가도 좋은 편이었다. 회사는 그의 성실성과 능력을 높이 사고 있었다. 이제 마흔이니 뭐 기어이 승진에 대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앞으로 15년 정도는 무난히 근무할 수 있었다. 그 사이에 별일이 없으면 아파트를 열평 정도, 차를 1500㏄ 정도 늘릴 수 있을 것이었다. 15년. 그러면 그는 당연히 쉰 다섯 살이 될 것이었다. 쉰 다섯 살. 문득 자동차 핸들을 잡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고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그는 새삼 생각했다. “내 인생 이것이 전부였단 말일까? 마지막 젊음이 가는 15년을 바친 후 내게 남겨질 거라고 확신하는 것이 고작 열평 넓은 아파트와 1500㏄가 더 큰 자동차란 말일까?
그날 그는 하루 종일 업무를 처리할 수 없었다. 황당하게도 인생이, 청춘이 억울하고 덧없이 흘러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춘기 때도 하지 않았던 그런 생각들 “과연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누구일까?”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등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집으로 돌아간 그는 방 안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지리산이 거기 있었다. 휴가 때마다 휴일 때마다 남들 다 가는 놀이도 마다하고 그는 지리산을 찍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여러 번 상도 받았다. 안정된 직장인으로서는 아주 좋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던 그였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지리산이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진정한 삶은 언제나 여기 아닌 저 너머에 있었다는 랭보의 말을 읽던 해부터 그는 그런 분열과 체념 혹은 포기 등과 사이좋게 지내왔었다. 그런데 새삼 이제 그것은 분열이었고 지금 이 삶이 어쩌면 껍데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흔이 되던 해 그는 그렇게 늦은 사춘기라면 사춘기 혹은 성장통을 시작했다.
그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기차를 탔다. “꿈을 이루고 싶은 열망이 이 모든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간”이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내 손으로 내 영토를 일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15년 후보다 열평 작은 아파트를 팔고 15년 후보다 1500㏄ 작은 차를 팔았다. 가족들과 친구들 모두 어안이 벙벙하다고 했다. 그는 이를 꾹 물고 지리산으로 갔다. 그동안 지리산을 다니며 보아두었던 해발 460m의 땅 만 오천평을 샀다. 가파른 비탈에 고도가 높아 땅값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개척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보성 화순으로 가서 흙집학교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황토로 집을 짓는 법을 배웠다. 빡빡한 스케줄과 공부를 소화하고 났을 때 그는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어느날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멀쩡히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흙집 학교에서 익힌 솜씨에다 이웃의 손길이 보태져 황토 갤러리가 탄생했다. 강병규 사진 작가(위 사진)는 9월 지리산 구절초가 만개한 날 낙시인, 고아르피엠, 강남좌파, 꽁지작가 등과 마을잔치를 벌일 생각이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글쎄, 역경은 뜻밖에도 그가 그토록 안기고 싶었던 그 지리산에 사는 사람들로부터 왔다. 그것도 귀농자들에게 말이다. 터를 닦으려는데 경고장이 날아왔다. 이웃에서 고소가 접수되어 공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경관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지리산에 호젓하게 살고 싶어 왔다는 사람들은 그들이 이미 지어 놓은 집 근처에 다른 이웃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설마 뒷산이었던 해발 460m에 어떤 미친 인간이 집을 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그 사람들 집의 조망권을 가리는 것도 아니었고 소음이나 먼지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지만 알다시피 한 번 고소나 소송이 걸리면 모든 것은 지체된다. 공무원들이 그의 꿈을 위해 발벗고 나서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땅을 팔고 다른 곳에 땅을 사려고 해도 이미 아무것에도 쓸모없어진 땅은 소문이 날 대로 나 사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경우 도시에서 오는 어수룩한 귀농자를 속여 땅을 팔라는 권고도 들어왔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내려온 지리산이니까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정직이 밥 먹여 주지 않았고 이웃들은 집요했다. 공무원들은 귀찮아 했고 소송이 하나 끝나면 다른 곳에서 가처분이 들어왔다. 지리산? 좋지… 하며 반신반의의 눈으로 바라보던 친구들이 여름휴가 때 놀러 온다는 전화를 할 때면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이 지나갔다. 지리산 어귀에 작은 방을 얻어 놓고 술을 먹고 울고 술을 먹고 울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이 작은 소망이 모두 산산조각나는 듯한 절망감만 가득한 나날이었다. 나아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여기는 그의 전부였다.
그렇게 술을 마시는 동안 지리산에서 그는 점차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그와 같은 생각으로 도시를 떠나 지리산에 와서 살게 된 귀농자들이었다. 그들은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고 해장국을 끓여주었다. 관청과 고소인들을 오가는 동안 그는 그보다 더 많은 따뜻한 이웃과 지리산 사람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그를 도왔다. 그 역시 술을 먹는 틈틈이 집을 설계하고 전체 조경을 그렸다. 먼저 터를 닦는 데 필요한 포클레인을 알아보니 기사와 함께 하루 일당이 엄청났다. 그는 지리산 사람들과 의논 끝에 300만원짜리 작은 포클레인을 샀다. 드디어 집을 지어도 좋다는 당연한 허가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떨어지던 날, 그는 그 포클레인을 타고 집터로 올라갔다. 새벽부터 일하고 밤늦게까지 횃불을 밝히고 일했다.
“한마디로 그때 밤이 참 짧았어요.”
그는 웃었다.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온몸은 땀투성이였고 손발 여기저기 상처가 새겨졌다. 끝이 좋게 끝난 모든 일이 그렇지만 일년 반 동안 그의 손발을 묶어 놓은 이웃은 실은 그의 열망과 소망과 꿈을 다지고 강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신의 고통과 땀방울쯤은 이미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황토로 그의 사진을 전시하는 갤러리를 짓고 그 아래 살림집도 지었다. 일년 반의 허송세월 아닌 허송세월 동안 그는 지리산의 집짓는 품앗이를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오자 집은 뚝딱뚝딱 바로 완성되었다. 함께 집을 지어본 사람들… 그들은 진정한 삶의 동반자들이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유명 사진작가 반열에 이름이 오르지 않아도 그는 행복했다. 이제 사진을 찍고 차를 끓이고 숯불을 치워 동반자들과 삼겹살이라도 구우면 행복했다. 그러던 즈음 그는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리산 둘레길이 그의 집 바로 뒤를 지나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지리산 높은 곳 누가 찾아오지 않아도 자신의 사진을 전시할 공간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던 그에게는 이제 저절로 관객들이 몰려오는 행운을 누리게 될 것이었다. 하늘의 선물 같았다. 서둘러 화개차를 준비하고 찻잔을 더 비치했다. 둘레길을 걷던 사람 누구라도 잠시 들어와 쉬면서 자신의 사진을 보고 가도록 안내판도 달았다. 차는 무료이고 사진을 꼭 사가지 않아도 된다.
그의 갤러리에 가보면 차를 마시고 사진을 구경한 사람들이 그에게 남긴 메모들이 천장 가득히 붙어 있다. 그는 느긋이 앉아 오늘도 집터를 돌본다. 어느날 실상사 앞의 소풍에 팥빙수를 먹으러 갔던 그는 지리산에서 볼 수 없는 멋진 바이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소풍 안에 들어가니 낙시인이 검정 가죽 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터프하고 멋있어 보였다. 그는 낙시인에게 맥주를 사고 바이크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앞으로 바이크에 대해서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선언했다. 이제 지리산 자락에서는 멋진 바이크를 타는 사람이 둘로 늘었다. 낙시인과 강병규 사진작가.
그는 올해부터 그의 갤러리와 집 주변에 구절초를 대량으로 심었다. 넉넉한 마당에 서부영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바비큐 시설도 차리고 나무를 깎아 벤치와 테이블도 차렸다. 9월이 오고 구절초들이 지리산의 맑은 기운에 보랏빛 구름처럼 피어나는 날 그는 그 마당에서 잔치를 하기로 했다. 낙시인 버시인 고아르피엠 강남좌파 꽁지작가, 최도사 소풍주인… 도법 스님 수경스님 연관스님 다 모시기로 했다.
“스님들은 어떻게 맥주는 식물성이니 드신다 해도 안주는 따로 식물성으로 준비하나?”
꽁지 작가가 묻자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낙시인이 거든다. “고기를 채 썰어 드려, 가늘게….”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는 동안 강병규 작가는 휴대폰을 받은 후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300만원 주고 사서 5년 동안 내 수족 같았던 포클레인 오늘 드디어 170만원에 팔았어요! 자 그날 고기는 내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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