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낙서방 턱수염 깎으면 안된다고? 그럼 뽑아” 장모 말에…
지리산 사람들의 여름은 바쁘다. 서울에서 케이크 하나 보내지 않던 친구들이 여름휴가를 계획하다가 결국 택하는 곳이 만만한 지리산 친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친구를 찾아본다고 하지만 숙박비를 절약하려는 이유가 더 크다. 이곳에 정착한 “자발적 가난 희망자”들이 집을 크게 지을 리 없으니, 안방과 마루 건넌방까지 이 식구 저 식구들의 차지가 되면 정작 주인은 마당에 텐트를 치거나 이웃집에 가서 잔다. 하지만 이웃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거기도 손님으로 가득차 있다. 게다가 텃밭에 가꾸어 놓은 상추며 고추, 가지, 호박 등도 그들이 돌아가면 메뚜기 지나간 자리처럼 휑해진다. 삼겹살 몇 근 들고 온다고 하지만 김치, 된장, 숯불은 모두 지리산 사람들의 빠듯한 살림에서 나가야 한다. 그래도 지리산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나 같은 서울내기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면서 귀찮은 손님들을 막겠지만 그들은 지리산의 넉넉한 정기 탓인지 남자 여자 끼어서도 자고 갈 때 너그러이 푸성귀를 한 아름 싸준다.
이번 여름 낙장불입 시인네 집에 장모님이 오시기로 했다. 구례구역에 기차를 타고 오신 장모님은 낙시인네의 새로 이사한 집을 맘에 들어하셨다. 귀하게 키운 딸이 문수골 산골짜기 후미진 데서 살 때는 몰래 울고 가시더니 살수록 수더분한 사위가 미더운 모양이었다. 장모님이 오시는 날 이웃집에서 고아르피엠 여사의 어머님 오신다고 김치, 된장, 숯 추렴이 들어왔다. 정자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한 잔 따르고 삼겹살 구워, 저무는 섬진강을 보더니 장모님은 감개가 무량하셨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고아르피엠과 낙장시인의 결혼 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인간과 세상에 지친(본인은 지쳤다고 하지만, 글쎄 주변 사람들의 말로는 그때도 아르피엠이 높이 돌아갔다고 한다) 고아르피엠은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연히 들른 지리산 자락에서 두 사람은 운명처럼(이것은 고아르피엠의 말이고 낙시인은 초창기에 원래 지리산에 오면 자신이 모든 사람을 안내했다고 한다) 마주친다. 낙장시인은 아르피엠의 차에 타고 지리산 이곳저곳을 소개했다.
“저기 저 차밭 보이시죠? 저 사람 오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싼값에 차밭을 샀어요, 유기농으로 차를 재배해 동기가 하는 쇼핑몰에 내놓았죠. 지금은 이곳에서 제일 큰 부자예요. 저기 아래 강변에 큰 집이 그 사람 거예요.” “저기 저 대나무밭은 그냥 대나무밭이었는데 이년 전인가 귀농한 사람이 샀다가 죽순과 대공예로 크게 성공해서 이 일대의 땅을 다 샀어요….”
아르피엠은 신기했다. 어떻게 이 촌구석에서 돈을 벌 수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자신은 한국이 싫어 캐나다로 가서 아는 선배와 사업을 해보려고 했는데, 글쎄 이 지리산 정도라면 아는 사람도 없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오년만 고생하면 저렇게 돈을 벌 수 있다니. 왠지 낙시인의 설득도 은근하고 끈질기게 느껴졌다. “멀리 가서 고생할 게 뭐 있습니까? 여기서도 열심히만 하면 돈을 버는 건 시간 문제예요.”
내숭의 여왕인 아르피엠은 수줍은 듯 대꾸했다. “글쎄요. 속으로 흉보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가 제가 걱정이 되어서 생전 처음 점을 보셨는데 제가 돈 걱정 없이 살 거라고 하셨다네요.” 실은 엄마가 아니라 자기가 미아리를 헤매며 점도 보고 오늘의 운세, 이달의 운세, 일년의 운세, 평생 사주, 당사주, 명리학, 기문둔갑, 동자귀신 내린 무당, 처녀귀신 내린 무당, 산신 내린 무당, 점성술, 타로카드 두루 보았던 것인데 그중 어떤 사람이 딱 한 명 그런 말을 했다. 고아르피엠은 그 말만 남기고 다 잊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고아르피엠은 돈을 들여 캐나다 이민을 신청해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 무렵 그녀가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났다. 지리산 순례를 하는 낙장시인을 찾아갔다가 수경 스님을 뵙게 된 것이다. 서울로 떠나는 날 수경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수경 스님께서 잘 가라고 하면서 “그럼 앞으로 또 지리산에서 뵙시다” 하셨던 것이다. 수경 스님이 누구신가? 선승으로서 직관이 번개처럼 예리하고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분 아니던가. 그분이 앞으로 지리산에서 또 뵙시다 했으니 이것은 예언이요, 소명이요, 운명 같았다(나중에 수경 스님은 이 인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그는, 그러면 그 처자를 지리산에서나 보지 다른 데서 내가 볼 일이 뭐 있겠나 원, 하고 마셨다). 그리하여 고아르피엠은 운명의 힘에 이끌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낙장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 : 지리산에 방이 하나 있을까요? 다른 뜻은 절대로 없고 제가 글을 조금 쓰려고 그럽니다.
낙 : 방이야 널려 있지만 여자 혼자 위험하니 저희 집에 와 계시지요.
고 : 호호호호, 저야 그렇다면 너무 좋지만… 호호, 그쪽이 기신데(계신데) 호호, 제가 어떻게 그 집에 가겠어요? 호호호.
낙 : 저는 늘 집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을 봐줄 사람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고 : 그럼 그 말만 믿고 지금 내려갈게요. 정말 진짜루 집에는 기시지 않는 거지요? 호호, 절대 집에 기시면 안돼요. 네? 꼭이오!!!
그 둘이 언제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고 우리가 확인할 바 아니다. 어쨌든 그들은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정 어머니 앞에서 고아르피엠이 어리광을 피웠다.
고 : 엄마, 이 사람이 여기서 오년만 열심히 노력하면 여기 땅도 사고 집도 짓고 부자가 된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원래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낙시인이 내가 얼마나 예뻤으면 그럴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속은 거 같아.
장모 : 그래? 오년만 노력하면 된다고? 그런데 너는 노력을 안 했잖니?
고아르피엠은 갑자기 기침이 났다.
고 : 엄마 근데 나보고 돈 걱정 없이 산다는 그 점쟁이 순 엉터리야 그치?
장모 : 흠, 그런데 엄마가 보기엔 너처럼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도 없다. 돈이 있어야 걱정이 생기지. 네가 돈 걱정 할 게 무엇이 있겠니?
고아르피엠은 다시 기침이 났다. 맥주가 거나해질 무렵 장모님은 기분 좋게 취해가셨다. 들어가 자야지 하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당부할 게 있다고 사위를 불렀다. “낙서방, 자네는 볼수록 사람이 참 진실하고 좋네. 우리 아르피엠이 천방지축, 저걸 누가 데리고 살까 했네만 그래도 자네니까 다 품고 사는 줄 아네. 고맙네. 내가 다 맘에 드는데 자네 그 턱수염 좀 깎으면 안되겠나?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볼수록 지저분하고, 덥네. 우선 더워!”
그러자 낙시인이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만 부탁한다는데 장모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이 아까운 수염을 깎을 수도 없었다. 김치찌개, 육개장, 설렁탕, 된장찌개 등 온갖 국물 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조심조심 해가며 길러온 수염 아닌가? 게다가 라이더라면 이 정도의 운치는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낙시인은 머리를 굴려 이 두 모녀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기로 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머님. 그런데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오나 지리산 깊은 곳에서 생식으로 솔잎만 먹고 토끼똥을 보시는 도사께서 이 수염을 길러야 평안하다고 예언을 하셨기에….”
그러자 장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처가댁은 운명에 약하고 도인에 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장모님은 일어나며 툭 말을 던졌다. “그렇게 고매하신 도인께서 수염을 깎으면 안된다고 하셨다니 하는 수 없네. 그러면… 뽑게!”
그리하여 낙시인은 몇 년 동안 애지중지하던 수염을 없앴다. 깎았는지 뽑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제 그는 말끔한 얼굴이다. 떠나는 날 장모는 고아르피엠의 부엌을 정리하고 계셨다. 그리 안 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장모님 마음이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장모님은 냉동실에 얼린 고등어, 동해안에서 부쳐준 북어,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마늘을 따로 쇼핑백에 챙기고 있었다. “내가 이걸 서울 가져다가 고등어는 찌고 양념하고, 북어는 재고, 마늘은 찧어서 냉동해서 보내주려고 하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장모는 기어이 그걸 서울로 가져갔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고아르피엠이 전화를 걸어 고등어 양념한 것, 북어 잰 것, 마늘 찧은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장모는 대답했다. “아이고, 내가 그걸 보내려고 해도 네가 집에 없을 거 같아 못 보냈다. 택배로 보냈다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겠니? 네가 언제나 좀 집에 있을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결국 택배를 못 부르고 내가 니 아빠랑 그냥 다 먹었다.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까워서.”
ⓒ 경향신문 & 경향닷컴지리산 사람들의 여름은 바쁘다. 서울에서 케이크 하나 보내지 않던 친구들이 여름휴가를 계획하다가 결국 택하는 곳이 만만한 지리산 친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는 친구를 찾아본다고 하지만 숙박비를 절약하려는 이유가 더 크다. 이곳에 정착한 “자발적 가난 희망자”들이 집을 크게 지을 리 없으니, 안방과 마루 건넌방까지 이 식구 저 식구들의 차지가 되면 정작 주인은 마당에 텐트를 치거나 이웃집에 가서 잔다. 하지만 이웃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거기도 손님으로 가득차 있다. 게다가 텃밭에 가꾸어 놓은 상추며 고추, 가지, 호박 등도 그들이 돌아가면 메뚜기 지나간 자리처럼 휑해진다. 삼겹살 몇 근 들고 온다고 하지만 김치, 된장, 숯불은 모두 지리산 사람들의 빠듯한 살림에서 나가야 한다. 그래도 지리산 사람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나 같은 서울내기들은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면서 귀찮은 손님들을 막겠지만 그들은 지리산의 넉넉한 정기 탓인지 남자 여자 끼어서도 자고 갈 때 너그러이 푸성귀를 한 아름 싸준다.
하동 화개동천에 여름이 찾아들면, 도시 사람들도 튜브와 수영복을 챙겨 하나둘씩 찾아든다. 지리산 사람들은 그래서 바빠지지만, 도시에서 온 벗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낸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저기 저 차밭 보이시죠? 저 사람 오년 전에 이곳으로 와서 싼값에 차밭을 샀어요, 유기농으로 차를 재배해 동기가 하는 쇼핑몰에 내놓았죠. 지금은 이곳에서 제일 큰 부자예요. 저기 아래 강변에 큰 집이 그 사람 거예요.” “저기 저 대나무밭은 그냥 대나무밭이었는데 이년 전인가 귀농한 사람이 샀다가 죽순과 대공예로 크게 성공해서 이 일대의 땅을 다 샀어요….”
아르피엠은 신기했다. 어떻게 이 촌구석에서 돈을 벌 수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자신은 한국이 싫어 캐나다로 가서 아는 선배와 사업을 해보려고 했는데, 글쎄 이 지리산 정도라면 아는 사람도 없이 새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오년만 고생하면 저렇게 돈을 벌 수 있다니. 왠지 낙시인의 설득도 은근하고 끈질기게 느껴졌다. “멀리 가서 고생할 게 뭐 있습니까? 여기서도 열심히만 하면 돈을 버는 건 시간 문제예요.”
내숭의 여왕인 아르피엠은 수줍은 듯 대꾸했다. “글쎄요. 속으로 흉보실지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가 제가 걱정이 되어서 생전 처음 점을 보셨는데 제가 돈 걱정 없이 살 거라고 하셨다네요.” 실은 엄마가 아니라 자기가 미아리를 헤매며 점도 보고 오늘의 운세, 이달의 운세, 일년의 운세, 평생 사주, 당사주, 명리학, 기문둔갑, 동자귀신 내린 무당, 처녀귀신 내린 무당, 산신 내린 무당, 점성술, 타로카드 두루 보았던 것인데 그중 어떤 사람이 딱 한 명 그런 말을 했다. 고아르피엠은 그 말만 남기고 다 잊어버리기로 했던 것이다. 고아르피엠은 돈을 들여 캐나다 이민을 신청해 놓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 무렵 그녀가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일어났다. 지리산 순례를 하는 낙장시인을 찾아갔다가 수경 스님을 뵙게 된 것이다. 서울로 떠나는 날 수경 스님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수경 스님께서 잘 가라고 하면서 “그럼 앞으로 또 지리산에서 뵙시다” 하셨던 것이다. 수경 스님이 누구신가? 선승으로서 직관이 번개처럼 예리하고 공간과 시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분 아니던가. 그분이 앞으로 지리산에서 또 뵙시다 했으니 이것은 예언이요, 소명이요, 운명 같았다(나중에 수경 스님은 이 인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그는, 그러면 그 처자를 지리산에서나 보지 다른 데서 내가 볼 일이 뭐 있겠나 원, 하고 마셨다). 그리하여 고아르피엠은 운명의 힘에 이끌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낙장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 : 지리산에 방이 하나 있을까요? 다른 뜻은 절대로 없고 제가 글을 조금 쓰려고 그럽니다.
낙 : 방이야 널려 있지만 여자 혼자 위험하니 저희 집에 와 계시지요.
고 : 호호호호, 저야 그렇다면 너무 좋지만… 호호, 그쪽이 기신데(계신데) 호호, 제가 어떻게 그 집에 가겠어요? 호호호.
낙 : 저는 늘 집에 없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집을 봐줄 사람을 구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 되었네요.
고 : 그럼 그 말만 믿고 지금 내려갈게요. 정말 진짜루 집에는 기시지 않는 거지요? 호호, 절대 집에 기시면 안돼요. 네? 꼭이오!!!
그 둘이 언제 부부의 연을 맺었는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고 우리가 확인할 바 아니다. 어쨌든 그들은 혼인신고를 하고 부부가 되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정 어머니 앞에서 고아르피엠이 어리광을 피웠다.
고 : 엄마, 이 사람이 여기서 오년만 열심히 노력하면 여기 땅도 사고 집도 짓고 부자가 된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원래 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낙시인이 내가 얼마나 예뻤으면 그럴까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속은 거 같아.
장모 : 그래? 오년만 노력하면 된다고? 그런데 너는 노력을 안 했잖니?
고아르피엠은 갑자기 기침이 났다.
지리산의 햇빛과 바람을 머금은 차밭 풍경이 싱그럽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고 : 엄마 근데 나보고 돈 걱정 없이 산다는 그 점쟁이 순 엉터리야 그치?
장모 : 흠, 그런데 엄마가 보기엔 너처럼 돈 걱정 없이 사는 사람도 없다. 돈이 있어야 걱정이 생기지. 네가 돈 걱정 할 게 무엇이 있겠니?
고아르피엠은 다시 기침이 났다. 맥주가 거나해질 무렵 장모님은 기분 좋게 취해가셨다. 들어가 자야지 하던 그녀는 마지막으로 당부할 게 있다고 사위를 불렀다. “낙서방, 자네는 볼수록 사람이 참 진실하고 좋네. 우리 아르피엠이 천방지축, 저걸 누가 데리고 살까 했네만 그래도 자네니까 다 품고 사는 줄 아네. 고맙네. 내가 다 맘에 드는데 자네 그 턱수염 좀 깎으면 안되겠나? 처음엔 그런가보다 했는데 볼수록 지저분하고, 덥네. 우선 더워!”
그러자 낙시인이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한 가지만 부탁한다는데 장모님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순순히 이 아까운 수염을 깎을 수도 없었다. 김치찌개, 육개장, 설렁탕, 된장찌개 등 온갖 국물 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조심조심 해가며 길러온 수염 아닌가? 게다가 라이더라면 이 정도의 운치는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낙시인은 머리를 굴려 이 두 모녀에게 가장 약한 부분을 찌르고 들어가기로 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어머님. 그런데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오나 지리산 깊은 곳에서 생식으로 솔잎만 먹고 토끼똥을 보시는 도사께서 이 수염을 길러야 평안하다고 예언을 하셨기에….”
그러자 장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처가댁은 운명에 약하고 도인에 약한 것이 틀림없었다. 장모님은 일어나며 툭 말을 던졌다. “그렇게 고매하신 도인께서 수염을 깎으면 안된다고 하셨다니 하는 수 없네. 그러면… 뽑게!”
그리하여 낙시인은 몇 년 동안 애지중지하던 수염을 없앴다. 깎았는지 뽑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제 그는 말끔한 얼굴이다. 떠나는 날 장모는 고아르피엠의 부엌을 정리하고 계셨다. 그리 안 하셔도 된다고 했지만 장모님 마음이 그런 게 아니지 않은가? 장모님은 냉동실에 얼린 고등어, 동해안에서 부쳐준 북어, 이웃집에서 가져다 준 마늘을 따로 쇼핑백에 챙기고 있었다. “내가 이걸 서울 가져다가 고등어는 찌고 양념하고, 북어는 재고, 마늘은 찧어서 냉동해서 보내주려고 하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도 장모는 기어이 그걸 서울로 가져갔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고아르피엠이 전화를 걸어 고등어 양념한 것, 북어 잰 것, 마늘 찧은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자 장모는 대답했다. “아이고, 내가 그걸 보내려고 해도 네가 집에 없을 거 같아 못 보냈다. 택배로 보냈다가 상하기라도 하면 어쩌겠니? 네가 언제나 좀 집에 있을까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결국 택배를 못 부르고 내가 니 아빠랑 그냥 다 먹었다.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까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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