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23) 기타리스트의 가이드 알바

공지영 소설가경향신문
ㆍ“농활은 아는데 산활은 뭐죠” “살아있는 체험을 하는 곳이죠”

시험을 보고 난 후에 잘 봤느냐고 물으면 대개 “응”이라고 대답하는 쪽이 공부를 못하는 아이일 확률이 높다. “아니요, 망쳤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는 아주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고 말이다. 농사일도 마찬가지여서 기타리스트는 여름이 되자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유기농법이 뭔가. 벼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라다가 나중에 벼가 익으면 되는 것이다. 벼를 뭐 꼭 베어서 말리라는 법이 있나, 서서 말리면 더 자연스럽지 않나 말이다. 해보지도 않고 안된다고 하는 이들은 그에게는 딱 질색이었다.

귀농한 기타리스트(왼쪽에서 두번째)가 버들치 시인 등과 함께 만든 ‘동네밴드’에서 열창하고 있다. 도시의 삶이 버거웠듯 산 속 삶도 쉽지 않지만, 그는 ‘자발적 가난’을 외치며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산다. 이원규 시인 촬영


그래서 한가한 이번 여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다. 지리산 섬진강 관광 안내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소문을 내자 입질은 뜻밖에도 그의 처가 쪽에서 왔다. 장모님의 후배 친구분의 조카사위의 처형 내외가 결혼 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동부인 나들이를 하는데 그에게 가이드를 부탁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기쁨에 겨워 자신이 가입한 카페 게시판마다 이 소식을 알리고, 자신이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할 것이고 상황을 보아서 지리산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 설립의 포부가 있음을 밝혔다. 그런데 뜻밖에도 댓글들이 시원치 않음은 물론이고 귀농한 지 2년도 안되는 자네가 내게 우선 가이드를 받게, 하는 등 듣기에 따라서는 모욕적인 내용도 있었다.

마침 그때 꽁지 작가가 내려와 있었는데,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노력이 이렇듯 비웃음을 산 나머지 예민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토로했다. 꽁지 작가는 그를 격려하면서 괜찮다고 했다. 실은 꽁지 작가는 어찌어찌 독일 베를린에서 일 년을 살다가 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가하게 되자 작가는 물론 화가, 음악가 등이 대거 프랑크푸르트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꽁지 작가의 친구 중에 한 판화가는 해외여행이 처음이었다. 그는 공항에서부터 꽁지 작가의 옷소매를 붙들고 “꽁지야, 너 나 버리고 혼자 가면 안돼. 응? 너 꼭 나하고 같이 다녀야 해” 하고 울상을 지었다. 비행기에 타면 잠에 떨어지는 나머지 평생 시차라고는 겪어 본 일 없는 꽁지 작가는 그래서 그날 비행 시간 내내 그 판화가 친구가 독일에 대해 질문을 하도 해대는 바람에 한잠도 못 잤다고 했다. 화가 좀 나긴 했지만 마흔이 넘어 하는 첫 해외여행이니 그럴 수도 있다 싶어 참았는데, 이틀이 지나자 친구가 보이지 않더니 사흘째 되는 날 도서전이 열리는 광장 앞에서 친구 서너 명을 몰고 다니며 독일 가이드를 자처하는 판화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꽁지 작가는 그러니 기타리스트가 지리산에 내려와 이 년이나 살고 나서 하는 가이드는 그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라고 했다.

기타리스트는 의기양양 구례구역으로 부부를 마중하러 나갔다. 부부는 기타리스트를 보자마자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강원도 어디라던가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 부부였다. 앞으로 여행사를 차리려면 무엇보다 내가 아니라 손님의 구미에 일정을 맞추어야 했으므로 그는 따라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척했다. 점심시간이었으므로 그들은 우선 역 앞의 식당으로 갔다. 이 집 주인도 독실한 신자이므로 이 분들이 목사님 내외라는 것을 알면 대우가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들은 서시천이 바라다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목사님, 시원하게 맥주 한 잔 곁들이시겠습니까?” 목사가 약간 진보적이라는 정보를 들은 그는 일단 간을 보았다. 역시 운동권 출신 목사답게 그는 반색을 하며 “아하 그거 좋지요” 했다. 그런데 주인이 메뉴판을 들고 오자 목사의 낯빛이 바뀌더니 한사코 맥주 같은 것은 안 먹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황한 기타리스트는 맥주 한 잔쯤이야 이 더위에 뭐 어떠냐고 말을 건넸지만 소용이 없었다. 주인이 나가자 목사가 물었다. “혹시 저분에게 들어오면서 내가 목사라고 했습니까?” 기타리스트는 의기양양, “아 그랬죠. 여기 주인이 독실한…” 그러자 목사가 천장 위의 스피커를 가리켰다. “아까 제가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찬송가가 흐르기 시작했어요. 분위기가 이런데 어떻게 술을 마시겠습니까.” 그러고는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참게탕이 나오자 목사는 기도를 시작했다. 처음에 끝날 듯 끝날 듯 이어지던 기도는 끝도 없이 이어져 그들이 결혼하던 날부터 고생스럽게 사목을 시작하고 어찌어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이제 동부인하여 20년 만에 이렇게 여행을 떠나오게 된 것이 감사하다는 내용이었다. 기타리스트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목사님 기도가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

장마철의 섬진강 모습. 부연 물안개가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목사와 그 사모님은 몹시 뚱뚱했다. 기타리스트의 티코는 너무 작았다. 그러나 기타리스트는 열심히 그들을 안내했다. 운조루와 쌍계사 다원과 화개장터. 마지막 코스로 그들은 가파른 오르막 산길로 들어섰다. 팻말에는 ‘지리산활공장’이라는 표시가 있었다. 목사가 말했다. “제가 386세대입니다. 제가 대학 때 우리도 농활이니 공활이니 한다고 방학 때마다 공단으로 농촌으로 떠났었죠. 그런데 역시 이 지리산, 좌와 우의 이념이 대립한 비극의 현장인 이곳에는 산활을 할 수 있는 곳이 있군요.” 그러자 사모님이 물었다. “농활 공활은 들어보았는데 산활은 뭐예요.” 목사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아직 그것도 모르는군요. 바로 살아 있는 체험을 하는 곳이라는 뜻이겠죠.” 그러자 사모님은 감동에 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이곳에 대나무가 많이 나니까 활을 만드는 공장이 있는 줄 알았어요.”

트랜스미션을 갈 때가 다 된 기타리스트의 티코는 겨우겨우 활공장 위로 도착했다. 그의 차가 조금만 좋은 것이었다면 두 사람의 말에 참견하고 싶었지만, 트랜스미션이 낡아 언제 뒤로 밀릴지 몰라 긴장하는 바람에 그는 미처 부부의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때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홀연히 바람이 불고 산 아래 걸친 구름이 커튼처럼 열리면서 시야가 환해졌다. 기타리스트의 입에서 탄성이 나왔다. “저기 저기가 광양만입니다. 이런 일은 좀처럼 없습니다. 그 옆이 오동도 보이시죠? 아! 대단합니다.” 마치 남산타워에 올라가 인천항을 내려다보는 듯 대기는 투명했다. 사모가 물었다. “그런데 산활은 어디서 어떻게 하는 겁니까?” 기타리스트는 머뭇거렸다. “그게 말입니다. 여기가 활공장(滑空場)입니다. 지리산 하고 띄어쓰기를 하고 행글라이더 활공장이라고 했어야 했는데,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고 말았네요.”

목사는 고집이 센 사람인 것 같았다. 잠시 당황하던 그는 작게 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그래 여기서 활공을 시작하면 죽을 듯 느낄 수도 있고 그러니 자기가 살아 있다는 체험을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낮은 지역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런 삶에의 자각 말입니다.” 기타리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 들판을 보십시오. 여기가 박경리 선생이 <토지>라는 소설의 무대로 설정한 악양 들판입니다. 왼쪽으로 들판을 지나 골짜기에 오르면 맨 끝에 파란 슬레이트 지붕 집이 보이실 겁니다. 그게 버들치라는 시인의 집입니다. 얼마 전 그는 강도가 돈을 내놓으라고 하자 돈이 이만원밖에 없어 미안하다며 은행 카드도 주고 비밀번호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마 성경에 나온 대로 속옷도 달라면 주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기 섬진강이 휘돌아치는 강가에 낙장불입 시인이 삽니다. 지리산과 섬진강 지킴이인 그는 수경 스님께서 잠적하시자 매일 강가에 나가 기도합니다. 이 두 곳이 아마도 훗날 유적지가 될 곳입니다. 극비사항이니 잘 보아 두십시오.”

목사 부부는 무슨 소리인지 잠시 생각하더니 이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하자고 했다. 기도가 끝나고 기타리스트는 자신의 배낭에서 꾸러미를 꺼내 목사 부부에게 건넸다. “저 버들치와 낙시인의 시집 한 권씩, 그리고 여기 반짝이는 옷가게에서 파는 칡즙을 두 병 넣었습니다. 제 첫 고객이 되어주신 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제 꿈은 이곳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를 설립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분들을 위해 섬진강가에 음악 전문 라이브 카페를 만드는 것입니다. 장비는 제가 세운 상가에서 장사하다가 다 못 판 것을 아직 가지고 있으니 문제없고 메뉴도 정해졌습니다. 버들치 코스와 고아르피엠 코스. 버들치 시인 코스란 정갈한 채식 밥상을 말하는 것이고, 고아르피엠 코스란 아무렇게나 대충 찬밥을 담아 성의 없이 만든 코스랍니다. 그게 섬진강의 명물이 될 것입니다.”

목사 부부는 감격어린 표정을 지었다. 가난한 그들은 여기서 하룻밤 잠도 못 자고 다시 강원도로 떠나야 하는데 그들이 내미는 가이드비가 겨우 3만원이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기타리스트의 손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드릴 물질은 없으나 방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가이드님이 저희와 다음에 만날 때는 티코가 아니라 사륜구동으로 가이드 하기를 말입니다. 실은 아까 티코가 헉헉거리면서 오를 때 이 낭떠러지에서 죽을 뻔한 느낌을 받으며 이게 산활이구나 했거든요. 이건 진정한 산활이었습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