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24) 그 사람이 없어도 괜찮아

공지영 소설가경향신문

ㆍ“버시인에 안겨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그녀의 말에 시인은 그만…

이 여름은 섬진강가도 덥다. 그러나 속 깊은 섬진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송송 맺히는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하다. 나는 고 아르피엠과 낙장불입 시인이 나간 빈집에서 지화자·얼씨구 두 마리의 개와 집을 보며 정자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이럴 때는 뭐 꼭 글을 써야 하나, 꼭 연재를 해야 하나, 우리 애들이 꼭 공부를 잘해야 하나, 내가 꼭 살을 빼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른하고 완벽한 만족감. 아마 천국이란 이런 것일 것만 같다.

화사한 원추리꽃 너머로 지리산이 보인다. 7~8월에 만개하는 원추리는 지리산의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다. | 이원규 시인 촬영

내가 스름스름 막 잠에 빠져들고 있는데 들들들들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자는 몸매가 다 드러나는 민소매의 꽉 달라붙는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게다가 목에 두른 얇은 스카프며 들들들들 이 시골마을의 정적을 깨는 바퀴 달린 여행 가방까지. 여자는 정자에 앉은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는데 인터넷 사이트 오늘의 날씨에 어울리는 차림새에서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이런 차림으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지리산 자락에서 모든 사람의 눈총을 받았으리라. 하지만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다만 자세히 보니 코와 입 사이에 작은 이슬 같은 땀이 송송 맺혀 있었는데, 저 스카프가 보기에 좋기는 하지만 목에 금방 땀띠라도 돋을 게 분명해 보였다. 나도 젊은 시절에는 여름에 부츠 신고 다니다가 무좀에 걸릴 뻔하기도 하고 겨울에 시폰 원피스 입고 얼어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여기가 낙장불입 시인님 댁 아닙니까?” 내가 맞다고 하자 여자는 짧게 한숨을 쉬더니 “지금 안 계신가 보죠?” 했다. 그러고는 “제가 저녁에 온다고 하고 좀 일찍 왔거든요. 여기 우선 가방 좀 맡겨놓고 가도 될까요?” 했다. 뭐 넓은 시골집 마당에 그깟 가방 하나 맡긴다고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나는 그러라고 했다. 그녀는 가방을 현관 앞에 놓았다. 나긋나긋한 이목구비에 여리고 섬세한 인상이었으나 뭔가 슬픔이 있는 듯 어두워 보였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요즘 들어 낙시인과 고여사의 다툼이 잦아지고 있는 것 때문이었다. 요지는 이 지리산 일대에 독신녀들이 늘어나면서 버들치 시인뿐만 아니라 낙시인의 인기도 점점 치솟고 있는 데 있었다. 대체 여자들은 왜 그렇게 시인을 좋아할까. 지리산 총각들은 바야흐로 시를 공부하려고 덤비고 있었다. 그때 대문 쪽으로 걸어가던 여자가 뒤를 돌아보며 내게 물었다. 말투로 보아, 많이 중요한 용건인데 차마 다 말할 수가 없어서 망설이다가 겨우 내뱉는 것 같았다. “버들치 시인을 아시나요? 잘 계시겠죠?”

여자는 곧 울 것 같았다. 그제야 모든 사태가 짐작이 갔고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다. 2001년도였던가. 지리산 댐과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기 위해 지리산 둘레길 850리를 17일간 순례한 적이 있다. 수경 스님께서 선방에서 나와 줄기찬 순례를 시작한 것도 바로 그 지리산 댐 때문이었다. 유서 깊은 절 실상사조차 물에 잠겨버리게 되니까 말이다. 나는 그 무렵 다른 친구들과 버들치 시인네 집에 있었다. 버들치 시인이 낙동강 살리기 순례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낙시인이 우리들을 보며 말했다. “버들치 형 이번 순례 때 장가갈 뻔했네.”

자초지종은 그랬다. 순례 중에 낙동강 어느 마을에 이르렀는데 그 지역 유지가 크게 잔치를 벌여주었다. 집도 방도 내주었다. 순례단은 오랜만에 방에서 잘 수가 있었다. 버들치 시인과 낙시인은 임시 사무실을 겸해 작은 방을 둘이만 쓰고 있었는데 버들치 시인은 오랜만에 샤워를 하고 녹초가 된 채로 누워 깜빡 잠이 들었다. 한옥의 미닫이 방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가 나기에 그는 당연히 낙시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어떤 무게가 가슴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눈을 뜨니 문자 그대로 코앞에 낯선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는 버시인 위에 올라 막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버시인이 막 비명을 지르려고 하니 여자가 손으로 버시인의 입을 막았다(상황이 좀 이상하다. 보통 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어야 할 위치가 바뀐 듯한데…). 그러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 아무개이옵니다. 아무 뜻도 없습니다. 그저 버시인님 가슴에 잠시 안겨보는 것이 순례 시작부터 소원이었습니다. 버시인님도 제가 싫지는 않으시죠?” 그러자 마음 약한 버시인은 덜덜 떨며 대답했다. “그, 그럼요. 하지만 지금은 순례 중이에횻!”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다 “아 그렇군요.” 그때 낙시인이 방으로 들어섰고 모든 사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말도 안돼. 그동안 순례길에서 무슨 눈짓이나 몸짓이나 말이 오고 갔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여자가 난데없이 덮칠 수가 있어?” 내가 놀리자 버시인은 정색을 했다. “아녀. 참말로 나는 그 여자한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니까.” 그러자 낙시인이 대답했다. “그건 형 말이 맞아. 그저 날이 추워횻! 머플러 두르세횻! 차도 한잔 드시고횻! 이랬을 뿐이지.”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버시인이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횻? 안되횻! 오지 마셔횻! 지금 손님들이 있어횻! 내일 지리산 순례 준비도 해야 해횻! 지리산 순례 가느냐고횻! 네 가지횻!” 버시인은 전화를 끊더니 곰곰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낙시인, 나 내일 지리산 순례 못 가겠네. 그 여자가 집으로 온다기에 못 오게 했더니 내일 실상사로 와서 지리산 순례에 참여할 태세네. 그럼 나는 17일 동안 밤마다 편히 잠을 못 잘 게 아닌가? 내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그땐… 대체 어찌 될 텐가?”

수경 스님이 순례에 나서기 전 머물던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 극락전. | 이원규 시인 촬영

“뭐가 어찌돼? 마흔 넘은 노총각이 장가 가고 좋지!” 우리가 입을 모아 말하며 웃었지만 버시인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리하여 순례단의 핵심인 버들치는 여자를 피하느라 집에 머물러 있었다. 실상사 앞에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택시가 한 대 와서 서더니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핫팬츠 그리고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거기서 내렸다. 여자는 들들들들 소리가 나는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을 끌고 있었다. 등산 복장에 배낭을 진 사람들이 여자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낙시인이 내 옆구리를 찔렀고 나는 곧 그녀가 그녀임을 알게 되었다. 여자는 차마 버시인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눈동자가 불안스레 이리저리 흔들리며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눈치를 보아서 버시인이 오지 않았으면 그만 돌아가도 될 것을, 여자는 핵심 멤버인 버시인이 여기서 빠질 리 없다고 확신했는지 그날 밤을 묵고 하이힐을 신은 채 순례를 따라나섰다. 하이힐 신어 불편한 발이야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해도 들들들들 끌리는 가방 소리는 모든 사람의 귀에 거슬렸다. 게다가 비포장 산길이었다. 보다 못한 낙시인은 가방을 받아 선발대로 가는 차에 실었다. 고아르피엠이 한마디 했다. “그냥 놔둬, 여기서 돌아가는 게 나아.”

하지만 여자도 고집스러웠다. 여자는 이틀 후 발병이 나서 앓아눕고 말았다. 돌아가려고 하니 이미 산길로 접어들어 그녀가 실상사 앞으로 돌아가려면 누군가가 따라서 다시 이틀을 걸어야 했다. 이제는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여자는 고개를 못 들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버들치 대신 낙시인이 안절부절못했고 고 아르피엠은 그녀가 미웠다. “꽁지 은니, 저 여자 보내야 허지 않으까? 저 여자 때메 남자들이 불심이 안 생기는 거 같아. 나야 저렇게 날씬하고 예쁘고 젊은 여자를 봐도 불심이 솟아나지만 말이야.”

여자는 풀이 죽었다. 그만 내려가는 게 어떠냐고 권하는 낙시인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제가 걷지는 못하겠는데 요리는 좀 하니까 선발대와 함께 차에 태워주시면 밥도 하고 국도 끓이겠어요.” 차마 매정하게 화를 내지는 못한 낙시인은 그러라고 하고 말았다. 그때 여자가 물었다. “저 버시인님은 어디….” “아, 일이 있어 이번 순례에 못 와요.” 그러자 여자는 낙담 어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어디 편찮으신 게 아니니 됐어요.” 고 아르피엠이 눈치를 주었지만 낙시인은 이런 그녀가 딱해서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주었다. 이런 마음을 이해하기에 여자들은 시인들을 사랑하는지.

저녁 무렵 여자는 구례 읍내에 나가 가오리 찜을 사가지고 다시 찾아왔다. 정자에 앉아 저무는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여자의 얇은 스카프가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보기만 해도 더웠다. 여자는 다소곳이 말을 시작했다.

“공부하러 떠나요. 지난번 지리산 순례에서 우연히 천연 염색을 하는 걸 보게 되었고 이후 내내 그 염색이 하고 싶었어요. 서울서 졸업하고 남들 보기에 좋은 직장 다녔지만 이상하게 기쁨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게 내 일이 아닌데 싶었는데, 이제 제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순례길에서 찾은 거예요. 앞날은 불안하지만 저는 염색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잊을 수가 있었어요. 일주일 후에 인도로 갑니다. 염색 공부를 하러요.”

그 모든 것 안에는 버들치가 들어 있을 것이다. 낙시인이 그녀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며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려는데, 아까부터 낙시인의 그런 눈초리가 맘에 안 들던 고 아르피엠 여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잘 생각했네. 그런데 스카프는 좀 빼고 가지, 인도도 더울 텐데…. 으으 내 목에 땀띠가 다 돋으려고 그래!”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