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삼보일배도 모자라서 결국 스님을 사라지게 하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그는 17세 때 출가를 했다. 속세의 일을 캐내어서 무엇하겠는가마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이 아마도 사춘기의 명민한 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훗날 전국을 도보 순례할 때 환갑이 다 된 그는 공주산성 근처에서 중학교 소풍 때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가 교복을 입은 그의 머리를 만지며 “너 큰스님 되겠구나” 했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수덕사에 출가한 그는 덕숭 문중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응담이라는 스승 밑에 상좌가 되는데 응담 스님은 40년 동안 상좌라고는 오직 수경 한 사람만을 두었다.
어느 날 응담 스님이 서산 간월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경도 응담 스님을 따라갔다. 간월암에서는 물때에 맞추어 하루 두 번 정도 뭍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노쇠한 응담 스님의 정신은 깜박깜박 흐려져 물때를 자꾸 틀리게 계산하곤 하셨다. 그날도 그랬다. 스님은 들어오고 있는 물을 나가고 있는 물이라 착각하고는 수경을 끌고 길을 나섰다. 물이 무릎까지 차오고 이어 허리까지 차왔지만 스님은 이것이 빠지고 있는 물이라고 고집을 피우셨다.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했던 수경은 한방에 큰스님을 기절시키고 그분을 끌고 다시 암자로 돌아왔다. 깨어나 자초지종을 깨달은 응담은 수경에게 한마디 했다. “넌 됐다.”
하안거 동안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40년을 보냈다. 나중에 환경운동을 하면서도 이는 어김이 없었다. 그는 절친한 도반인 도법, 연관과 함께 천년고찰이나 그때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실상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지리산댐이 완공되면 자기가 앉은 자리가 물바다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운동에 뛰어든다. 자신의 자리가 물에 잠기면 중생의 자리 또한 물에 잠기고 자신이야 다른 선방으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두고 그리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승이 선방을 나와 거리로 나서면 그것은 필시 난세이다. 선승은 행정을 처리하고 대중의 셈에 바른 사판승과 달라 실은 과격하다. 그들은 진리가 하나임을 알고 그것을 향해서 온몸이 부서져라 돌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지리산에서 홀로 술을 먹고 있는 낙장불입 시인을 부른 것도 그였다. 기자 출신이고 운동 경력이 있다는 말에 낙시인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지리산을 살릴 일꾼으로 점찍은 것도 그였다. 1999년부터 11년 낙시인은 그를 충실히 수발했다. 수경 스님은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하염없이 넓은 아량으로 낙시인을 아꼈다.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낙시인이 수경 스님을 어떻게 여겼을지 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다.
그 밤 낙시인이 고아르피엠의 차를 타고 급히 서울로 왔다. 여주 여강선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직 수경 스님의 잠적에 대한 기사가 다 실리지 않은 밤이었다.
“겨울옷하고 된장, 간장 등을 챙겨 떠나셨대…. 그러니 아무리 빨라도 이 겨울이 지나야 돌아오실 것 같아.”
수경의 잠적 소식은 낙시인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렇게도 낙천적이고 그렇게도 대담하던 분이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에 거의 표정을 잃고 입을 다무셨다고 했다. 문수 스님의 다비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고는 이후에 밥을 먹어도 토할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고 한다.
“문수 스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보통 분신한 사람이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있다가 죽게 되는 것과 다르지. 그 이유는 그분이 내장까지 완전히 연소하도록 석유를 드셨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가부좌를 틀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지은 채로 돌아가셨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생과 사가 이미 하나이고 중생과 내가 이미 하나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분은 최근 3년 동안 벽만 보고 넣어주는 하루 한 끼 밥만 먹고도 그걸 깨달으신 거야. 이제 내가 죽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낙시인,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그러니 나는 신도들에게 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중인 거야.”
낙시인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순례 속에서의 수경을 회상했다. 언제였던가. 새벽에 깨어나 화장실에 가려던 나는 누군가가 여자 화장실에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아직도 어두운 새벽, 머릿속으로 성추행, 성폭행 등의 흉흉한 단어가 떠다니는데 자세히 보니 수경 스님이었다. 그는 두 손에 커다란 뭉치를 잔뜩 들고 나와 버리고서는 냇물로 가서 손을 씻고 다시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삼보일배를 하는 새벽에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일어나 풀과 모래를 섞어 맨손으로 화장실을 닦는다고 했다. 아침마다 깨끗했던 순레단의 화장실이 그의 덕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무릎연골이 다 닳아 걷지도 못하는 분이 어떻게, 싶자 나는 그만 숙연해져 버렸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우리가 수경 스님의 흉을 보던 자리가 있었다. 낙시인이 “너무 목욕을 안 하셔” 하자 버들치 시인이 덩달아 “목욕만 안 하는 줄 아니? 양말도 안 빨아. 저번에는 한 번 스님과 같은 방에서 자는데 스님이 양말을 홱 벗어던지시는데 양말이 부츠처럼 턱 하고 서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땀과 소금기에 절어 서는 양말을 본 일이 있는지. 우리는 배를 잡고 웃는데 버시인이 한술 더 떴다. “그래도 희한하게 냄새는 안 나. 채식만 하시면 그런 건지 말이야. 그런데 회의 중에 항상 옷 속으로 손을 넣어서 때를 밀잖아. 그리고 그걸 몰래 하는 게 아니라 꼭 때 민 것을 눈높이로 올려 그걸 확인하고 그걸 또 앞에 가지런히 모아요. 벌레들 준다고.” 그것이 물을 아끼느라 한여름 개울가에서도 바가지 하나로 목욕하는 수경의 습관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대강을 파헤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뭇 생명을 죽이는 공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가 스님 된 지 40년 만에 하는 수 없이 화계사 주지가 된 일도 기억이 났다. 난생 처음 주지라는 것을 맡고 절에 가보니 한마디로 대책이 없었다. 스님은 부임하는 날 딱 한마디를 했다. “너희들 하던 대로 그대로 하거라.” 그리고 스님은 작은 뒷방에 짐을 풀고 날마다 제일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고 불단을 청소하고 염불을 외웠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스님들은 석달이 지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염불 준비를 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던 날 어떤 나이든 보살이 날 잡고 말했다. “에구 절에 진짜 중이 있네.” 그러더니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염불하시는 솜씨를 보니 알바만 뛰어도 30분에 300만원은 족히 받겠구먼.”
언젠가 해인사 극락전이 부서지고 거기서 스님의 발원으로 21일 참회단식이 끝나던 날 스님의 짐 속에 웬 노트가 보이기에 살짝 열어보았더니 노트 한 권 가득 맛집 기행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우리가 깔깔거리자 스님은 겸연쩍어하시며 얼른 노트를 빼앗아 들더니 “굶으면서 잡지를 보니까 웬 먹을 게 이렇게 많이 보이는지 말이야” 했다. 나는 두꺼운 안경 속에 가리어진 스님의 눈을 보며 웃었다. 참회단식을 하면서 몰래 방에 들어와 가위로 정성스레 국숫집, 우동집, 냉면집의 기사를 오리는 그 모습을 상상하자, 죄송한 말씀이나 너무 귀여우셨기 때문이었다. 스님이 먹을 것에 초연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의 잠적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으리라. 된장, 고추장, 간장 그리고 겨울옷….
절뚝이며 그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선방에서 삼년 면벽한 스님을 불태우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대강 개발을 즉각 중단하라.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라”는 당연한 말을 제 몸에 불을 붙여 해야만 하는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가. 그러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세상은. 40년을 선방에 있던 스님을 불러내 삼보일배를 하게 하고 결국 사라지게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낙시인은 그 밤 내게 여강선원에 계시던 스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님은 ‘지리산 행복학교’를 좋아하셨어. 그때 네가 그거 썼잖아. 어떤 신부님이 ‘이놈들아 너희들 밤마다 하면서 여기 이분들이 일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걸 가지고 그러냐’ 하고. 그게 실은 신부님이 아니라 명진 스님이었잖아. 그러니까 수경 스님이 그걸 보시고는 눈을 똘망똘망 빛내시더니 ‘명진이 여기서는 신부가 되었네’ 하더니 다시 나를 보고 또 물으시는 거야. 그런데 낙시인, 정말 결혼하면 날마다 하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 경향신문 & 경향닷컴그는 17세 때 출가를 했다. 속세의 일을 캐내어서 무엇하겠는가마는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이 아마도 사춘기의 명민한 소년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훗날 전국을 도보 순례할 때 환갑이 다 된 그는 공주산성 근처에서 중학교 소풍 때 어떤 스님이 지나가다가 교복을 입은 그의 머리를 만지며 “너 큰스님 되겠구나” 했다는 말을 기억해냈다. 수덕사에 출가한 그는 덕숭 문중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는 응담이라는 스승 밑에 상좌가 되는데 응담 스님은 40년 동안 상좌라고는 오직 수경 한 사람만을 두었다.
수경 스님(가운데)은 거리의 선승이다. 몸을 던져 걷고 온 마음을 다해 또 걷는다. 2008~2009년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 오체투지 순례를 하는 스님과 일행의 모습. | 이원규 시인 촬영
어느 날 응담 스님이 서산 간월암으로 거처를 옮기고 수경도 응담 스님을 따라갔다. 간월암에서는 물때에 맞추어 하루 두 번 정도 뭍으로 나올 수 있었는데 노쇠한 응담 스님의 정신은 깜박깜박 흐려져 물때를 자꾸 틀리게 계산하곤 하셨다. 그날도 그랬다. 스님은 들어오고 있는 물을 나가고 있는 물이라 착각하고는 수경을 끌고 길을 나섰다. 물이 무릎까지 차오고 이어 허리까지 차왔지만 스님은 이것이 빠지고 있는 물이라고 고집을 피우셨다. 중학교 때부터 유도를 했던 수경은 한방에 큰스님을 기절시키고 그분을 끌고 다시 암자로 돌아왔다. 깨어나 자초지종을 깨달은 응담은 수경에게 한마디 했다. “넌 됐다.”
하안거 동안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40년을 보냈다. 나중에 환경운동을 하면서도 이는 어김이 없었다. 그는 절친한 도반인 도법, 연관과 함께 천년고찰이나 그때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실상사로 들어간다. 그리고 거기서 지리산댐이 완공되면 자기가 앉은 자리가 물바다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운동에 뛰어든다. 자신의 자리가 물에 잠기면 중생의 자리 또한 물에 잠기고 자신이야 다른 선방으로 떠나면 그만이지만 고통받는 중생을 두고 그리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선승이 선방을 나와 거리로 나서면 그것은 필시 난세이다. 선승은 행정을 처리하고 대중의 셈에 바른 사판승과 달라 실은 과격하다. 그들은 진리가 하나임을 알고 그것을 향해서 온몸이 부서져라 돌진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지리산에서 홀로 술을 먹고 있는 낙장불입 시인을 부른 것도 그였다. 기자 출신이고 운동 경력이 있다는 말에 낙시인을 한 번도 보지 않고도 지리산을 살릴 일꾼으로 점찍은 것도 그였다. 1999년부터 11년 낙시인은 그를 충실히 수발했다. 수경 스님은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하염없이 넓은 아량으로 낙시인을 아꼈다.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낙시인이 수경 스님을 어떻게 여겼을지 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린다.
그 밤 낙시인이 고아르피엠의 차를 타고 급히 서울로 왔다. 여주 여강선원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직 수경 스님의 잠적에 대한 기사가 다 실리지 않은 밤이었다.
“겨울옷하고 된장, 간장 등을 챙겨 떠나셨대…. 그러니 아무리 빨라도 이 겨울이 지나야 돌아오실 것 같아.”
수경의 잠적 소식은 낙시인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렇게도 낙천적이고 그렇게도 대담하던 분이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에 거의 표정을 잃고 입을 다무셨다고 했다. 문수 스님의 다비식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고는 이후에 밥을 먹어도 토할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고 한다.
“문수 스님은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어, 보통 분신한 사람이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있다가 죽게 되는 것과 다르지. 그 이유는 그분이 내장까지 완전히 연소하도록 석유를 드셨기 때문이야. 그러면서도 가부좌를 틀고 입가에는 미소까지 지은 채로 돌아가셨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생과 사가 이미 하나이고 중생과 내가 이미 하나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야. 그분은 최근 3년 동안 벽만 보고 넣어주는 하루 한 끼 밥만 먹고도 그걸 깨달으신 거야. 이제 내가 죽어야 할 차례인 것 같은데 낙시인, 나는 아직도 죽음이 두렵다. 그러니 나는 신도들에게 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중인 거야.”
2004년 생명평화 탁발순례에 나선 수경 스님(오른쪽)과 도법 스님.
낙시인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순례 속에서의 수경을 회상했다. 언제였던가. 새벽에 깨어나 화장실에 가려던 나는 누군가가 여자 화장실에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아직도 어두운 새벽, 머릿속으로 성추행, 성폭행 등의 흉흉한 단어가 떠다니는데 자세히 보니 수경 스님이었다. 그는 두 손에 커다란 뭉치를 잔뜩 들고 나와 버리고서는 냇물로 가서 손을 씻고 다시 자신의 처소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삼보일배를 하는 새벽에도 어김없이 가장 먼저 일어나 풀과 모래를 섞어 맨손으로 화장실을 닦는다고 했다. 아침마다 깨끗했던 순레단의 화장실이 그의 덕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알았다. 무릎연골이 다 닳아 걷지도 못하는 분이 어떻게, 싶자 나는 그만 숙연해져 버렸던 기억이 있다.
언젠가 우리가 수경 스님의 흉을 보던 자리가 있었다. 낙시인이 “너무 목욕을 안 하셔” 하자 버들치 시인이 덩달아 “목욕만 안 하는 줄 아니? 양말도 안 빨아. 저번에는 한 번 스님과 같은 방에서 자는데 스님이 양말을 홱 벗어던지시는데 양말이 부츠처럼 턱 하고 서는 거야” 하는 것이었다. 땀과 소금기에 절어 서는 양말을 본 일이 있는지. 우리는 배를 잡고 웃는데 버시인이 한술 더 떴다. “그래도 희한하게 냄새는 안 나. 채식만 하시면 그런 건지 말이야. 그런데 회의 중에 항상 옷 속으로 손을 넣어서 때를 밀잖아. 그리고 그걸 몰래 하는 게 아니라 꼭 때 민 것을 눈높이로 올려 그걸 확인하고 그걸 또 앞에 가지런히 모아요. 벌레들 준다고.” 그것이 물을 아끼느라 한여름 개울가에서도 바가지 하나로 목욕하는 수경의 습관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대강을 파헤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뭇 생명을 죽이는 공사가 어떻게 다가왔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가 스님 된 지 40년 만에 하는 수 없이 화계사 주지가 된 일도 기억이 났다. 난생 처음 주지라는 것을 맡고 절에 가보니 한마디로 대책이 없었다. 스님은 부임하는 날 딱 한마디를 했다. “너희들 하던 대로 그대로 하거라.” 그리고 스님은 작은 뒷방에 짐을 풀고 날마다 제일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고 불단을 청소하고 염불을 외웠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스님들은 석달이 지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염불 준비를 했다.
내가 그곳을 방문하던 날 어떤 나이든 보살이 날 잡고 말했다. “에구 절에 진짜 중이 있네.” 그러더니 다시 말하는 것이었다. “염불하시는 솜씨를 보니 알바만 뛰어도 30분에 300만원은 족히 받겠구먼.”
언젠가 해인사 극락전이 부서지고 거기서 스님의 발원으로 21일 참회단식이 끝나던 날 스님의 짐 속에 웬 노트가 보이기에 살짝 열어보았더니 노트 한 권 가득 맛집 기행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우리가 깔깔거리자 스님은 겸연쩍어하시며 얼른 노트를 빼앗아 들더니 “굶으면서 잡지를 보니까 웬 먹을 게 이렇게 많이 보이는지 말이야” 했다. 나는 두꺼운 안경 속에 가리어진 스님의 눈을 보며 웃었다. 참회단식을 하면서 몰래 방에 들어와 가위로 정성스레 국숫집, 우동집, 냉면집의 기사를 오리는 그 모습을 상상하자, 죄송한 말씀이나 너무 귀여우셨기 때문이었다. 스님이 먹을 것에 초연한 사람이었다면 나는 그의 잠적이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으리라. 된장, 고추장, 간장 그리고 겨울옷….
절뚝이며 그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선방에서 삼년 면벽한 스님을 불태우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사대강 개발을 즉각 중단하라. 소외된 사람을 배려하라”는 당연한 말을 제 몸에 불을 붙여 해야만 하는 이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인가. 그러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세상은. 40년을 선방에 있던 스님을 불러내 삼보일배를 하게 하고 결국 사라지게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낙시인은 그 밤 내게 여강선원에 계시던 스님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스님은 ‘지리산 행복학교’를 좋아하셨어. 그때 네가 그거 썼잖아. 어떤 신부님이 ‘이놈들아 너희들 밤마다 하면서 여기 이분들이 일평생 한 번 할까 말까 한걸 가지고 그러냐’ 하고. 그게 실은 신부님이 아니라 명진 스님이었잖아. 그러니까 수경 스님이 그걸 보시고는 눈을 똘망똘망 빛내시더니 ‘명진이 여기서는 신부가 되었네’ 하더니 다시 나를 보고 또 물으시는 거야. 그런데 낙시인, 정말 결혼하면 날마다 하는 거 아니야? 정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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