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
ㆍ“낭구는 십년이 아니라 이십·삼십년을 내다보는 기라”
그는 그저 평범한 농부였다.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배워야 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글을 겨우 깨쳤다. 아내와는 열아홉에 혼인을 해서 위로 딸 하나와 밑으로 아들 둘을 두었다. 쌍계사 앞의 기름진 논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는 농부로서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밭으로 나갔고 저녁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무학이었지만 염치가 있었고 종교는 없었지만 하늘이 무서운 줄을 깨닫고 있었으며 변방의 농부였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지 않았다.
어느 날 쌍계사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조성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에게 문서 하나가 날아왔다. 그의 땅이 쌍계사주차장 터로 수용된다는 것이었다. 반발을 없게 하기 위해 쌍계사 관광지의 상가가 하나씩 주어지고 덤으로 다른 지역의 논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쌍계사 앞의 상가를 받게 되면 당장 눈앞에서 거액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될 것은 뻔했다. 갑자기 읍내 유흥가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모든 개발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이 그렇듯이 바람에도 지폐 냄새가 묻어났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면사무소에 다니는 장조카를 찾아가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조카는 여러 번 어렵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추수를 끝낸 그의 논에 불도저가 들어와 땅을 고를 무렵 그는 인근의 커다란 산의 문서를 쥐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산이라고 해봐야 후미진 곳이고 특별히 관광지가 될 만큼 경관이 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주변에 문화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도 없는 민둥산. 거저 준대도 가져가지 않을 사람이 많을 그럴 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을 설득해 논이나 상가 대신 그 산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하루 일과는 한결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히 옷을 입고 아침을 가볍게 먹은 후 산으로 간다. 그 산의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그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곳이었다. 그는 우선 그 바위 위에 양초를 켜고 계곡에서 기른 맑은 물을 한 그릇 올려놓은 후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천지신명과 하눌님과 조상님과 나무와 물과 바람과 비의 정령 그중 누구에게 기도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늘 감사하다고 했다. 지나온 모든 일과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랐다. 그가 지고 가는 지게에는 코스모스보다 가녀린 묘목들과 주먹밥 두 덩이가 실려 있었다. 그는 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었다. 나무를 심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젓가락보다 조금 큰 묘목을 심어 놓고 나면 솔직히 약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의 나무도 그럴진대 하물며 생계를 잇는 논을 주고 얻은 산에 심는 나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러웠다. 그는 그렇게 밤나무부터 시작했다. 오늘날 화개 밤이 유명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힘 닿는 데까지 날마다 나무를 심었다.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은 이제 더 노골적이 되었다. 십 년 후면 큰아이가 시집갈 나이인데 그때까지 산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일까. 시장에서 몇 푼을 주면 한 지게를 살 수 있는 장작 같은 나무들을 왜 심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돈이 싫다는 사람도 있네, 사람들은 웃었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삼남매를 불러놓고 입을 열었다. “아부지 생각에 세상은 바뀐다. 낭구라 카는 거는 십년 멀리 내다보는 기 아이라, 이십년 삼십년을 내다보는 기라. 아부지가 지난해에 밤을 심었는데 이제는 매화낭구를 심어 매실을 얻을 끼고 그 담엔 차를 심을끼라. 그라믄 차를 따겠제. 지금 마을 사람들이 아부지 낭구 심는 거 보고 뭐라 캐도 너거는 신경쓰지 말그래이. 봐라, 아부지가 매일 낭구를 심으믄 아부지가 죽기 전에 가져갈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엄다. 그러나 너거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여기서 수많은 것들을 얻을 끼고 너거들이 낳은 아그들, 그러니까 내 손주들 대에는 이 산의 나무만 가지고도 그냥 살 날이 올기다. 아비의 생각은 마 그렇다.”
그때 어렸던 그의 맏딸은 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버지이기에 그녀는 그냥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뜨며 아버지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이 비웃던 대로 그가 심어놓은 나무는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 소출도 주지 못해서 그의 집은 늘 살림이 빠듯했다. 맏딸은 워낙 인물이 좋아 그 마을의 최고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 자리는 인품과 덕망이 나무랄 데 없었으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 대해서는 매운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남편은 스무 살 되던 해부터 읍내에서 한 대 밖에 없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아이 둘만 달랑 남기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얼굴이 너무 고와 부잣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던 딸은 맏며느리는 되었지만 아내는 되어보지 못하고 시아버지의 주선으로 쌍계사 입구에 사찰음식점을 열었다. 젖먹이 둘을 업고 남자들의 밥을 시중드는 딸의 식당 앞을 터벅터벅 지나쳐 그는 산에 올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올랐다. 나무를 심고 또 심었다. 몇 년이 지나 묘목들이 좀 자라자 그는 이제 나무를 돌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나무들을 보기 전에 너른 바위에 양초를 켜놓고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데이, 우리 불쌍한 딸내미 우리 불쌍한 손주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지한테 아무것도 없심다. 그저 제가 밤톨이라도 주워줄 수 있게 좋은 날씨와 바람을 주십시오. 물 주고 수고하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물을 주고 지지대를 바로 고쳐 세우며 그렇게 매일을 산에 올랐다. 그는 심어놓은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거짓말처럼 그는 모든 나무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젓가락 같던 나무들이 회초리만해지고 회초리만한 나무들이 장대만해지면서 산은 푸르고 기름지게 변해갔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남의 일에 관계된 시간은 워낙 잘 가는 법이니. 매화가 피어나고 밤꽃이 피어나고 차나무가 자라자 그는 밤을 내다 팔고 매실즙을 내고 차를 덖었다. 아들들은 아버지 옆에서 그를 도와 이 모든 것을 배웠다.
그의 삼남매는 모두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큰딸은 사찰음식 식당을, 맏아들은 그 산 자락에 산장을 열었고, 셋째아들은 차를 덖는 다원을 차렸다. 87세를 풀쩍 넘은 요즘도 그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으로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무들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넨다. 이제 나무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열매들을 쏟아내어 그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다. 그가 옳았다. 이제 그의 산에서 나오는 소출은 금액만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직접 본 일이 없었다. 쌍계사 입구의 식당에 앉아 있으면 고운 꽃모자를 쓴 여주인이 웃으며 식당 입구에서 작은 바구니를 들고 오곤 했다. “뭐예요?” 내가 물으면 여주인은 웃으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종업원들이 아버지를 우렁할아버지라고 해. 우렁각시가 아니라 우렁할아버지.”
그녀가 들고 선 바구니에는 아기의 머리통처럼 동그랗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연초록 애호박 한 개, 밤 한 주먹 그리고 사탕이 한 줌 들어 있었다. 여주인이 그 옆에서 꺼내든 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누구 누나 갇다 조라” 아마도 함께 사는 아들에게 시킨 모양이었다.
그의 맏딸인 여주인의 눈에는 어느덧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궁금해하자 그녀는 내친 김에 그동안 모아놓은 아버지의 쪽지들을 가지고 나왔다. “정란니 세비돈 조라.” “불국사에서 사온기다. 달여무그면 조타.” “사소한 것 신경쓰지 말고 너거들 자유롭게 살아라. 내는 밥먹고 국 데워 먹으믄 된다.” “바람 차다 목에 수건 둘러라.”
그 쪽지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 식당 여주인이 그리 험한 세월을 바르게 살아온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경상도의 사내, 애정 표현이 서툰 문화에서 평생을 산, 90이 가까운 그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돋보기를 끼고 연필로 또박또박 “갇다 조라”라고 쓰는 모습이 내게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오래된 고목보다 더 크고 무성한, 참으로 위대한 모습이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그는 그저 평범한 농부였다.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지만 어릴 적부터 배워야 한다는 어머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글을 겨우 깨쳤다. 아내와는 열아홉에 혼인을 해서 위로 딸 하나와 밑으로 아들 둘을 두었다. 쌍계사 앞의 기름진 논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그리고 아버지가 그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그는 농부로서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밭으로 나갔고 저녁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무학이었지만 염치가 있었고 종교는 없었지만 하늘이 무서운 줄을 깨닫고 있었으며 변방의 농부였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평생 산을 가꿨다. 처음엔 나무도 없는 민둥산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젓가락만한 나무가 회초리만해지고 회초리만한 나무가 장대만해지면서 산은 푸르고 기름지게 변해갔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어느 날 쌍계사 일대가 국립공원으로 조성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그에게 문서 하나가 날아왔다. 그의 땅이 쌍계사주차장 터로 수용된다는 것이었다. 반발을 없게 하기 위해 쌍계사 관광지의 상가가 하나씩 주어지고 덤으로 다른 지역의 논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쌍계사 앞의 상가를 받게 되면 당장 눈앞에서 거액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될 것은 뻔했다. 갑자기 읍내 유흥가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모든 개발이라는 이름이 붙은 지역이 그렇듯이 바람에도 지폐 냄새가 묻어났다.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면사무소에 다니는 장조카를 찾아가 긴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조카는 여러 번 어렵다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고집은 꺾이지 않았다. 추수를 끝낸 그의 논에 불도저가 들어와 땅을 고를 무렵 그는 인근의 커다란 산의 문서를 쥐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산이라고 해봐야 후미진 곳이고 특별히 관광지가 될 만큼 경관이 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주변에 문화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나무도 없는 민둥산. 거저 준대도 가져가지 않을 사람이 많을 그럴 산이었다. 그러나 그는 관을 설득해 논이나 상가 대신 그 산을 얻어낸 것이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하루 일과는 한결같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단정히 옷을 입고 아침을 가볍게 먹은 후 산으로 간다. 그 산의 입구에는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곳이 그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곳이었다. 그는 우선 그 바위 위에 양초를 켜고 계곡에서 기른 맑은 물을 한 그릇 올려놓은 후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천지신명과 하눌님과 조상님과 나무와 물과 바람과 비의 정령 그중 누구에게 기도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는 늘 감사하다고 했다. 지나온 모든 일과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올랐다. 그가 지고 가는 지게에는 코스모스보다 가녀린 묘목들과 주먹밥 두 덩이가 실려 있었다. 그는 나무를 심기로 한 것이었다. 나무를 심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젓가락보다 조금 큰 묘목을 심어 놓고 나면 솔직히 약간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원의 나무도 그럴진대 하물며 생계를 잇는 논을 주고 얻은 산에 심는 나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집스러웠다. 그는 그렇게 밤나무부터 시작했다. 오늘날 화개 밤이 유명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힘 닿는 데까지 날마다 나무를 심었다. 동네 사람들의 비웃음은 이제 더 노골적이 되었다. 십 년 후면 큰아이가 시집갈 나이인데 그때까지 산이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일까. 시장에서 몇 푼을 주면 한 지게를 살 수 있는 장작 같은 나무들을 왜 심는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돈이 싫다는 사람도 있네, 사람들은 웃었다.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삼남매를 불러놓고 입을 열었다. “아부지 생각에 세상은 바뀐다. 낭구라 카는 거는 십년 멀리 내다보는 기 아이라, 이십년 삼십년을 내다보는 기라. 아부지가 지난해에 밤을 심었는데 이제는 매화낭구를 심어 매실을 얻을 끼고 그 담엔 차를 심을끼라. 그라믄 차를 따겠제. 지금 마을 사람들이 아부지 낭구 심는 거 보고 뭐라 캐도 너거는 신경쓰지 말그래이. 봐라, 아부지가 매일 낭구를 심으믄 아부지가 죽기 전에 가져갈 것은 실은 아무것도 엄다. 그러나 너거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여기서 수많은 것들을 얻을 끼고 너거들이 낳은 아그들, 그러니까 내 손주들 대에는 이 산의 나무만 가지고도 그냥 살 날이 올기다. 아비의 생각은 마 그렇다.”
아흔 가까운 아버지는 지금도 자식들에게 쪽지를 쓴다. 서툴지만 곡진한 사랑의 표현이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때 어렸던 그의 맏딸은 아버지의 말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작은 일도 허투루 하지 않는 아버지이기에 그녀는 그냥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뜨며 아버지를 믿었다. 마을 사람들이 비웃던 대로 그가 심어놓은 나무는 10년이 다 되어가도록 아무 소출도 주지 못해서 그의 집은 늘 살림이 빠듯했다. 맏딸은 워낙 인물이 좋아 그 마을의 최고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시아버지 자리는 인품과 덕망이 나무랄 데 없었으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에 대해서는 매운 교육을 시키지 못했다. 남편은 스무 살 되던 해부터 읍내에서 한 대 밖에 없는 스포츠카를 몰고 다녔다. 그리고 아이 둘만 달랑 남기고 마을을 떠나버렸다. 얼굴이 너무 고와 부잣집 맏며느리가 될 거라던 딸은 맏며느리는 되었지만 아내는 되어보지 못하고 시아버지의 주선으로 쌍계사 입구에 사찰음식점을 열었다. 젖먹이 둘을 업고 남자들의 밥을 시중드는 딸의 식당 앞을 터벅터벅 지나쳐 그는 산에 올랐다. 하루도 빠짐없이 올랐다. 나무를 심고 또 심었다. 몇 년이 지나 묘목들이 좀 자라자 그는 이제 나무를 돌보기 위해 산에 올랐다. 나무들을 보기 전에 너른 바위에 양초를 켜놓고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잘 자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데이, 우리 불쌍한 딸내미 우리 불쌍한 손주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지한테 아무것도 없심다. 그저 제가 밤톨이라도 주워줄 수 있게 좋은 날씨와 바람을 주십시오. 물 주고 수고하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그는 물을 주고 지지대를 바로 고쳐 세우며 그렇게 매일을 산에 올랐다. 그는 심어놓은 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거짓말처럼 그는 모든 나무들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젓가락 같던 나무들이 회초리만해지고 회초리만한 나무들이 장대만해지면서 산은 푸르고 기름지게 변해갔다.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놀라운 일이었다. 남의 일에 관계된 시간은 워낙 잘 가는 법이니. 매화가 피어나고 밤꽃이 피어나고 차나무가 자라자 그는 밤을 내다 팔고 매실즙을 내고 차를 덖었다. 아들들은 아버지 옆에서 그를 도와 이 모든 것을 배웠다.
그의 삼남매는 모두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큰딸은 사찰음식 식당을, 맏아들은 그 산 자락에 산장을 열었고, 셋째아들은 차를 덖는 다원을 차렸다. 87세를 풀쩍 넘은 요즘도 그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산으로 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무들 하나하나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넨다. 이제 나무들은 매년 엄청난 양의 열매들을 쏟아내어 그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주었다. 그가 옳았다. 이제 그의 산에서 나오는 소출은 금액만도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나는 그를 직접 본 일이 없었다. 쌍계사 입구의 식당에 앉아 있으면 고운 꽃모자를 쓴 여주인이 웃으며 식당 입구에서 작은 바구니를 들고 오곤 했다. “뭐예요?” 내가 물으면 여주인은 웃으며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종업원들이 아버지를 우렁할아버지라고 해. 우렁각시가 아니라 우렁할아버지.”
그녀가 들고 선 바구니에는 아기의 머리통처럼 동그랗고 반짝반짝 윤이 나는 연초록 애호박 한 개, 밤 한 주먹 그리고 사탕이 한 줌 들어 있었다. 여주인이 그 옆에서 꺼내든 쪽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누구 누나 갇다 조라” 아마도 함께 사는 아들에게 시킨 모양이었다.
그의 맏딸인 여주인의 눈에는 어느덧 물기가 어리고 있었다. 내가 그를 궁금해하자 그녀는 내친 김에 그동안 모아놓은 아버지의 쪽지들을 가지고 나왔다. “정란니 세비돈 조라.” “불국사에서 사온기다. 달여무그면 조타.” “사소한 것 신경쓰지 말고 너거들 자유롭게 살아라. 내는 밥먹고 국 데워 먹으믄 된다.” “바람 차다 목에 수건 둘러라.”
그 쪽지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 식당 여주인이 그리 험한 세월을 바르게 살아온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것 같았다. 경상도의 사내, 애정 표현이 서툰 문화에서 평생을 산, 90이 가까운 그가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돋보기를 끼고 연필로 또박또박 “갇다 조라”라고 쓰는 모습이 내게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것은 오래된 고목보다 더 크고 무성한, 참으로 위대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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