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소설가ㅣ경향신문
ㆍ콧대 높은 여주인 눈은 ‘강남좌파’를 보더니 핑크빛으로
나는 사찰을 찾기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쌍계사는 내가 좋아하는 절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봄이면 벚꽃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여름이면 최치원이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을 지나 흐르는 맑고 푸른 물줄기 하며, 가을의 고적함, 그리고 겨울이면 벽소령이 북풍을 막는 그 남향 계곡의 따스함까지. 그 쌍계사 입구에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는데 오늘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집이 그중 하나이다(사실 이곳에 연재를 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바람에, 웃자고 좋자고 쓰는 글이 본의 아니게 괴로움으로 변하게 되어 내가 이 연재를 중단할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 식당도 눈 밝고 머리 좋은 사람은 알아서 찾아가시기를).
이 식당은 참 아름답다. 정원이 널찍하고 방들이 오붓한 것은 물론 주인이 아름답기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정원 한가운데 70년쯤 된 매화나무가 봄의 전령처럼 손님들을 맞이하고 정원에는 주인이 가꾸는 갖가지 꽃과 먹거리들이 피어나고 자란다(지난번 삼십대 후배를 데리고 가면서 주인이 아름답다고 했더니 좋다고 따라왔던 그 후배 왈, 에잇 오십대잖아요 한다. 오십대 여자는 아름다우면 안되나?). 여주인은 혼자서 아이들 둘을 키우며 시아버지가 물려준 그 식당을 벌써 30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절집의 식단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집의 음식은 오신채를 쓰지 않음은 물론인데 들깨 국물이 너무도 고소한 사찰국수며 표고가 고기처럼 씹히는 표고전, 갓 짜낸 참기름과 들기름에 무쳐낸 갖은 나물들만으로 상은 너무나 푸짐하다. 맵고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화개에 가면 꼭 이 집에 들른다. 지난번 한 선배를 모시고 갔던 날은 이 집 주인이 갓 딴 생당귀 생참나물잎 생곰취 등을 한 바구니 내놓았는데, 그날 입맛 까다로운 그 선배는 자신의 평생 다섯번째 손 안에 드는 밥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집 여주인은 둥근 이마와 커다란 눈 그리고 오똑한 코를 지녀 한 눈에도 평생 독신으로 살기가 힘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솜씨 좋은 사람이 얼굴까지 예쁘면 성질이 좀 더러워지게 마련인데 나는 이렇게 예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을 좋아한다. 대개 이런 사람은 계산 정확하고 남에게 신세 안 지고 그리고 음식 재료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집 주인이 직접 담근 동동주는 지난번 내가 쓴, 딸 찾으러 왔다가 계곡 물 보고 먼저 옷을 훌렁훌렁 벗고 뛰어든 장모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손녀 봐주러 딸네 집에 오면 꼭 저녁에 딸 부부에게 전화 걸어 “거, 애는 잘 자는데 내 목이 좀 칼칼하다” 할 때 한 동이씩 사가지고 가야 하는 효도품이며 양육 필수품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번 서시천변 여관 사건의 주인공들과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후 이 집에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 마침 그날이 우리나라가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일본과 결승전을 하는 날이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버들치 시인 낙장불입 시인과 누이처럼 지내는 안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 안채에서 TV를 켜놓고 우리나라를 응원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일본에 아쉽게도 지고 말았다. 서울에 운전을 하고 가야 할 친구까지 분하다며 모두 술을 마셔버린 우리는 내일 걱정은 내일 맡기라는 예수의 말을 새삼 따르기로 하며 저녁식사까지 모두 그 집에서 해결하기로 한 다음 여주인을 불렀다. 30년을 홀로 자식들 둘 키우며 살아온 자신의 수도처인 방에 들어온 여주인은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고 술 냄새가 진동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일본에 졌다며 탁자를 쾅쾅 쳐서 담뱃재를 여기저기 떨어뜨리고 술을 여기저기 엎지르고 방자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몹시 분노하며 그 더러운 성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장 나가!!!장사고 뭐고 필요 없어!!!”
우리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담뱃재를 닦고 술잔을 똑바로 세우며 담배 피우는 친구들에게 “그러게, 내가 너 담배 좀 끊으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말했지” 하면서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했으나 여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술에 취한 채로 그 집을 쫓겨나와 하는 수 없이 살살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의 기억이 하도 불쾌하여 그 집에 가지 않으려고 결심했으나 이상하게 나쁜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는 나는 그해 여름 ‘강남좌파’ 형과 다시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날 주방에서 나오던 여주인은 강남좌파 형을 보더니 그만 눈이 핑크빛으로 변해버렸다. 강남좌파 형이 입만 열지 않으면 좌파스럽지 않고 그냥 강남스러워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았지만 저 성질 더럽고 콧대 높은 여주인을 매료시킬 줄을 아무도 몰랐던 우리는 이 심상치 않은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평소에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우리를 쫓아내던 여주인은 우리를 정원의 가장 시원하고 경치 좋은 자리에 앉히더니 자기 방으로 가서 머리에 예쁜 손뜨개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흠, 거기엔 꽃이 한 송이 달려 있었다). 그러더니 일하는 아이를 불렀다. “얘, 옥잠화가 피었느냐? 피었으면 꽃을 좀 따서 전을 부쳐오너라.”
애들 말로 ‘뭥미적’ 사태였다. 내가 그때 지금과 같은 센스가 있었다면 옥잠화전 인증샷을 찍어놓았을 것을, 못내 아쉽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집에서 귀빈 대우를 받았음은 물론 옥잠화전이라는, 아! 그 맛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하나, 들기름이 촉촉이 젖은 부드러운 밀가루 껍질 속에 꽃향기 진한 솜사탕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옥잠화전이라는 음식인지 예술인지를 먹게 되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제부터 누구와 지리산에 가는 게 유리한지 답이 나온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강남좌파 형의 자동차와 운전 솜씨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칭찬하고 평소에 그 형이 주식으로 삼는 족발과 쥐포를 부지런히 공급하며 지리산에 자주 모시고 다니게 되었다. 그때마다 여주인은 색색가지 다른 모자를 쓰고 나와(거기에는 꼭 다른 꽃이 달려 있다, 흠) 우리를 맞았고 처음 먹어보는 온갖 음식을 내놓았다. 한 번은 그 여주인의 오빠가 경영하는 황토방에서 흑염소를 한 마리 잡아달라 하고 우리가 거기 머무는데, 장사를 마친 여주인은 강남좌파 형이 왔다는 말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와서 노래까지 불렀다. 그 고운 자태, 그 고운 목소리, 그 수줍은 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그녀가 부른 노래는 ‘녹수의 꿈’이었다. 그 마지막 가사가 녹수는 서글퍼라, 였던가.
지난 봄 우리는 다시 그 식당에 들르게 되었다. 이제는 오십이 넘은 여주인은 오랜 정숙의 세월 끝에 흰 머리도 난 지금 이제 그 정도의 유희는 즐겨도 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한결 여유있어져서, 예전처럼 강남좌파 형을 보면 얼굴이 확 붉어지지는 않았고 대신 반찬 수도 약간 줄었다. 그날 우리는 최도사 형을 데리고 그 집에 가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내가 나물이 정말 맛있다고 칭찬을 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솔직히 여기 쌍계사 입구 음식점에서도 다 중국산 나물을 쓴다. 국산 구하기도 힘들고, 나는 여기 아주머니들에게 직접 부탁하고 내가 키워서 나물을 쓰는데 정말 양심 없는 사람 많아. 솔직히 그렇게 국산 쓰면 값도 비싸야 하니 남는 것도 별로 없고….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게는 못하는 거지. 참 그래서 겨우 손해만 안 보고 하는 거야 이 장사.”
여주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었다. 여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문득 최도사를 보게 되었다. 최도사의 눈이 강남좌파 형을 처음 보던 여주인의 눈같이 변하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그의 마른 뺨에 산복숭아빛 홍조까지!! 소설가라는 직업병으로 사람 기색 살피는 데는 귀신 같은 재주가 있는 내가 그걸 놓칠 리가 있는가.
“얼레꼴레리, 도사 형 왜 그래?” 내가 물었으나 도사는 이제 귀도 들리지 않는지 여주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난 이런 데서 장사하는 사람들 다 도둑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도 있었네요. 그런데 손해 보시면 어떻게 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 돈 많아요.”
돈이 많다는 최도사의 말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나처럼 눈치 챈 낙시인이 나섰다. “음 그게 저 말이지…, 일년에 이 형 연봉이 이백이야.” 낙시인은 사실을 말한 것인데 그만 좌중이 모두 민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주인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정말 돈 많으시네요. 우리 같은 사람은 수입은 많지만 이것저것 지불하고 나면 늘 마이너스인데 만일 일년에 이백이 남는다면 그거 부자 맞네요.”
그러자 기쁨에 넘친 최도사가 복숭아빛으로 물든 뺨이 찢어지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자장면은 매일 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매일 오겠습니다.”
아아 정은 늙을 줄도 몰라라. 계곡의 푸른 물줄기 소리처럼.
ⓒ 경향신문 & 경향닷컴나는 사찰을 찾기를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쌍계사는 내가 좋아하는 절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봄이면 벚꽃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여름이면 최치원이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洗耳岩)을 지나 흐르는 맑고 푸른 물줄기 하며, 가을의 고적함, 그리고 겨울이면 벽소령이 북풍을 막는 그 남향 계곡의 따스함까지. 그 쌍계사 입구에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는데 오늘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집이 그중 하나이다(사실 이곳에 연재를 하는 동안 여러 사람이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바람에, 웃자고 좋자고 쓰는 글이 본의 아니게 괴로움으로 변하게 되어 내가 이 연재를 중단할까 하는 심각한 고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 식당도 눈 밝고 머리 좋은 사람은 알아서 찾아가시기를).
지리산 계곡에는 이미 초여름이 찾아들었다. 흐드러진 철쭉도 이제는 곧 자취를 감출 것이다. 젊은 날의 순수와 열정이 그러하듯이. 이원규 시인 촬영
그 집 여주인은 둥근 이마와 커다란 눈 그리고 오똑한 코를 지녀 한 눈에도 평생 독신으로 살기가 힘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솜씨 좋은 사람이 얼굴까지 예쁘면 성질이 좀 더러워지게 마련인데 나는 이렇게 예쁘고 성질 더러운 사람을 좋아한다. 대개 이런 사람은 계산 정확하고 남에게 신세 안 지고 그리고 음식 재료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집 주인이 직접 담근 동동주는 지난번 내가 쓴, 딸 찾으러 왔다가 계곡 물 보고 먼저 옷을 훌렁훌렁 벗고 뛰어든 장모가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 손녀 봐주러 딸네 집에 오면 꼭 저녁에 딸 부부에게 전화 걸어 “거, 애는 잘 자는데 내 목이 좀 칼칼하다” 할 때 한 동이씩 사가지고 가야 하는 효도품이며 양육 필수품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번 서시천변 여관 사건의 주인공들과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한 후 이 집에 점심을 먹으러 들렀다. 마침 그날이 우리나라가 세계야구선수권 대회에서 일본과 결승전을 하는 날이었다. 점심을 먹은 우리는 버들치 시인 낙장불입 시인과 누이처럼 지내는 안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 안채에서 TV를 켜놓고 우리나라를 응원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며 동동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일본에 아쉽게도 지고 말았다. 서울에 운전을 하고 가야 할 친구까지 분하다며 모두 술을 마셔버린 우리는 내일 걱정은 내일 맡기라는 예수의 말을 새삼 따르기로 하며 저녁식사까지 모두 그 집에서 해결하기로 한 다음 여주인을 불렀다. 30년을 홀로 자식들 둘 키우며 살아온 자신의 수도처인 방에 들어온 여주인은 담배 연기가 가득 차 있고 술 냄새가 진동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일본에 졌다며 탁자를 쾅쾅 쳐서 담뱃재를 여기저기 떨어뜨리고 술을 여기저기 엎지르고 방자한 자세로 엎어져 있는 나와 내 친구들에게 몹시 분노하며 그 더러운 성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당장 나가!!!장사고 뭐고 필요 없어!!!”
우리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담뱃재를 닦고 술잔을 똑바로 세우며 담배 피우는 친구들에게 “그러게, 내가 너 담배 좀 끊으라고 고등학교 때부터 말했지” 하면서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했으나 여주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술에 취한 채로 그 집을 쫓겨나와 하는 수 없이 살살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그날의 기억이 하도 불쾌하여 그 집에 가지 않으려고 결심했으나 이상하게 나쁜 기억은 금방 잊어버리는 나는 그해 여름 ‘강남좌파’ 형과 다시 그곳에 가게 되었다. 그날 주방에서 나오던 여주인은 강남좌파 형을 보더니 그만 눈이 핑크빛으로 변해버렸다. 강남좌파 형이 입만 열지 않으면 좌파스럽지 않고 그냥 강남스러워서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 알았지만 저 성질 더럽고 콧대 높은 여주인을 매료시킬 줄을 아무도 몰랐던 우리는 이 심상치 않은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평소에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바로 우리를 쫓아내던 여주인은 우리를 정원의 가장 시원하고 경치 좋은 자리에 앉히더니 자기 방으로 가서 머리에 예쁜 손뜨개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나왔다(흠, 거기엔 꽃이 한 송이 달려 있었다). 그러더니 일하는 아이를 불렀다. “얘, 옥잠화가 피었느냐? 피었으면 꽃을 좀 따서 전을 부쳐오너라.”
애들 말로 ‘뭥미적’ 사태였다. 내가 그때 지금과 같은 센스가 있었다면 옥잠화전 인증샷을 찍어놓았을 것을, 못내 아쉽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 집에서 귀빈 대우를 받았음은 물론 옥잠화전이라는, 아! 그 맛을 무엇이라 표현해야 하나, 들기름이 촉촉이 젖은 부드러운 밀가루 껍질 속에 꽃향기 진한 솜사탕이 들어 있는 것 같은 옥잠화전이라는 음식인지 예술인지를 먹게 되었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제부터 누구와 지리산에 가는 게 유리한지 답이 나온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강남좌파 형의 자동차와 운전 솜씨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칭찬하고 평소에 그 형이 주식으로 삼는 족발과 쥐포를 부지런히 공급하며 지리산에 자주 모시고 다니게 되었다. 그때마다 여주인은 색색가지 다른 모자를 쓰고 나와(거기에는 꼭 다른 꽃이 달려 있다, 흠) 우리를 맞았고 처음 먹어보는 온갖 음식을 내놓았다. 한 번은 그 여주인의 오빠가 경영하는 황토방에서 흑염소를 한 마리 잡아달라 하고 우리가 거기 머무는데, 장사를 마친 여주인은 강남좌파 형이 왔다는 말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와서 노래까지 불렀다. 그 고운 자태, 그 고운 목소리, 그 수줍은 볼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때 그녀가 부른 노래는 ‘녹수의 꿈’이었다. 그 마지막 가사가 녹수는 서글퍼라, 였던가.
쌍계사 입구, 아름다운 여주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에는 ‘할 일이 많아 참 좋다’는 현판이 걸려 있다. 여주인의 인고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하다.
지난 봄 우리는 다시 그 식당에 들르게 되었다. 이제는 오십이 넘은 여주인은 오랜 정숙의 세월 끝에 흰 머리도 난 지금 이제 그 정도의 유희는 즐겨도 된다고 스스로 생각했는지 한결 여유있어져서, 예전처럼 강남좌파 형을 보면 얼굴이 확 붉어지지는 않았고 대신 반찬 수도 약간 줄었다. 그날 우리는 최도사 형을 데리고 그 집에 가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내가 나물이 정말 맛있다고 칭찬을 하자 그녀가 대답했다.
“솔직히 여기 쌍계사 입구 음식점에서도 다 중국산 나물을 쓴다. 국산 구하기도 힘들고, 나는 여기 아주머니들에게 직접 부탁하고 내가 키워서 나물을 쓰는데 정말 양심 없는 사람 많아. 솔직히 그렇게 국산 쓰면 값도 비싸야 하니 남는 것도 별로 없고….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게는 못하는 거지. 참 그래서 겨우 손해만 안 보고 하는 거야 이 장사.”
여주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털어놓고 있었다. 여주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문득 최도사를 보게 되었다. 최도사의 눈이 강남좌파 형을 처음 보던 여주인의 눈같이 변하고 있었다. 거무스름한 그의 마른 뺨에 산복숭아빛 홍조까지!! 소설가라는 직업병으로 사람 기색 살피는 데는 귀신 같은 재주가 있는 내가 그걸 놓칠 리가 있는가.
“얼레꼴레리, 도사 형 왜 그래?” 내가 물었으나 도사는 이제 귀도 들리지 않는지 여주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난 이런 데서 장사하는 사람들 다 도둑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사람도 있었네요. 그런데 손해 보시면 어떻게 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전 돈 많아요.”
돈이 많다는 최도사의 말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나처럼 눈치 챈 낙시인이 나섰다. “음 그게 저 말이지…, 일년에 이 형 연봉이 이백이야.” 낙시인은 사실을 말한 것인데 그만 좌중이 모두 민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여주인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요? 정말 돈 많으시네요. 우리 같은 사람은 수입은 많지만 이것저것 지불하고 나면 늘 마이너스인데 만일 일년에 이백이 남는다면 그거 부자 맞네요.”
그러자 기쁨에 넘친 최도사가 복숭아빛으로 물든 뺨이 찢어지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요,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자장면은 매일 사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매일 오겠습니다.”
아아 정은 늙을 줄도 몰라라. 계곡의 푸른 물줄기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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