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사랑? 그거 열다섯 살 때 다 알았던 거 아냐”
봄날이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봄날이야” 전화를 했더니 낙장불입 시인은 언제나처럼 흔쾌히 “그럼 내려와!” 하는 것이었다. 마침 철쭉을 보러 산행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급한 마감만 챙겨두고 나는 쏜살같이 지리산으로 갔다. 심해어족(深海魚族) 출신으로 걸어서 400m 고지 이상 올라가면 바로 고산병이 도지는 사람인 내가 울상을 지었더니 너그러운 낙장불입 시인이 말했다.
“괜찮아. 형제봉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서 차로 올라갔다가 철쭉 군락지를 따라 살살 내려오면 하나도 힘들지 않아. 너는 특이하게도 차타고 올라가면 고산병이 전혀 없잖아.”
세상에, 이렇게나 쉬운 산행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휘파람까지 불며 따라나섰다. 차로 임도를 따라 산 정산 부근까지 올라가자 산봉우리까지 꽃피게 할 것처럼 따스한 봄이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L선배였다.
L선배는 낙장불입 시인과 나 그리고 버들치 시인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인가 사업에 실패하고 부인과 이혼한 그가 섬진강변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그를 보러 갔었다. 칼 융이 말하기를 사람은 중년기가 되면 새로운 후반생을 시작하기도 한다더니 평소에 흰 와이셔츠에 금테 안경 그리고 깔끔한 감색 슈트를 즐겨 입던 그는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던 그가 두 칸짜리 폐가에서 불을 때며 우리에게 내놓았던 소주와 라면은 얼마나 어색하고 또 자유로웠던지. 그는 증권사 빌딩에서 점심시간이면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고만고만한 도시인이 아니라 고유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고 낼 모레 오십이 될 사람이 저래도 되나 싶어서 얼마간 걱정스러운 나를 의식해서 그가 말을 꺼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내가 잘 나갈 때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제주에 갔다가 우도라는 섬에 간 적이 있었어. 배에서 내리는데 선착장에 아주 작은 간이 커피숍이 있겠지. 들여다보니 반평도 안 되는 가게에 커피머신 한 대 갖다 놓고 내 또래 되는 남자 둘이 커피를 팔고 있더라구. 낡은 청바지에 구겨진 티셔츠 입고 있던 그 두 사람이 석양의 부둣가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아직도 기억이 나……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 나로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더욱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거기서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글을 쓰러 잠시 지리산 자락에 내려와 있던 방송작가였다. 우연히 낙장불입 시인의 집에서 만난 그들은 그토록이나 늦게, 그리고 손 쓸 수 없이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한 대씩 사서 섬진강가에 은어 천렵도 다니고 밥과 된장만 담은 도시락을 싸서 산으로 다니며 곰취를 뜯어 점심을 먹고 온다는 말을 했다. 손을 꼭 잡고 나를 배웅하는 그들을 보면서 참 어울리고 어여쁘다 느껴졌지만 나는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선배의 전 부인을 생각했고 마음이 그리 편안치는 않았다.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예전에는 자신의 아내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은 수경스님과 문규현 정종훈 신부님이 “사랑 생명 평화”를 위해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오체투지를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버들치 시인과 낙시인은 모두 거기에 참여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다.
“은니 큰일 났어. L선배가 보이질 않아. 며칠 전부터 입만 열면 죽고 싶다고 하더니 오늘 섬진강가에서 없어졌대. 여기 사람들 풀어서 찾고 있는데 으쩌지?”
고아르피엠 여사의 심각한 전화를 받고 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부인하고 이혼이 된 줄 알았는데 합의만 끝나고 절차는 아직 남아 있었대. 부인이 그 집에 와서 때려 부수고 난리가 났나봐. 어쨌든 법적으로는 아직은 부부니까. 그래서 그 방송작가가 떠나버렸는데 그 이후로 L선배는 입을 꼭 다물고 술만 마셔. 그러다가 가끔 입을 열면 그 여자 이름만 불러. 실성한 사람 같아.”
사람이란 건 참 이상한 것이어서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죽으면 어떻게 하지, 안 돼 살아야 해, 하고 마음속으로 온갖 기도를 하고 내려갔는데 막상 자기 집에서 누워 사람들의 간호를 받고 있는 그를 보자 미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입술이 다 터지고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얼굴을 보자 정말 “사랑이란 게 뭘까?”하는 유명한 화두가 머릿속을 웅웅거렸다. 그 후로도 며칠에 한 번씩 고아르피엠 여사나 버들치 시인이나 낙시인은 내게 전화를 걸어 오늘 섬진강에 빠진 그를 건져냈다고도 하고 며칠 동안 먹지 않고 쓰러진 그를 데려다 억지로 병원에 입원시켰다는 소식을 들려줬다. 낮에는 땡볕 내리쬐는 순례단에 참여하고 밤에는 차를 몰아 동네 어귀로 와서 L선배를 찾아다니는 낙시인과 버시인을 생각하자 나는 속이 많이 상했다.
“그냥 내버려 둬. 죽으면 자기 팔자지. 수경스님, 문신부님 저렇게 무릎 아프고 힘드신데 무슨 사랑타령이야. 이 나이에.”
내가 화를 내자 버시인이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우리가 어렸던 1980년대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수경스님이 삼보일배하는 것도 L선배가 섬진강가에서 헤매는 것도 다 사랑이야. 네가 보기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버시인이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자 괜히 내가 슬퍼졌다. 그의 입술도 낙장시인의 입술도 모두 L선배의 그것처럼 부어올랐고 여기저기 터져 있었다. 이러다가 수경스님이나 L선배보다 버시인이나 낙시인이 먼저 죽지 싶었다.
L선배의 부인은 이혼만은 못해주겠다고 하고 L선배는 낮이면 막노동을 해서 어쨌든 아이들 학비는 집에 부치고 밤이면 술을 마시고 죽고 싶어 하는, 그렇게 모진 봄날이 다 가고 있었다. 여름도 이울 무렵이었던가 여자를 찾아 전국을 헤매던 선배가 신변을 정리하러 다시 지리산 자락에 나타났다고 했다. L선배가 술에 취해 몇 번 몸을 던졌던 섬진강가 모래톱에서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L선배는 이제 담담한 얼굴이었다.
“속초에서 만났어. 아직도 그녀는 내가 이혼남이라고 자기를 속였다고 믿는 거 같았어. 놓아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하고 헤어졌어….”
그리고나서는 비장한 어투로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말야,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알아?” 진정한 사랑을 잘 몰라(?) 아픔을 겪었다고 믿고 있던 나는 귀를 쫑긋했다. 그 처절한 아픔을 겪은 선배가 이제 큰 가르침을 주는구나.
L선배가 입을 열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거야.”
선배가 더 무슨 말을 할까 나는 열심히 기다리는데 낙시인이 낮게 말했다. “우리까지 죽을동 살동 고생시키고 저런 말을 하다니. 그건 우리가 열다섯살 때 다 알았던 거 아니냐?” 우리는 그때는 크게 웃지도 못했다.
L선배는 여전히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혼자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는 걸었다. 좋은 산행이었다. 실내에서 하는 운동과 달리 산행이 몸에 좋은 까닭은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근육을 쓸 수밖에 없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있다고 했던가. 산이 예찬 받는 이유 또한 그 불가해성이 삶과 닮아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철쭉 군락지에 도착했는데 맙소사, 꽃이 없었다. 분명 예년보다 꽃이 늦은 것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월 중순에도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철쭉은 꽃은커녕 얼어붙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었나 보다. 산의 한 사면 가득 핀 꽃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이제 하산을 해야 했다. 평생 쓰지 않던 근육을 쓰느라 다리는 아프고 근육은 풀어져 다리는 문어 다리처럼 흐물거리며 꼬이는데 멀리서 파도치듯 이리로 다가서는 산들은 생명으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기 양의 배에서 새로 돋는 것처럼 보드랍게 초록빛 털들이 몽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의 고갱이 속을 걸어가며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이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우리가 중학교 때 다 배웠고 L선배마저 이 지리산 자락에서 늦은 사춘기를 마쳤으니까 말이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봄날이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봄날이야” 전화를 했더니 낙장불입 시인은 언제나처럼 흔쾌히 “그럼 내려와!” 하는 것이었다. 마침 철쭉을 보러 산행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급한 마감만 챙겨두고 나는 쏜살같이 지리산으로 갔다. 심해어족(深海魚族) 출신으로 걸어서 400m 고지 이상 올라가면 바로 고산병이 도지는 사람인 내가 울상을 지었더니 너그러운 낙장불입 시인이 말했다.
철쭉을 보러 지리산에 올랐지만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철쭉은 아직 피지 않았다. 다만 활짝 핀 철쭉꽃을 상상하며 새잎이 돋아난 산길을 걸었을 뿐이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괜찮아. 형제봉 옆으로 난 임도를 따라서 차로 올라갔다가 철쭉 군락지를 따라 살살 내려오면 하나도 힘들지 않아. 너는 특이하게도 차타고 올라가면 고산병이 전혀 없잖아.”
세상에, 이렇게나 쉬운 산행이 또 있을까 싶어 나는 휘파람까지 불며 따라나섰다. 차로 임도를 따라 산 정산 부근까지 올라가자 산봉우리까지 꽃피게 할 것처럼 따스한 봄이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L선배였다.
L선배는 낙장불입 시인과 나 그리고 버들치 시인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인가 사업에 실패하고 부인과 이혼한 그가 섬진강변에 기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그를 보러 갔었다. 칼 융이 말하기를 사람은 중년기가 되면 새로운 후반생을 시작하기도 한다더니 평소에 흰 와이셔츠에 금테 안경 그리고 깔끔한 감색 슈트를 즐겨 입던 그는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있었다. 강남의 아파트에서 살던 그가 두 칸짜리 폐가에서 불을 때며 우리에게 내놓았던 소주와 라면은 얼마나 어색하고 또 자유로웠던지. 그는 증권사 빌딩에서 점심시간이면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고만고만한 도시인이 아니라 고유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였다는 것이고 낼 모레 오십이 될 사람이 저래도 되나 싶어서 얼마간 걱정스러운 나를 의식해서 그가 말을 꺼냈다.
“참 이상한 일이야. 내가 잘 나갈 때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제주에 갔다가 우도라는 섬에 간 적이 있었어. 배에서 내리는데 선착장에 아주 작은 간이 커피숍이 있겠지. 들여다보니 반평도 안 되는 가게에 커피머신 한 대 갖다 놓고 내 또래 되는 남자 둘이 커피를 팔고 있더라구. 낡은 청바지에 구겨진 티셔츠 입고 있던 그 두 사람이 석양의 부둣가에 앉아 있는데 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아직도 기억이 나…… 나는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글쎄 나로서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더욱 나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가 거기서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글을 쓰러 잠시 지리산 자락에 내려와 있던 방송작가였다. 우연히 낙장불입 시인의 집에서 만난 그들은 그토록이나 늦게, 그리고 손 쓸 수 없이 사랑에 빠져 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한 대씩 사서 섬진강가에 은어 천렵도 다니고 밥과 된장만 담은 도시락을 싸서 산으로 다니며 곰취를 뜯어 점심을 먹고 온다는 말을 했다. 손을 꼭 잡고 나를 배웅하는 그들을 보면서 참 어울리고 어여쁘다 느껴졌지만 나는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선배의 전 부인을 생각했고 마음이 그리 편안치는 않았다.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예전에는 자신의 아내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오기 시작한 것은 수경스님과 문규현 정종훈 신부님이 “사랑 생명 평화”를 위해 지리산 노고단에서부터 오체투지를 시작한 그 무렵이었다. 버들치 시인과 낙시인은 모두 거기에 참여하느라 집을 떠나 있었다.
“은니 큰일 났어. L선배가 보이질 않아. 며칠 전부터 입만 열면 죽고 싶다고 하더니 오늘 섬진강가에서 없어졌대. 여기 사람들 풀어서 찾고 있는데 으쩌지?”
고아르피엠 여사의 심각한 전화를 받고 나는 그곳으로 내려갔다. “부인하고 이혼이 된 줄 알았는데 합의만 끝나고 절차는 아직 남아 있었대. 부인이 그 집에 와서 때려 부수고 난리가 났나봐. 어쨌든 법적으로는 아직은 부부니까. 그래서 그 방송작가가 떠나버렸는데 그 이후로 L선배는 입을 꼭 다물고 술만 마셔. 그러다가 가끔 입을 열면 그 여자 이름만 불러. 실성한 사람 같아.”
L선배와 그녀가 살던 마당 깊은 집에는 장미가 활짝 피었다.
“그냥 내버려 둬. 죽으면 자기 팔자지. 수경스님, 문신부님 저렇게 무릎 아프고 힘드신데 무슨 사랑타령이야. 이 나이에.”
내가 화를 내자 버시인이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우리가 어렸던 1980년대에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지. 하지만 수경스님이 삼보일배하는 것도 L선배가 섬진강가에서 헤매는 것도 다 사랑이야. 네가 보기에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하나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버시인이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자 괜히 내가 슬퍼졌다. 그의 입술도 낙장시인의 입술도 모두 L선배의 그것처럼 부어올랐고 여기저기 터져 있었다. 이러다가 수경스님이나 L선배보다 버시인이나 낙시인이 먼저 죽지 싶었다.
L선배의 부인은 이혼만은 못해주겠다고 하고 L선배는 낮이면 막노동을 해서 어쨌든 아이들 학비는 집에 부치고 밤이면 술을 마시고 죽고 싶어 하는, 그렇게 모진 봄날이 다 가고 있었다. 여름도 이울 무렵이었던가 여자를 찾아 전국을 헤매던 선배가 신변을 정리하러 다시 지리산 자락에 나타났다고 했다. L선배가 술에 취해 몇 번 몸을 던졌던 섬진강가 모래톱에서 우리는 소주를 마셨다. L선배는 이제 담담한 얼굴이었다.
“속초에서 만났어. 아직도 그녀는 내가 이혼남이라고 자기를 속였다고 믿는 거 같았어. 놓아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하고 헤어졌어….”
그리고나서는 비장한 어투로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들 말야,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알아?” 진정한 사랑을 잘 몰라(?) 아픔을 겪었다고 믿고 있던 나는 귀를 쫑긋했다. 그 처절한 아픔을 겪은 선배가 이제 큰 가르침을 주는구나.
L선배가 입을 열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는 거야.”
선배가 더 무슨 말을 할까 나는 열심히 기다리는데 낙시인이 낮게 말했다. “우리까지 죽을동 살동 고생시키고 저런 말을 하다니. 그건 우리가 열다섯살 때 다 알았던 거 아니냐?” 우리는 그때는 크게 웃지도 못했다.
L선배는 여전히 머리와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서울에서 혼자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우리는 걸었다. 좋은 산행이었다. 실내에서 하는 운동과 달리 산행이 몸에 좋은 까닭은 평소에는 전혀 쓰지 않는 근육을 쓸 수밖에 없는 자연의 불규칙성에 있다고 했던가. 산이 예찬 받는 이유 또한 그 불가해성이 삶과 닮아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철쭉 군락지에 도착했는데 맙소사, 꽃이 없었다. 분명 예년보다 꽃이 늦은 것은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월 중순에도 밤이면 영하로 떨어지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에 철쭉은 꽃은커녕 얼어붙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었나 보다. 산의 한 사면 가득 핀 꽃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이제 하산을 해야 했다. 평생 쓰지 않던 근육을 쓰느라 다리는 아프고 근육은 풀어져 다리는 문어 다리처럼 흐물거리며 꼬이는데 멀리서 파도치듯 이리로 다가서는 산들은 생명으로 부글거리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아기 양의 배에서 새로 돋는 것처럼 보드랍게 초록빛 털들이 몽실거리며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생명의 고갱이 속을 걸어가며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는 이제 더는 말하지 않았다.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우리가 중학교 때 다 배웠고 L선배마저 이 지리산 자락에서 늦은 사춘기를 마쳤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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