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그 등불이 그걸 밝히는 등불이었어”
처음 자동차를 샀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이드 미러에 작은 글씨로 써 있던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말을 기억하곤 했는데 생각할수록 많은 것을 함의한 말인 것 같았다. 독일에 체류하던 어느 봄날,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던 노란 유채의 벌판들을 달리다가 창문을 열면 들이치던 샛노란 향기에 숨이 멎을 듯 황홀했던 기억. 그러나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러 아이들과 들어선 순간, 끈적한 진창에 푹푹 구두가 빠져버리곤 했다. 멀리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물이 바로 그 유채들판이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산골마을은 또 어떤가. 아이들과 함께 조립하던 레고 속의 꿈 같던 마을이 마치 세트장처럼 세워져 있던 아름답고 섬세한 풍경들.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그 끝없는 초록의 융단들. 느릅나무 아래 풀밭에 한가로이 누워 책이라도 읽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들어서면 그 초원은 실은 쇠똥 냄새 가득한 현실이었다. 누울 자리는커녕 돗자리를 깐다 해도 벌레들이 덤벼들 테니 차라리 알프스의 풍경 사진을 걸어놓고 내 집에 누워 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L선배의 바람이 지나간 후, 지리산 자락의 부부들은 가끔씩 다투곤 했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원래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아직 그녀를 못 만나서 무뚝뚝할 수도 있다고 의심을 한 것이고, 원래 낭만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하고는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물이,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내게 덮치면 괜찮지만 내 사람에게 닥쳐오면 재앙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이었다.
그 무렵 방송은 잘 타지 않으나 의식 있는 노래로 꽤 알려진 여가수 등불이 지리산에 자주 출현하기 시작했다. 뭐 원래 이 지역에서는 김훈이나 공지영 정태춘 혹은 박은옥 등등이 종종 출현하기도 하니 처음에 그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접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연예인답지 않게 소박한 옷을 입고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는데 솔직히 얼굴만 좀 예뻤다면 그 목소리로 일찍이 대성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싱어송라이터로서 그 의식있는 가사 하며 타고난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만만치 않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흔이 다 되도록 미혼인 그녀는 세상 모두가 탐내는 돈이나 명예 혹은 사랑 같은 것에 초연한, 일종의 수도자 같은 이미지로 더욱 매력적이었다. 등불이라는 예명도 시대를 밝히는 이미지로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아주 솔직하고 시원한 성격을 가진, 술 잘 마시고 잘 노는, 호탕하기가 치마 밑에서 일개 사단이 나오고도 남을 여자라는 것이었다. 언제 마주치면 술을 한잔 사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봄날 나는 마을 어귀 정자에 앉아 할머니들에게 술을 따르는 등불과 마주치게 되었다. 낙장불입 시인 집에 머물던 내가 아래쪽 마을로 내려와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공지영씨 아니쇼, 잉.” 내가 돌아보자 할머니 둘에게 맥주를 따르던 등불은 벌써 얼굴이 붉어 있었다. “돌아보는 걸 보니 참말 공지영이네. 아따 여기 자주 온다는 소리는 들었는디 참말 이런디서 만나부네요. 나 노래 부르는 등불이요. 괜찮으시면 맥주 한 고뿌 하쇼 잉?”
그녀는 여기 사는 영화감독 집에 왔는데 그 감독이 집에 없어서 사온 술을 가지고 동네 노인들과 나누고 있는 참이라는 것이었다. 노래할 때와는 다르게 사투리가 구수한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그런대로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나까지 합세하여 마신 탓에 정자에 있는 맥주가 다 떨어지자 그녀는 내게 영화감독 집에 가서 술을 더 마시자고 했다. 낙시인도 오게 하고 버들치 시인도 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낮술로 기분도 좋아진 나는 그녀와 함께 영화감독네 집으로 갔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문이 훤히 열려 있고 “제발 빌려간 DVD 자리에 돌려놓으소 잉”하는 글씨가 현판처럼 붙은 방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등불이 계속 전화를 하는데도 정작 집주인 영화감독에게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네. 분명 내가 오늘 낮에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그리 야그를 했는데 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화감독네 전화가 울렸다. 등불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참말 이상하네. 누가 자꾸 전화를 해서 나가 여보시오, 하면 끊고 또 여보시오 하면 끊고 한다냐…….”
나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왜 그럴까?” 묻자 버시인과 낙시인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하고는 그저 술잔만 더 채워주는 것이었다. 날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낮부터 시작한 술 때문에 우리의 의식도 술안개로 어스름해져갔다. 그러는 동안 전화는 30분 간격으로 그렇게 울려댔다.
낙시인이 여가수가 화장실 간 틈을 타 낮게 속삭였다. “암 말 말고 가만히 있어. 그 감독이 여가수 오는 거 알고 오늘 피해간 거야. 집 밖에서 빙빙 돌면서 30분 간격으로 자기 집에 전화해서 여가수가 받으면 끊어버리는 거야. 안 받으면 딴 곳으로 간 거니까 그때 집으로 들어오려고.”
무슨 소린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하면 되지 왜 오라고 해놓고 그녀를 피하는지 말이다.
“안 떨어져. 한번 물면 안 떨어진다니까. 이름이 괜히 등불인 줄 아니? 밝혀서 그래.”
그 말의 깊은 뜻을 짐작하려고 내가 애쓰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온 여가수가 자리에 앉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웠는데 그녀가 휴지로 코를 팽팽 풀더니 버시인에게 말했다.
“버시인 옵화! 요새 참 서울이고 지리산 자락이고 남자새끼들이 씨가 말랐습디다. 술만 먹으면 다들 도망을 간다니까요. 내가 무슨 지들을 잡아먹느냐고요. 이러고도 그놈들이 사내새끼들이라고 뭐 두 쪽을 차고 다닐 수 있느냐고요.”
사람 좋은 버시인은 그런 그녀의 한탄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냐? 그런데 어쩌지 나도…실은 네가 무서워.” 버시인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여가수는 작은 눈을 찌푸리더니 더 큰소리로 울었다. “버시인 옵화! 옵화마저 그러니 나는 이제 어찌 살란 말이요. 내가 뭘 어쩐다고? 돈을 달래 쌀을 달래? 자자고 밖에 안 하는데 그걸 안 들어주고…이젠 버시인 옵화까지, 흑.”
그럼 그 등불이 시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밝힌다는 거야? 생각한 내가 약간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녀가 울다말고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거기도 혼자제? 사내놈들 중에 쓰다버린 거나, 지금 쓰고 있는데 버리고 싶은 거나, 해봤는데 세기는 허나 자기 허고는 영 안맞는 놈 있으면 분양 좀 해봐.”
내가 더욱 놀라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울 것들은… 내숭이 9단이여. 에잇 그쪽은 조금 있다가 입신허겄어”하며 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내가 민망해하자 그녀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 말이야. 눈 큰 서울 년이면 다야! 왜 잘난 척해! 응? 그래 나 눈 작다. 눈 작어.”
버시인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가 내게 삿대질을 했다. 술을 마시다가 당하는 난데없는 봉변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나라서 서울 같으면 그냥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여기는 지리산 자락, 대중교통은 없었고 나도 두 시인도 술을 마셔버렸고 그래서 아무도 운전을 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날 그 좁은 감독의 집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할 처지였다. 그렇다고 그럴 때 한 성질 하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데 버시인이 내게 절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눈짓 입짓 손짓 몸짓을 해댔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자……생각하는데 낙시인이 마치 성난 투우에게 시달리는 동료를 구해내는 투우사처럼 끼어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등불아 우리 그렇게 만나도 한 번도 같이 안 잤다, 응?”
그러자 여가수 등불의 눈이 등불처럼 반짝 빛나며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아, 낙시인 옵화하고는 한번도 안 잤네… 맞다. 내가 그걸 세는 걸 잊었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등불 밑이 어두웠네. 이렇게 기쁘고 신기한 일이…케케.”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 지리산 지킴이 총무일을 마친 낙시인의 부인 고 아르피엠 여사가 방으로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처음 자동차를 샀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사이드 미러에 작은 글씨로 써 있던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말을 기억하곤 했는데 생각할수록 많은 것을 함의한 말인 것 같았다. 독일에 체류하던 어느 봄날,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지던 노란 유채의 벌판들을 달리다가 창문을 열면 들이치던 샛노란 향기에 숨이 멎을 듯 황홀했던 기억. 그러나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러 아이들과 들어선 순간, 끈적한 진창에 푹푹 구두가 빠져버리곤 했다. 멀리서 보는 것이 더 아름다운 사물이 바로 그 유채들판이었을 것이다. 스위스의 산골마을은 또 어떤가. 아이들과 함께 조립하던 레고 속의 꿈 같던 마을이 마치 세트장처럼 세워져 있던 아름답고 섬세한 풍경들.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그 끝없는 초록의 융단들. 느릅나무 아래 풀밭에 한가로이 누워 책이라도 읽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들어서면 그 초원은 실은 쇠똥 냄새 가득한 현실이었다. 누울 자리는커녕 돗자리를 깐다 해도 벌레들이 덤벼들 테니 차라리 알프스의 풍경 사진을 걸어놓고 내 집에 누워 있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지리산에 피어난 복사꽃이 춘심을 돋운다. 사람들은 이 무렵 꿈꾸고, 사랑하고, 질투한다. 봄이란 원래 그런 것이리라. | 이원규 시인 촬영
L선배의 바람이 지나간 후, 지리산 자락의 부부들은 가끔씩 다투곤 했다. 여자들은 내 남자가 원래 무뚝뚝한 것이 아니라 아직 그녀를 못 만나서 무뚝뚝할 수도 있다고 의심을 한 것이고, 원래 낭만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하고는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사물이,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이 내게 덮치면 괜찮지만 내 사람에게 닥쳐오면 재앙이 된다는 것을 안 것이었다.
그 무렵 방송은 잘 타지 않으나 의식 있는 노래로 꽤 알려진 여가수 등불이 지리산에 자주 출현하기 시작했다. 뭐 원래 이 지역에서는 김훈이나 공지영 정태춘 혹은 박은옥 등등이 종종 출현하기도 하니 처음에 그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가까이서 접한 적은 없지만 그녀는 연예인답지 않게 소박한 옷을 입고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는데 솔직히 얼굴만 좀 예뻤다면 그 목소리로 일찍이 대성을 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싱어송라이터로서 그 의식있는 가사 하며 타고난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만만치 않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마흔이 다 되도록 미혼인 그녀는 세상 모두가 탐내는 돈이나 명예 혹은 사랑 같은 것에 초연한, 일종의 수도자 같은 이미지로 더욱 매력적이었다. 등불이라는 예명도 시대를 밝히는 이미지로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는 아주 솔직하고 시원한 성격을 가진, 술 잘 마시고 잘 노는, 호탕하기가 치마 밑에서 일개 사단이 나오고도 남을 여자라는 것이었다. 언제 마주치면 술을 한잔 사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 봄날 나는 마을 어귀 정자에 앉아 할머니들에게 술을 따르는 등불과 마주치게 되었다. 낙장불입 시인 집에 머물던 내가 아래쪽 마을로 내려와 걸어가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공지영씨 아니쇼, 잉.” 내가 돌아보자 할머니 둘에게 맥주를 따르던 등불은 벌써 얼굴이 붉어 있었다. “돌아보는 걸 보니 참말 공지영이네. 아따 여기 자주 온다는 소리는 들었는디 참말 이런디서 만나부네요. 나 노래 부르는 등불이요. 괜찮으시면 맥주 한 고뿌 하쇼 잉?”
그녀는 여기 사는 영화감독 집에 왔는데 그 감독이 집에 없어서 사온 술을 가지고 동네 노인들과 나누고 있는 참이라는 것이었다. 노래할 때와는 다르게 사투리가 구수한 그녀는 가까이서 보니 그런대로 귀염성 있는 얼굴이었다. 나까지 합세하여 마신 탓에 정자에 있는 맥주가 다 떨어지자 그녀는 내게 영화감독 집에 가서 술을 더 마시자고 했다. 낙시인도 오게 하고 버들치 시인도 오게 하자는 것이었다. 낮술로 기분도 좋아진 나는 그녀와 함께 영화감독네 집으로 갔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 문이 훤히 열려 있고 “제발 빌려간 DVD 자리에 돌려놓으소 잉”하는 글씨가 현판처럼 붙은 방에서 우리는 술을 마셨다. 등불이 계속 전화를 하는데도 정작 집주인 영화감독에게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네. 분명 내가 오늘 낮에 온다고 일주일 전부터 그리 야그를 했는데 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영화감독네 전화가 울렸다. 등불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그러더니 전화를 끊으며 중얼거렸다. “참말 이상하네. 누가 자꾸 전화를 해서 나가 여보시오, 하면 끊고 또 여보시오 하면 끊고 한다냐…….”
나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가 왜 그럴까?” 묻자 버시인과 낙시인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하고는 그저 술잔만 더 채워주는 것이었다. 날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낮부터 시작한 술 때문에 우리의 의식도 술안개로 어스름해져갔다. 그러는 동안 전화는 30분 간격으로 그렇게 울려댔다.
하동 평사리의 자운영 꽃밭. 부부 소나무가 서 있어서인지 미혼자들은 여기 오면 부부가 되고 싶어한다.
무슨 소린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지 말라고 하면 되지 왜 오라고 해놓고 그녀를 피하는지 말이다.
“안 떨어져. 한번 물면 안 떨어진다니까. 이름이 괜히 등불인 줄 아니? 밝혀서 그래.”
그 말의 깊은 뜻을 짐작하려고 내가 애쓰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온 여가수가 자리에 앉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웠는데 그녀가 휴지로 코를 팽팽 풀더니 버시인에게 말했다.
“버시인 옵화! 요새 참 서울이고 지리산 자락이고 남자새끼들이 씨가 말랐습디다. 술만 먹으면 다들 도망을 간다니까요. 내가 무슨 지들을 잡아먹느냐고요. 이러고도 그놈들이 사내새끼들이라고 뭐 두 쪽을 차고 다닐 수 있느냐고요.”
사람 좋은 버시인은 그런 그녀의 한탄을 들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냐? 그런데 어쩌지 나도…실은 네가 무서워.” 버시인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은 듯 여가수는 작은 눈을 찌푸리더니 더 큰소리로 울었다. “버시인 옵화! 옵화마저 그러니 나는 이제 어찌 살란 말이요. 내가 뭘 어쩐다고? 돈을 달래 쌀을 달래? 자자고 밖에 안 하는데 그걸 안 들어주고…이젠 버시인 옵화까지, 흑.”
그럼 그 등불이 시대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걸 밝힌다는 거야? 생각한 내가 약간 충격을 받아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녀가 울다말고 나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거기도 혼자제? 사내놈들 중에 쓰다버린 거나, 지금 쓰고 있는데 버리고 싶은 거나, 해봤는데 세기는 허나 자기 허고는 영 안맞는 놈 있으면 분양 좀 해봐.”
내가 더욱 놀라자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울 것들은… 내숭이 9단이여. 에잇 그쪽은 조금 있다가 입신허겄어”하며 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내가 민망해하자 그녀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 말이야. 눈 큰 서울 년이면 다야! 왜 잘난 척해! 응? 그래 나 눈 작다. 눈 작어.”
버시인이 말릴 사이도 없이 그녀가 내게 삿대질을 했다. 술을 마시다가 당하는 난데없는 봉변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는 나라서 서울 같으면 그냥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가면 되는 것이었지만, 여기는 지리산 자락, 대중교통은 없었고 나도 두 시인도 술을 마셔버렸고 그래서 아무도 운전을 할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그날 그 좁은 감독의 집에서 함께 잠을 자야 할 처지였다. 그렇다고 그럴 때 한 성질 하는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는데 버시인이 내게 절대 아무 말 하지 말라고 눈짓 입짓 손짓 몸짓을 해댔다. 한 살이라도 더 먹은 내가 참자……생각하는데 낙시인이 마치 성난 투우에게 시달리는 동료를 구해내는 투우사처럼 끼어들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등불아 우리 그렇게 만나도 한 번도 같이 안 잤다, 응?”
그러자 여가수 등불의 눈이 등불처럼 반짝 빛나며 박수를 치며 웃었다. “맞아, 낙시인 옵화하고는 한번도 안 잤네… 맞다. 내가 그걸 세는 걸 잊었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등불 밑이 어두웠네. 이렇게 기쁘고 신기한 일이…케케.”
그런데 문제는 그 순간 지리산 지킴이 총무일을 마친 낙시인의 부인 고 아르피엠 여사가 방으로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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