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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16) 다정도 병인 양 (2)

공지영 | 소설가경향신문

ㆍ“등불아, 이놈 저놈 찾아다니지 말고 큰놈 하나 낚아”

세상에 불행한 일이 가지가지로 있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애로를 겪는 사람들을 보면 저것도 참 불행이다 싶긴 하다. 나 같은 사람은 책 읽는 것 외에 거의 취미가 없으니 나하고 책만 있으면 그런대로 행복하고 산책을 즐기는 사람은 길하고 나하고만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바둑을 두려면 나 빼고 다른 사람 한 명, 골프를 하려면 최소한 3명이 더 동의해야 하고 이게 농구나 야구, 축구 등으로 가면 문제가 더 복잡해져서 수많은 사람이 시간과 장소를 맞추어야 한다. 내 친한 친구는 축구를 유일한 취미로 가지고 있는데 한 번 그 취미를 즐기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른다. 최소한 22명이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만약 내가 매스게임이나 강강술래 같은 것을 좋아했다면 정말 인생이 힘들었을 것 같다.

처음에 등불을 바라보면서 세상에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하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렇지만 그 후로 곰곰 되돌아보니 그녀의 성욕이 강하다는 것 자체가 무슨 죄는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이성들이 그리 호감을 가지지 않을 용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섹스를 좋아하는 그녀가 실은 좀 안되어 보였다. 사람을, 특히나 여자를 용모로 판단하여 예쁘니 아니니 하는 것을 몹시 싫어하는 나지만 어떻게 보아도 등불은 결코 예쁜 여자는 아니었다. 얼굴은 검고 사각이었으며 눈은 단추 구멍보다 더 작았다. 그래도 코는 좀 반듯하고 입술이야 뭐 그런대로 봐 줄 만했는데, 정육면체와 같은 두상과 눈동자가 있는지 없는지 보이지 않도록 작고 찢어진 눈. 이 두 가지 때문에 얼굴은 결정적으로 호감을 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팔도 다리도 굵고 짧아서 여성성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면의 매력이 밖으로 드러나 자리잡는 40대도 아직 되지 않았고, 오로지 타고난 것으로만 승부하는 삼십대 중반의 여자. 한마디로 목소리만 천부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으니, 생각할수록 딱했다.

해마다 진분홍빛 철쭉을 피워내는 지리산이나 그 품안에서 노래하는 가수나 열정은 매한가지 아닐까.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러고 보니 내가 그녀처럼 성욕과 이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여자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내 선배 중에 얼굴도 예쁘고 몸은 버들가지처럼 낭창낭창한 여자가 있었는데-유부녀이다. 누군지 알려고 하시지 말기를, 제발- 술자리에 앉았다 하면 그 자리의 어떤 남자와 사라졌고 다음날은 무용담처럼 그와 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술자리의 남자란 내가 다 아는 사람들이어서 나는 여러 번 인간이란 무엇일까, 남자란 무엇일까 고민하기도 했고, 나를 좋아하는 줄 알아서 언제 데이트를 신청하면 거절할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내 선배와 동침을 해버린 인간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혼자 복수를 했다고 통쾌해 한 일도 있었다. 한 번은 여자친구들이 그녀를 모셔다 놓고 한 수 가르침을 청했다. 그 무렵 나와 비슷하게 도로 싱글이 된 내 친구들의 신년 목표는 늘 올해는 어떻게든 내숭의 해를 만들자! 였는데 결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목표는 어떤 남자가 좀 쫓아와서 “저랑 한 번 사귀어보실래요?” 말이라도 들어보는 것이었고, 그런 남자가 다가오면 우선 화들짝 놀란 척하며 그의 용모를 살핀 후 괜찮은 남자면 “어머 싫어요. 전 아직 당신을 모르잖아요. 한 번쯤 하는 데이트는 몰라도…”라며 살짝 웃는 것이었고, 만일 너무 아닌 사람이 다가오면 “어머 그러고 싶은데 어쩌죠? 지금 남편이 데리러 온다고 해서요”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거절을 해보지 못한 우리가, 아무리 늦게 들어가도 너그러운-게다가 유능하기까지 한- 남편의 사랑도 받고 있으면서 그렇게 바람을 피워대는 그녀를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선배는 버들가지같이 가느다란 종아리를 외로 꼬며 우리에게 강연을 시작했다.

“내가 술자리에서 니들을 보니까, 니들은 꽝이야. 왜 술자리에서 남자들이 뭐라고 하면 아, 그렇군요 하고 말지, 쌍심지를 돋우고 논쟁을 하고 난리야? 누가 싸우자고 덤비는 여자랑 자고 싶겠어?” 생각해보니 일리가 있었다.

“우선 남자를 하나 찍어, 그리고 그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봐. 이때 중요한 것은 아줌마처럼 큰소리로 웃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그래서는 안된다는 거야. 입을 딱! 다물어. 그 사람이 보수꼴통들을 시대의 선각자들이라고 해도 참아. 어떻게 하니, 목표를 위해선 참아야지. 그리고 그가 너의 눈길을 의식하고 너를 바라보는 순간 얼른 ‘엄어낫! 들키어버리었네횻!’ 하는 기분으로 얼른 시선을 내리깔아… 그리고 그가 다른 곳을 보면 다시 그를 뚫어지게 봐. 다시 그가 널 쳐다보면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어. 나 잘 봐! 이렇게… 그 세트를 한 세 번 반복하면 그 다음 그에게서 문자가 오지. 그럼 화장실로 가는 척하고 얼른 나가는 거야. 내가 해보니까 백의 한 명 정도는 안 넘어오고 나머지는 다 영락없이 오케이야. 그 백의 한 명은 알고 보니 다음날이 결혼식이었대. 신혼여행 갔다 와서 문자가 왔더라고. 이제라도 괜찮으면 술 한잔 사고 싶다고, 호호호.”

초여름 내음이 물씬한 낙장불입 시인 집 앞의 산책길.

우리는 그녀를 따라 하기 위해 다음날 괜찮은 남자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기로 했다. 그러나 그 결심은 5분도 못되어서 무너지고 말았다. 우연히 그 자리에 보수신문 기자가 끼어 있었는데 그만 그와 내가 대판 싸우게 되었고 참아야 하느니라, 를 연습하고 간 내 친구들까지 내 편을 드느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만 것이었다. 그 참담한 패배 이후, 우리는 그냥 그 선배를 여신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그저 술 마시고 와구와구 논쟁이나 하면서 우정 비슷한 것이나 쌓자고 그것도 뭐 참 좋은 것이라고 서로를 위로했다. “그래, 인생이 불공평한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는 거야.” 뭐 이런 소리나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되새기면서 등불을 바라보니 등불은 또 의식은 또렷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사람이어서 도저히 보수꼴통을 시대의 선각자들이라고 하는데 입을 딱! 다물고 있을 수는 없는 여자였다. 게다가 술을 먹고 자주 우는 버릇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미 마음을 많이 다친 듯했다. 남자의 경우도 그렇겠지만 내 경험상 저런 식으로 사랑을 갈구하는 여자는 점점 더 그리고 어쩌면 결코 사랑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 큰 허기 때문에 상한 음식이라도 자꾸 먹어서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애정이나 성의 없는 하룻밤의 섹스는 그녀를 점점 황폐화시킬 것이다. 나는 처음 만난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다. 욕구를 주시려면 능력도 함께 주시지, 하느님도 너무하시다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들어선 고 아르피엠 여사의 얼굴은 이미 굳어 있었다. 하기는 아무리 농담이지만 자기 남편과 잠을 자니 마니 하는 소리를 들은 아내가 마음이 좋을 리가 있는가. 어쨌든 그녀는 등불을 보더니 반색을 하는 척했다.

“아이구 등불아, 서울서 혼자 밥해먹느라 을마나 고생이 많니?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너 아직도 남자 찾아다니고 그러니? 글쎄 이 은니가 매번 말했잖아. 이놈 저놈 찾아다니지 말고 벼르고 있다가 큰놈 하나 낚으라고. 거 도토리들이 열 번 굴러도 호박이 한 번 구르는 것에 당하겠니? 호박덩이같이 굵고 큰 놈 하나 낚아. 도토리 같은 놈들 다 잊어버리고. 넌 할 수 있어. 울지 말고 힘내! 응?”

그러자 등불은 고 아르피엠의 손을 잡고 더욱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은니, 내 맘 아는 사람은 역시 은니밖에 없소 이.”

그러자 고 아르피엠은 흐느끼는 등불의 등을 토닥이는 한편 자신의 남편 낙장불입 시인을 한 번 째려본 후 다시 입을 열었다. “너도 서른이 훨씬 넘었으니 알 것 다 알 것 같아 말이지만, 쌀 떨어지자 밥맛 나고 해방되자 일본어 된다고 낙시인이 그리 왕성할 때는 내가 뭘 몰랐는데 요즘은 내가 뭘 아니까 낙시인이 영 늙어버렸어…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대….”

고 아르피엠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낙시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고 아르피엠이 몰래 낙시인을 꼬집었다. 그러자 술에 많이 취한 듯한 등불이 작은 눈을 더 희미하게 뜨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증말? 아이고 하늘도 무심하지, 내가 깜빡 잊어버렸어. 낙시인 옵화하고 안 잔 걸…. 진작 체크했다가 이 지경 되기 전에 얼른 잘 걸.”

이쯤 되자 고 아르피엠도 웃고 우리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는데 갑자기 울던 등불이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쟤 또 음주운전하고 서울로 가는 거 아니야?” 버들치 시인의 말에 우리는 걱정이 되어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등불은 자신의 차에 타려고 하고 있었다. 놀란 낙시인과 버시인이 다가가 그녀를 붙들었다. 등불은 몸부림을 쳤다. 걱정이 된 버시인과 낙시인이 더욱 강하게 그녀를 붙들자 그녀가 소리쳤다.

“왜 이래, 놔. 어딜 만져!!”

그날 나는 알았다. 붙드는 것과 만지는 것의 하늘과 땅 같은 차이를. 어쩌자고, 형제봉 산비탈에는 철쭉만 그렇게 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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