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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11) 기타리스트의 귀농일기

공지영 | 소설가경향신문

친구에 “피 뽑았다” 하니 “피 팔아 살 만큼 어렵냐”

ㆍ추수를 놓쳐버린 귀농자 논에 벼들이 우두커니 서 있자 “배운 사람은 벼를 세워 말리네”
ㆍ버시인 주선으로 기타밴드 결성 “산에서 기타로 밥먹게 될줄이야”
ㆍ떠나는 사람에 이유를 물으니 “부지런한 사람보다 놀멘이 생존”

그 두 사람은 산에서 처음 만났다. 여자는 사려 깊고 조용한 편이었고 남자는 열정적이고 달변이었다. 대개 이런 두 남녀가 만나면 자석의 다른 극과 같이 끌리게 마련이어서 둘은 곧 사랑에 빠졌고 가정을 꾸렸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꿈이 있었는데 나이가 조금 들면 산에 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게 어떤 산인지 그날이 언제인지 물론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려 깊고 조용한 여자는 안정을 원했고 열정적인 남자는 자유를 원했다. 남자는 머리를 엉덩이까지 내려오도록 기르고 기타 하나 멘 채 서울 낙원상가에 있는 자신의 조그만 중고 악기상과 인천의 집을 오갔다. 퇴근 후에는 부지런히 밤무대에서 기타 연주도 했다. 원래 그의 꿈은 기타를 치면서 사는 것이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았다. 장사도 그럭저럭 잘 되었고 밤무대 수입도 괜찮았다.

동네밴드의 공연 모습. 탬버린을 든 이가 버들치 시인, 선글라스를 낀 채 열창하는 보컬이 고 아르피엠 여사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리드기타는 서울에서 귀농한 ‘그’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그러나 말이 별로 없던 아내는 홀로 집을 지키며 조금씩 시들어 갔다. 게다가 나이 서른 중반에 아토피 피부염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토피라는 병은 딱히 약도 없는 불치병 아닌 불치병이었다. 어느날 부인은 혼자서 산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등산을 다녀오다가 지리산 자락에 봐둔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리산 자락의 집을 사게 되었다. 인천 아파트의 전셋값을 빼고 나니 겨우 돈이 맞춰졌다. 혼자 산으로 온 부인은 쓰러져 가는 원래의 농가에 살면서 그 집 마당 한 귀퉁이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사람을 불러 집을 지을 돈이 없었으므로 충청도에서 목수를 하는 오빠들을 불러 주말에만 조금씩 지어가는 집이었다. 남자도 주말이면 내려와 그들을 도왔다. 작은 집은 장장 일년 반 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집이 완성된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는데 부인의 아토피가 나아가기 시작했고 드디어 완전히 나은 일이었다.

남자는 아직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사람들이 중고 악기를 직거래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가게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그는 산에도 가고 싶었지만 패배한 채로 가고 싶지는 않았고 그래서 혼자 애를 쓰고 있었다. 사려 깊고 조용한 부인은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그 혼자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이미 흘러가 버린 물줄기가 돌아올 리는 없었다. 사업은 완전히 망해버렸다. 그는 쫓기듯 지리산으로 내려와 멀리 형제봉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열정적인 남자는 인터넷을 좀 두드려보더니 결심을 한 듯 이웃에게 세 마지기의 논과 밭을 빌렸다. 머리도 단정하게 잘랐다. “그래, 귀농이닷! 자연이닷! 땅을 살리잣! 유기농이닷!” 캐치프레이즈는 좋았지만 글쎄.

두 부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 논과 밭으로 갔다. 딴에는 열심히 일찍 일어나 얼른 밥 먹고 세수하고 일터로 나간 것이었는데 여름 아침 9시만 되어도 땀에 옷이 비 오듯 젖었다. 그들이 열심히 풀을 뽑고 있으면 옆집 노인이 지나가며 말했다. “아유 젊은 사람들이 부지런도 허네 그려.” 처음엔 그게 당연히 칭찬인 줄 알았다. 농부들은 새벽에 일어나 해가 떠서 뜨거워지기 전에 김을 매고 한낮에는 쉬거나 실내에서 일한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 이년쯤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한여름의 잡초는 뽑고 뒤돌아서면 또 돋아난다. 유기농 좋고 땅을 살리는 것은 다 좋고 생명과 함께 하는 농업 좋은데 그 두 부부는 죽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밤이면 생활한복 입고 이웃의 귀농자들과 모여 농촌을 이리 살려보고 저리 살려보느라 컬컬한 목을 여러 잔의 술로 축이노라면 동이 훤하게 텄다. 이웃 농부들이 부지런히 일터로 가는 소리가 들리면 얼른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토피는 나았지만 잡초에 지쳐가던 아내가 말했다. “여보 너무 힘들다, 우리도 남들처럼 제초제 쪼금만….” “그렇게 비생명적으로다 살려면 서울서 살지 뭐하러 여기까지 와?” 말을 꺼내는 부인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남자는 벌떡 일어나 논으로 갔다. 세상의 모든 잡초는 다 자기 논으로만 오는 것 같았다. 벼 사이에 돋아난 피를 뽑고 피를 뽑고 피를 뽑았다. 그렇게 일을 하고 있으면 휴대폰으로 친구들이 전화를 했다. “얀마 뭐하냐?” “피 뽑는다.” 그러면 잠시 그쪽에서 머뭇거리다가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얀마… 다시 서울로 와라, 너 거기서 피 팔아서 살 만큼 그렇게 어려워진 거냐?”

가을이 되자 그래도 벼는 익어갔다. 흐뭇했다. 콤바인을 빌려 추수를 해야 하는데, 낮에 면사무소에 잘못된 행정에 대해 항의하러 갔다가 “농촌 소득증대를 향한 세미나”에 참석하고 저녁에는 귀농자들이 주선하는 “정부의 잘못된 농촌 정책 비판대회”에 참여하다가보니 차일피일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구례와 하동 들판에 다른 집 논은 다 새로 이발한 듯 깨끗이 추수가 끝났는데 여기저기 아직 추수 못한 논들이 부스럼 딱지처럼 남아 있었다. 그게 거의 귀농자들의 논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논에서 탈곡한 벼 이삭들이 도로 가장자리에서 노릇노릇 말라가고 있는데, 귀농자들 논의 벼들은 하는 수 없지 않겠냐는 듯 우두커니들 서 있었다. 지나가던 노인들이 말했다. “참 신기허네, 요즘 배운 사람들은 벼를 선 채로 말리네 그려.”

첫해 수확을 헤아려보니 그래도 담뱃값은 했다. 3년 후 세 마지기 빌렸던 논은 두 마지기가 되었다가 한 마지기로 줄었다가 드디어 텃밭만 남고 다 사라졌다. 생활은 어려워졌다. 부인은 그에게 투정하지 않았으나 그는 술만 마시면 소리소리 질렀다. “자기야 걱정할 거 없어. 우린 여기 지리산에서 버들치 시인이나 낙장불입 시인처럼 자발적 가난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엉? 자발적 가난이라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게!”

부인이 말했다. “여보 여기 지리산이라 높은 건 맞는데, 당신은 매일 밤마다 다른 사람들이랑 농촌 살리느라 외롭지는 않잖아. 쓸쓸한 건 나고.”

그는 닭을 키우기로 하고 우선 토종 병아리 세 마리를 얻어왔다. 벼농사의 뼈아픈 경험을 잊지 않기 위해 절대 처음부터 많이 벌이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결심이었다. 수탉 한 마리에 암탉 두 마리 그리고 조금씩 불려나간다. 그 다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세상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닭이 키워진다. 그래서 그는 우선 계사부터 큼직하게 지었다(그의 집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아침에 혼자 깨어나 마당에 나갔다가 이렇게 좋은 정자가 있네, 하고 올라갈 뻔했다. 계사는 궁궐 같았다). 지나가던 노인들이 말했다. “참 신기허네, 요즘 배운 사람들은 닭장도 양옥으로 짓네 그려.”

열심히 먹이를 주어서 키웠지만 막상 다 자란 것들을 보니 병아리는 암탉 한 마리에 수탉 두 마리였다. 당연히 힘센 수탉이 약한 수탉을 공격하게 되었고 그 삼각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암탉 또한 알도 시원치 않게 낳았다. 벼슬이 붉고 깃털이 서슬푸른 멋진 수탉 두 마리에 암탉 한 마리가 있는 건 모양도 사나웠다. 그는 궁리 끝에 암탉을 더 사서 넣기로 했다. 그는 암탉을 사러 길을 나섰다. 노인들이 그에게 어딜 가냐고 묻자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노인들이 말했다. “참 신기하기도 허네. 배운 사람들네 수탉은 암컷들이 새로 오면 그동안 독수공방한 수탉에게 양보를 하나 보네.”

새로 산 암컷들이 들어오자 힘센 수탉은 새로 들어온 암탉들까지 다 차지해버렸다. 그는 아바의 노래 ‘위너 테이크스 잇 올’을 생각했다. 어쩌면 아바 그룹도 잠시 양계를 해보았나. 낙천적인 그는 생각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나도 아바가 될 수도… 흐흐흐흐.”

일은 뜻밖의 곳에서 풀렸다. 버들치 시인이 그가 기타를 기가 막히게 연주한다는 것을 알고 ‘동네 밴드’의 리드 기타를 제의해 온 것이었다. 그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동네 밴드를 결성하고 첫 공연이 있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구례에서 하동까지 유치원에서 60대 노인까지 그에게 기타 레슨을 제의한 것이었다. 얼마 전 만난 그는 싱글벙글이었다. “여기서 다시 기타를 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산에서도 살고 기타도 치고 그걸로 밥도 먹고 참으로 더 바랄 것이 없어. 그래서 내가 감사하는 마음에 십일조를 내려고 얼마 전에 진보신당에 가입혔어.”

그때 그의 휴대폰에서 문자 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그것을 들여다보던 그가 투덜거렸다. “아니 가입했으면 됐지, 왜 자꾸 문자 보내고 그래… 이 사람들이 아주 열심히네… 참 나 그렇게 열심히 정당 일 하려면 내가 서울서 살지 뭐하러 여기 와 있겠어.”

그러고는 어제 한 사람의 귀농자가 여기를 떠났다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묻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다른 데는 몰라도 부지런한 사람은 여기서는 못 버텨.”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다시 말했다. “부지런히 일해서 악착같이 모으려면 서울서 살지 뭐하러 여기 오냐고. 놀멘 놀멘… 그런 사람들이 여기 귀농에 성공하는 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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