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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사회학

[주거의 사회학](2부)우리 안의 욕망…⑤ ‘삶은 없는’ 주거문화

이정전 | 서울대 명예교수

ㆍ개발주의에 매몰 … ‘사람’은 안보고 ‘주택’만 바라봐

판자촌이니 불량주택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싹 쓸어버리고 거기에 새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빈민 주택을 연구한 어떤 학자는 판자촌이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경제적이고 과학적이며 인간적이라고 말한다. 가장 저렴하며, 주어진 공간과 지형을 최고로 잘 이용하고, 무엇보다도 사람 사는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그저 없애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판자촌이나 불량주택 마을을 전면 철거해버리고 그 대신 대형 아파트를 들어앉히는 주택정책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기존의 주택에 비해 아파트는 널찍하고 편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파트는 감옥과 같이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시멘트 구조물이다. 대단위 아파트단지 건설은 기존의 판자촌이나 불량주택 마을을 없애버릴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던 훈훈한 인간관계의 망도 날려버린다. 소득수준이 높아질수록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의 행복에 점점 더 중요해진다. 소득수준은 계속 높아지는데 국민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는 ‘선진국 병’의 주 원인은 경제성장 과정에서 훈훈한 인간관계가 점점 바래지는 것이다. “사람은 보지 않고 주택만 보는” 우리나라 주택정책은 앞으로 ‘선진국 병’을 우리나라에 퍼뜨리는 데 일조할 뿐이다.

사람은 보지 않고 주택만 보는 전문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기준에 입각해서 판자촌이나 불량주택 마을이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단정한다. 그러고는 우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소 주거기준을 정해서 이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거실, 화장실, 부엌 등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며 3인 가구라면 부부의 방과 자녀의 방이 따로 있어서 최소한 29㎡(8.8평)는 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그걸 누가 모르나. 중요한 것은 영세민들의 경제력이다. 최소 주거기준을 아무리 잘 정하고 그것에 맞는 주택을 공급한들 영세민의 지불능력을 크게 초과한다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설령 영세민들이 그런 주택에 실제로 들어가 살 수 있게 만들어주어도 이들은 오래 견디지 못하고 더 잘사는 사람들에게 팔거나 재임대하기 일쑤다.


결국 영세민들은 다시 판자촌으로 돌아가게 된다. 실제로 이런 일이 그동안 비일비재했다. 그러므로 최소 주거기준을 정하는 데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영세민들이 최소 주거기준에 맞는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추어주는 것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날로 심화되는 빈부격차가 더욱 더 걱정스럽다. 빈부격차를 줄이는 것이 우리나라 주택문제 해결의 중요한 실마리다. 흔히 우리나라는 토건공화국이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에 비해 토건부문의 비중이 너무 높다고 해서 붙여진 악명이다. 토건부문은 온갖 부패와 비리의 온상으로 알려져 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토건산업의 고용효과도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주택정책의 기조는 여전히 공급 우선 정책이다. 우선 공급부터 해놓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야 부동산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이런 논리는 투기성 유동자금이 별로 없을 때(가수요가 별로 없을 때)나 통하는 얘기다. 2005년 우리나라의 유동자금 규모는 약 800조원으로 추산되었다. 2007년에는 그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중 상당부분이 부동산시장을 넘나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부동산투기 열풍의 진원지는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과다한 유동자금이다. 무역수지 흑자로 해마다 막대한 수익금이 국내로 유입되어 소수의 부자들 손에 집중되면서 유동자금의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었다.

이렇게 투기성 자금이 천문학적 규모일 경우에는 아파트 공급물량을 최대한으로 늘린다고 해도 투기수요의 극히 일부분만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500조원 규모의 가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5억원짜리 아파트를 100만채 지어야 한다. 가수요의 대부분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1~2년 사이에 수도권에 아파트를 100만채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급을 늘려도 가수요의 극히 일부분만을 충족시킨다면, 부동산가격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일부 투기꾼들의 투기 욕구를 만족시키는 정도로 끝나게 된다. 오히려 투기에 성공한 사람의 수를 늘림으로써 투기를 더욱 더 부추길 우려가 있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 부동산투기 성공담이 널리 퍼져 있고, 이것이 부동산투기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인이 되고 있다.


투기 성공담이 부동산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부동산 실무자들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공급증대 정책은 투기에 성공한 사람의 수를 늘림으로써 오히려 투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정부는 아파트 공급을 지속적으로 크게 늘렸지만, 늘릴 때마다 아파트가격은 내리기는커녕 올라가기만 했다. 성공한 투기꾼들의 무용담이 급속도로 퍼지면서 투기판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 결과 주택을 지나치게 돈벌이와 재산증식 수단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런 풍조 때문에 주택공급이 서민들의 주거안정보다는 채산성을 위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저렴한 소규모 주택 공급보다는 고가의 중·대규모 주택 공급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빈부격차가 큰 나라에서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이다. 중·대규모 주택은 돈벌이가 잘 되는 반면, 소규모 주택은 경제성이 없다. 이렇게 중·대규모 주택 위주로 공급이 이루어지다 보면, 자연히 영세서민들이 살 곳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된다.

재개발이나 뉴타운 사업 등 전형적인 대규모 주택공급 사업들은 기존의 주택들을 전면 철거한 다음 아파트를 짓는 방식, 즉 ‘전면철거형’ 개발방식을 취하고 있다. 사업이 종료되고 나면, 철거된 주택들보다 훨씬 더 큰 주택들이 공급된다. 그러다 보니 사업 전에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 특히 영세민의 대부분은 사업 후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서울 길음4구역 재개발사업의 경우 90%에 가까운 주민들이 사업 이후에 그 지역을 떠났다고 한다. 새로 지어지는 주택들은 대부분 아파트들이며 중소기업이 아닌 대형 토건회사들이 지은 집들이다. 그래서 재개발이나 뉴타운 사업은 서민들을 삶의 터에서 몰아내며, 도시의 미관을 망가뜨리고, 중소 건설업체들을 망하게 하는 사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어차피 빈부격차를 줄이기 어렵고, 그래서 영세서민들의 주거구입능력을 높이기 어렵다면, 서민들을 위한 임대주택을 더 많이 공급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임대주택 공급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하지만 채산성을 너무 따지다 보면 임대주택보다는 분양주택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정부의 주택정책 기조도 장기적으로 임대주택보다는 분양주택을 더 많이 공급하는 방향으로 잡혀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앞으로 먼 미래를 내다본다면 이 정책기조는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제레미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이라는 저서에서 앞으로 임대문화의 시대가 온다고 예고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부자들은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빌려 쓴다고 한다. 자동차를 빌려 쓰면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오늘은 빨강색 스포츠카, 내일은 검정색 세단, 모레는 뚜껑 없는 노랑색 차 식으로 차를 마음대로 골라 탈 수 있다. 차를 소유하고 있으면 만날 같은 차를 타고 다녀야 하고 유지 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일주일에 한 번 쓸 청소기도 빌려 쓰는 것이 경제적이다. 냉장고, 가구, 세탁기 등을 빌려 쓰면 이사갈 때 매우 편하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이런 세상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재빠른 변신이다.

물장사 하다가 잘 안 되면 옷장사로 바꾸고, 옷장사가 잘 안 되면 음식장사로 바꾸고. 이런 변신이 긴요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동산은 큰 걸림돌이 된다. 부동산의 최대 약점은 환금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동산의 소유는 변신을 어렵게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땅이나 건물도 소유하지 않고 빌려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 미국과 가장 비슷한 나라가 우리나라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도 머지않아 부동산 소유를 기피하는 풍조가 생기지 않을까.

▲ 이정전 교수는?

이정전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67)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두 경제학의 이야기: 주류경제학과 마르크스경제학」(1993), 「토지경제론」(1991), 「분배의 정의」(1994), 「토지경제학」(1999), 「환경경제학」(2000) 등을 썼다. 또 「우리는 행복한가」(2008)를 통해서는 경제성장과 소득증대가 인간의 행복과 무관함을 역설했다.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대표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 한국자원경제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시민단체인 ‘환경정의’ 고문과 기후변화센터 정책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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