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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의 사회학

[주거의 사회학](3부)주거와 정치·사회…① 서울의 재구성

특별취재팀 http://wherelive.khan.kr
ㆍ‘아파트’가 유권자들의 정치성향까지 바꿨다

“원래는 민주당을 지지했는데 지난 총선에선 한나라당을 찍었어. 친구 중에 전라도 사람이 많은데 지난번엔 자기들이 나서서 한나라당 뽑자고 하더라고. 여당을 지지하면 개발이 이뤄질 거라고 본 거지. 아직도 친구들 중엔 무허가주택에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개발을 많이 원해. 옛날에는 이 동네 개천에서 똥물이 흘러서 오죽하면 ‘봉천동에선 장화 없이 못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아파트가 많아져 살기 편한 걸 아니까 발전을 더 원하는 거 같아.”(관악구 중앙동에 사는 75세 김모씨)

서울대가 자리잡은 관악구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강세 지역이었다. 88년 13대 총선때 평민당이 갑·을 선거구 모두에서 당선된 후 15대때 한 선거구를 제외하고는 줄곧 민주당과 같은 뿌리인 국민회의, 열린우리당 출신 국회의원이 나왔다. 18대 총선은 달랐다. 한나라당 김성식 의원이 갑 선거구에서 민주당 유기홍 후보를 2765표(2.69%포인트) 제치고 당선됐다. 이변으로 불릴 만했다.

민주당 관악갑지역위원회 박기찬 사무국장은 “봉천동 하면 ‘못사는 동네’라는 이미지가 컸지만 7~8년 전부터 재개발지역에 드림타운, 푸르지오 등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집값이 많이 올랐다”며 “그 가격대에 들어올 수 있는 주민들이 유입됐는데 민주당 성향의 서민들보다는 보수성향의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는 “새로 들어온 아파트 주민들의 표를 많이 빼앗긴 것 같다”고 했다.

무허가 불량주택이 많았던 봉천동과 난곡 일대는 90년대 말부터 재개발이 본격화됐다. 판자촌을 밀어낸 곳은 수천가구의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봉천동에는 40평대 이상의 중대형도 많이 들어섰다. 봉천동이란 이름이 달동네 이미지를 풍긴다는 주민들 민원이 이어져 2008년 보라매동, 청림동, 은천동, 중앙동 등으로 개명했다. 중앙동 주민 윤서순씨(55)는 “동네에 흐르던 개천을 아스팔트로 덮어 그 위로 차가 다닌 게 불과 25년 전”이라며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은 개발로 집값 상승을 노려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도봉구청 신청사가 자리한 지하철1호선 방학역 일대. 이곳은 90년대 중반까지 대상그룹 미원공장을 비롯해 크고작은 공장이 모여있는 공장지대였다. 98년 미원공장이 철거돼 군산으로 이전하면서 아파트가 지어졌고, 2001년 그 자리에 대상타운현대 1278가구가 입주했다. 방학·쌍문·도봉2동 일대에 삼성 래미안아파트도 들어섰다. 2007년에는 도봉·쌍문동 일대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됐다.

도봉을지역 한나라당 관계자는 “과거 미원공장이 있던 방학동은 근로자들이 많이 살고 주거형태도 주로 연립주택과 사택으로 이뤄져 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던 곳”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도봉구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동네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아파트가 없고 주민의 20%가 지하·반지하에 사는 방학2동과 주택이 많은 도봉2동 일부는 민주당 성향이, 아파트촌인 쌍문4동과 방학1동은 한나라당 성향이 강하다”고 말했다.


인근 쌍문2동에 거주하는 박명환씨(75)는 “17대 총선땐 민주당을 찍었는데 18대 선거에선 한나라당에 표를 줬다”며 “한나라당이 되면 재개발이 쉽게 될 것 같아서 찍었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박씨의 딸 영옥씨(42)도 같은 이유로 한나라당을 지지했다고 했다.

주택 밀집지역인 쌍문2동은 재개발 요구가 거센 동네 중 하나다.

14대부터 17대 총선까지 민주당이 싹쓸이 했던 이 지역은 2008년 총선때 두 선거구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됐다. 도봉갑에 출마한 한나라당 신지호 후보는 이곳에서 내리 3선을 지낸 민주당 김근태 전 의원을 1278표(1.88%포인트) 차로 눌렀다. 도봉을에서도 정치 신인이던 한나라당 김선동 후보가 야당의 현역 의원을 이겼다. 한나라당 후보들은 모두 도봉뉴타운 추진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구로구 개봉역 인근에서 부동산중개업을 하는 조병환씨(64)는 69년부터 개봉동에서 살아온 지역 토박이다. 지난 40년간의 개발 상황과 정치성향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옛날 개봉동 일대에는 파이프공장, 제지공장과 저층아파트가 있었어요. 하지만 공장들이 빠지면서 90년대 말부터 아파트 단지가 분양되기 시작했죠. 이 근처의 벽산블루밍, 대우, 한마을 아파트가 다 그때 들어선 거예요. 대체적으로 서울은 야당 성향이 강하잖아요. 이곳도 그전에는 야당이 셌는데 지난번 선거땐 호남 사람들의 민주당 지지가 약해졌죠. 맹목적으로 민주당 믿던 사람들도 지역 발전을 위해 돌아서는 경우가 있었어요.” 조씨는 매번 민주당 후보를 찍었으나 지난 총선에선 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역시 구로구의 고척2동에서 20년째 살고 있는 류영철씨(57)도 지난 총선때 개발 공약을 보고 한나라당을 찍었다. 그는 “고척동은 산을 깎아 집을 지은 곳이라 못사는 서민들이 많았던 동네”라며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출신지역을 떠나 당장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개발 공약을 먼저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것보다 개발을 통해 재산을 늘리는 게 훨씬 빠르지 않으냐”는 얘기다.

구로구는 영등포와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단지였다. 공장이 많고 안양천, 철도차량기지 등으로 생활권이 나뉘어 발전이 더딘 편이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준공업지역 정비로 신도림동 한국타이어·대성연탄, 구로1동 제일제당, 오류2동 동부제강 공장 등이 외곽으로 빠진 뒤 아파트촌으로 바뀌었다.

2000년대 들어 신도림동 종근당 공장터에는 4224가구의 대림타운이 형성됐고, 가리봉동은 균형발전촉진지구로 지정됐다. 전통적으로 호남 유권자가 많았지만 개발 후 중산층이 대거 유입되면서 정치성향도 바뀌었다.

주거 형태와 지역의 개발 이슈는 정치 지형을 바꿔놓는다. 주거가 개인의 삶이나 문화적 차원을 넘어 정당에 대한 지지성향과 투표 행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서울에서 뉴타운 공약을 내세워 압승을 거둔 2008년 총선은 개발 공약이 표의 향배를 결정짓는 데에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보여줬다. ‘뉴타운이 되면 집값도 오르고 살기 좋아진다’는 환상이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고, 도시에서 야당을 많이 찍는다는 ‘여촌야도(輿村野都)’ 개념도 파괴됐다. 이는 서울의 보수화와 동시에 서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정착한 외곽 지역의 상대적 진보화 경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서울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 성향이 강했던 지역의 1990년대 이후 개발 흐름과 총선결과 추이를 들여다보면 이러한 해석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18대 총선때 구로갑에선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됐다. 선거 열흘 전만해도 재선에 도전한 민주당 후보가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넘게 앞서 있었으나 선거에선 926표(1.08%포인트) 차로 졌다.

한나라당이 내건 온수역세권 개발, 오류역 복합민자역사 유치 등의 공약이 막판 표심을 흔들었다는 게 지역의 평가다.



맞닿아 있는 금천구도 상황이 비슷하다. 지난 총선 전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후보가 우세했지만 선거에선 한나라당 후보가 342표(0.4%포인트) 차로 신승을 거뒀다. “금천구는 전라도 사람이 3분의 1이 넘어 항상 민주당이 이기는 동네였죠. 하지만 2008년에 한나라당이 당선된 건 뉴타운 공약이 제일 컸다고 봐요. 안형환 의원이 거리 곳곳마다 뉴타운 도면을 걸어놓고 주민들 신뢰를 얻은 거죠. 한나라당이 근소한 표차로 당선된 건 시흥3동에서 몰표를 받아 된 거래요. 거기에 뉴타운을 만든다고 했거든요. 금천구는 말이 서울이지 강원도보다도 못해 뉴타운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심리가 아주 컸어요.” 시흥1동에서 18년간 거주한 이모씨(45)의 얘기다.

이처럼 서울의 재개발과 뉴타운 열풍은 정치 구도를 바꿔놓고 있다. 역대 서울지역 총선에서 진보개혁진영의 당선 비율은 14대 56.8%→15대 41.3%→16대 62.2%→17대 66.7%로 높은 편이었으나 18대 총선에서는 48개 선거구 중 40개를 한나라당이 가져갔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는 “2008년 총선에선 뉴타운이 선거를 좌우하는 쟁점 정책이었다. 특히 서울 강북에서 박빙으로 민주당 후보들이 진 지역들은 뉴타운 공약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재개발이 이뤄지면 중산층 거주율이 높아지고 탈 야권적 성향이 나타난다”며 “서울의 보수화 경향과 함께 재개발 지역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외곽으로 많이 이주하면서 경기도의 상대적 진보화 경향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이목희 전 의원은 “총선의 기본 구도는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이지만 동네에서는 개발 이슈가 제일 중요하더라”며 “의원들도 국회에 와선 정치 얘기하지만 동네에 가면 개발 얘기를 더 많이 한다”고 전했다. 여론조사기관 더 피플의 지난해 12월 조사 결과를 보면 유권자들은 후보선택 기준으로 선거공약(44.4%)을 가장 많이 보고 있으며, 공약 중에선 지역개발(47.7%) 분야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 소유여부와 주거형태에 따라 지지정당이 갈리는 현상은 민주노총 대변인을 지낸 손낙구씨가 출간한 <대한민국 정치사회지도>에서도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을 많이 찍은 동네일수록 집 가진 사람, 다주택자, 아파트 거주자가 많이 살고 투표율도 높게 나타났다. 반면 민주당 득표율이 높은 동네일수록 무주택자, 연립·다세대주택 거주자, 1인가구, (반)지하 거주자 등이 많이 살며 투표를 포기하는 비율도 높았다. 또 이사를 얼마나 자주 다니느냐도 투표 행태에 영향을 미친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소득이 늘어나지 않았음에도 주거 형태가 바뀌면 정치의식이 바뀌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현상”이라며 “이는 부의 대부분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서면 자산가치가 늘어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일고, 이를 현실화시키려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문제는 재개발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진보화되기보다는 먹고살기 힘들어 정치에 무관심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덧붙였다.

총선 후 2년이 지난 지금, 뉴타운 공약을 믿고 한나라당을 찍었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뉴타운 공약이 흐지부지해져서 주민들이 한때 시위를 하기도 했죠. 80년대에 지은 집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뉴타운에 대한 미련을 못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많이 잠잠해진 편이에요. 처음에는 돈 몇푼 들이면 지어지는줄 알았는데 몇 억원씩 든다고 하고, 뉴타운이 되면 원주민들이 쫓겨나는 형국이 된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시흥3동 거주 61세 김모씨)

▲ 특별취재팀
최민영(사회부) 이주영(산업부)
김기범(사회부) 임아영(전국부) 기자
김설아·황성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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