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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여행스케치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루카(이탈리아)

오영욱|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충남 서산에는 해미읍성이 있습니다. 작고 아담한 조선시대의 성입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1491년에 처음 축조됐고, 1973년까지는 성 안에 관공서와 초등학교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삶의 흔적들이 모두 철거되고 옛 관아 등의 건물들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지금의 복원이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삶의 모습을 철거하고 단지 구경거리가 될 옛 건물로 복원하는 것은 역사를 박제로 만드는 일입니다. 오히려 성 안에 있던 초등학교가 지금도 존재했다면 꽤 근사했을 것 같습니다. 15세기의 성 안에 20세기의 초등학교가 있는 21세기의 모습인 셈이죠.

이탈리아 피렌체 서쪽으로 루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가이드북의 지도에서 발견한 타원형의 광장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무작정 찾아간 곳입니다. 그 광장 형태의 비밀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원형경기장 광장’(piazza anfiteatro). 예전에 원형경기장이던 자리가 오늘날 광장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관객석이 있던 자리는 광장을 둘러싼 건물이 됐습니다. 건물의 창들이 마치 관객들의 시선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루카의 광장에 위치한 노천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셨습니다. 한참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그리고 존재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머릿속에서는 끝끝내 해미읍성의 아쉬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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