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소설가ㅣ경향신문
ㆍ귀를 막고 하산한 지리산 호랑이
지리산에 대한 글을 연재한다는 소문이 솔솔 퍼지자 친구들이 지리산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주로 정상에서 찍은 것인데 겨울 것이든 여름 것이든 감탄스러웠다. 어떻게 산봉우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을까. 멋있다, 하니까 친구들은 살살 나를 꼬드긴다. 이제 산에 올라 네 눈으로 직접 보라고. 나로 말하자면 산이라면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로 다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난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면 친구들은 아이고 그래 술이나 따라라, 한다. 산에 대해 내가 이상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시려나? 하지만 일전에 어떤 모임에서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는, 아주 건전하고 다소 민망한 순서가 있었는데 서울대 조국 교수는 올해 소망을 산에 좀 덜 가는 것, 가더라도 뛰어 올라가지 않는 것, 이란 대답으로 좌중을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음은 물론 전례없는 보충질의까지 받았다. “뭐라고요? 덜 입니까 더 입니까? 뛴다고요?” 그때 나는 조 교수보다는 내가 사람들을 좀 더 맘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산을 뛰어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산맥의 파도 위에 작은 조각배 같은 대피소를 짓고 거의 40년을 산 사람이 있다. 노고단 산장을 열고 피아골 대피소를 지킨 함태식옹이다. 지리산 지킴이라고 해서 대학 때 본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도끼로 장작을 패는 근육질 남자가 나이 든 모습을 상상했는데 영 아니었다. 뭐랄까 그분에게는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야 나는 그것이 지리산의 그 능선들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섬세하나 강직하고 부드러우나 꼿꼿하며 풋풋하나 육감적인, 술을 하도 좋아해서 그는 한때 이런 노래까지 지었단다.
‘아침 술 한 잔은 식욕을 늘리고/ 아침 술 두 잔은 체력을 강하게 한다/ 아침 술 석 잔은 불가피하고/ 아침 술 넉 잔은 집안일을 잊게 한다/ 일삼오칠구 하니 / 아침 술 다섯 잔은 마땅하고 / 아침 술 일곱 잔은 좋으며 / 아침 술 아홉 잔은 넘지 말아야 한다/ 저녁 술은 양에 한도가 없도다’
생각해 보니 약간 양심들은 있어서(?) 이런 합리화용 노래가 필요했나 보다. 그리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되어 술도 직접 담가 신선주라 이름했다고 하는데 이 강적 뒤에는 한술 더 뜬 도사님이 계셨다. 한번은 술이 익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은 함 선생이 전화를 걸어 “어이 낙렬이, 이제 때가 됐는데도 독에서 영 끓지가 않는구먼!” 하자 유낙렬이라는 애주가는 “그라요? 어째 그럴까잉?”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라믄 내가 가볼 시간은 없응게 수화기를 술독에다 넣어보쇼” 했단다. 긴가민가 하면서 하라는 대로 하니 독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술이 끓는디! 소리 괜찮은디! 아주 잘 끓능만요!” 이쯤 되면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가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가락 감촉만으로 병아리 감별을 잘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하고, 전용 연습장 하나 없이도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고 동양인은 어렵다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최고에 오르고, 이렇게 똑똑하고 신통한 국민들을 모시고 정치를 요 모양으로만 안 해도…. 아니다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자. 여기는 행복학교. 험!
노고단 산장을 처음 열고 홀로 지내는 겨울, 그는 별 생각 없이 산장으로 들어갔다. 평균 온도 영하 20도, 평생 처음 고독, 추위와 싸우다 그만 폐가 터져버려 큰 수술을 받았다. 그가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1972년, 그의 나이 40세라고 했다. 요즘 40세는 운 좋으면 애기 취급을 받는 청년일 수도 있지만 그때 40세는 달랐을 것이다. 환갑잔치가 호텔과 음식점의 주요 수입원일 때니까 말이다. 그 나이에 모든 걸 훌훌 던지고 산으로 오른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좋아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그는 하루에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 놈이 뒈질 때까지!”라고 친구들 앞에서 맹세를 하고 그것을 지켜나갔다. 그러던 79년 어느날, 천은사 가는 길에 있는 도계암의 한 스님이 길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함 선생이 다가가자 스님이 그에게 담배를 물려주며 “축하합니다” 했단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너무 오래 끊었고, 끊으니 좋아서 그는 그 이후로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가 하도 술을 잘 먹는다는 소문을 들어 나로서는 안주발을 세우며 장기전에 대비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술을 거의 먹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전립선암이래요. 아직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술을 못 먹어, 술도 못 먹고… 이 전립선암이란 게 말이야 남성호르몬을 먹고 살아, 남성호르몬을….” 그는 슬그머니 날 피해 내 남자친구들에게 남성호르몬의 의미를 눈짓으로 설명하는 것 같았다. 뭔 의미인지 짐작은 가지만 아무튼 술을 못 드셔서 적적하시겠다 싶었다. 하지만 80세에 남성호르몬 때문에 서운하신 게 있다니, 험!
1928년 구례생 용띠, 순천 중학교 졸업, 연희전문 수학. 넓게 보면 내 선배님이시다. 젊을 적 이야기를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해방되었을 때 내가 18세였어요. 해방되던 날, 구례경찰서로 갔지.”
그가 일본 경찰에게 물었다. “너희는 왜 안 나가냐?” “상부에서 아직 명령이 없다.” 그러자 그는 “패전한 놈들이 무슨 상부가 있어?” 하고 그들의 무기를 몽땅 빼앗고 친구들과 함께 그들을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대한민국 최초의 경찰서장이 된다. 그때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지리산 속에도 일본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사단장이 경찰서로 퇴각을 해왔다. 대좌, 당시로서는 아주 높은 계급이었다. 그는 대좌에게서 사무라이의 상징이라는 일본도를 빼앗고 여수 쪽으로 군대를 다 몰아냈다. 그런데 그 경찰서장 3일차, 사라진 줄 알았던 일본군이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여수는 물론 전국 어디서도 아직 일본군이 무장해제가 된 곳은 한 곳도 없었던 것이다. 지리산 속에 있다 보니 세상물정 어두워 촌놈들에게 당했다고 수모를 받은 그들이 다시 나타나 말했다. “무기는 가져도 좋다. 그러나 일본도만은 돌려다오. 아니면 폭격을 하겠다.” 협박을 했다. 그래서 18세의 그는 너그러이 그들의 자존심만은 살려주었다고 한다.
지리산 산장 시절에도 이런 배포의 일화는 계속되었다. 지리산 정상. 그는 거기서 호랑이로 통했다. 고성방가는 물론 큰 웃음도 금지, 쓰레기 금지, 남녀상열지사 금지 등등. 이러다 보니 마찰이 자주 일어나 지리산 다른 산장지기는 주먹다짐은 물론 칼 맞고 쓰러지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때리지도 맞지도 않았다. 그러고도 그는 그 카리스마를 전 지리산에 떨쳤던 것이다. 비결을 물으니 예의 간결체로 그가 다시 대답했다. “초반에 팍! 기선을 제압하는 거지.”
산에서 그가 구해낸 인명만도 100명은 넘을 것이란다. “그땐 말이야 등산복이나 있나, 여대생들은 청바지에 반팔 티 입고, 사내놈들도 그렇고 그러다가 산 날씨가 나빠져서 바람 불면 다들 얼어죽게 생기는 거야. 게다가 그 큰 카세트는 왜 그리 들고 다니는지, 작은 카세트 든 놈이 큰 카세트 든 놈한테 야코가 죽는 시절이었지, 하하.”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그의 새 거처로 갔다. 40년을 지리산을 위해 담배꽁초 하나라도 세세히 줍던 그가 쫓겨나게 되자 지리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고 그는 환경부 촉탁직으로 남게 된 것이다. 피아골 입구 관리소에 딸린 작은 방이 이제 그의 거처다. “하산하신 게 아니네요. 여기도 지리산이잖아요?” 내가 묻자 그는 커피 물을 올리며 씨익 웃었다. “800(m)은 넘어야 산이지. 그리고 내가 비록 환경부 직원이지만 케이블카는 절대 반대야, 암 절대!” 그러고는 귀에서 무언가를 빼냈다. 보청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귀마개. 저잣거리에 내려가면 그 무수한 소음 때문에 귀가 아파 그가 고안한 것이었다.
창밖 피아골에 어둠이 짙게 내렸다. “노고단 산장에 처음 가서 내가 호롱불을 만들어 현관에 달아놨어요. 근데 작은 호롱불빛이 말이야, 멀리 화엄사 입구에서도 보여. 등불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찾아오는 거야. 길게 밝혀준다고 그걸 장명등이라고 하지.”
그의 말대로 빛이라는 게 그렇구나, 갑자기 우리는 숙연해졌다. 작은 일도 지극해지면 생명을 살리는 등불이 되는구나. 장명등.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돌아오는 길,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들이 찻길을 떼지어 건너가고 있는 게 전조등 불빛에 보였다. 행여 치일까 차를 멈추고 겨울을 견뎌낸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잔설은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지만 봄이 코앞으로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지리산에 대한 글을 연재한다는 소문이 솔솔 퍼지자 친구들이 지리산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주로 정상에서 찍은 것인데 겨울 것이든 여름 것이든 감탄스러웠다. 어떻게 산봉우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을까. 멋있다, 하니까 친구들은 살살 나를 꼬드긴다. 이제 산에 올라 네 눈으로 직접 보라고. 나로 말하자면 산이라면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로 다 끝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난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하면 친구들은 아이고 그래 술이나 따라라, 한다. 산에 대해 내가 이상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으시려나? 하지만 일전에 어떤 모임에서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는, 아주 건전하고 다소 민망한 순서가 있었는데 서울대 조국 교수는 올해 소망을 산에 좀 덜 가는 것, 가더라도 뛰어 올라가지 않는 것, 이란 대답으로 좌중을 잠시 침묵하게 만들었음은 물론 전례없는 보충질의까지 받았다. “뭐라고요? 덜 입니까 더 입니까? 뛴다고요?” 그때 나는 조 교수보다는 내가 사람들을 좀 더 맘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산 지킴이 함태식옹은 산 아래의 삶에 익숙지 않다. 하여 저잣거리에 내려갈 때면 귀마개를 한다. 무수한 소음과 그 소음이 낳는 번잡함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아침 술 한 잔은 식욕을 늘리고/ 아침 술 두 잔은 체력을 강하게 한다/ 아침 술 석 잔은 불가피하고/ 아침 술 넉 잔은 집안일을 잊게 한다/ 일삼오칠구 하니 / 아침 술 다섯 잔은 마땅하고 / 아침 술 일곱 잔은 좋으며 / 아침 술 아홉 잔은 넘지 말아야 한다/ 저녁 술은 양에 한도가 없도다’
생각해 보니 약간 양심들은 있어서(?) 이런 합리화용 노래가 필요했나 보다. 그리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가 되어 술도 직접 담가 신선주라 이름했다고 하는데 이 강적 뒤에는 한술 더 뜬 도사님이 계셨다. 한번은 술이 익었는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은 함 선생이 전화를 걸어 “어이 낙렬이, 이제 때가 됐는데도 독에서 영 끓지가 않는구먼!” 하자 유낙렬이라는 애주가는 “그라요? 어째 그럴까잉?”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라믄 내가 가볼 시간은 없응게 수화기를 술독에다 넣어보쇼” 했단다. 긴가민가 하면서 하라는 대로 하니 독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술이 끓는디! 소리 괜찮은디! 아주 잘 끓능만요!” 이쯤 되면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가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손가락 감촉만으로 병아리 감별을 잘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하고, 전용 연습장 하나 없이도 피겨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따고 동양인은 어렵다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도 세계 최고에 오르고, 이렇게 똑똑하고 신통한 국민들을 모시고 정치를 요 모양으로만 안 해도…. 아니다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자. 여기는 행복학교. 험!
노고단 산장을 처음 열고 홀로 지내는 겨울, 그는 별 생각 없이 산장으로 들어갔다. 평균 온도 영하 20도, 평생 처음 고독, 추위와 싸우다 그만 폐가 터져버려 큰 수술을 받았다. 그가 지리산에 입산한 것이 1972년, 그의 나이 40세라고 했다. 요즘 40세는 운 좋으면 애기 취급을 받는 청년일 수도 있지만 그때 40세는 달랐을 것이다. 환갑잔치가 호텔과 음식점의 주요 수입원일 때니까 말이다. 그 나이에 모든 걸 훌훌 던지고 산으로 오른 이유를 묻자 그가 대답했다. “좋아서!”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한 후 그는 하루에 세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그 놈이 뒈질 때까지!”라고 친구들 앞에서 맹세를 하고 그것을 지켜나갔다. 그러던 79년 어느날, 천은사 가는 길에 있는 도계암의 한 스님이 길거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함 선생이 다가가자 스님이 그에게 담배를 물려주며 “축하합니다” 했단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너무 오래 끊었고, 끊으니 좋아서 그는 그 이후로 담배는 입에 대지 않았다. 그가 하도 술을 잘 먹는다는 소문을 들어 나로서는 안주발을 세우며 장기전에 대비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술을 거의 먹지 못한다고 했다. “내가 전립선암이래요. 아직 수술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술을 못 먹어, 술도 못 먹고… 이 전립선암이란 게 말이야 남성호르몬을 먹고 살아, 남성호르몬을….” 그는 슬그머니 날 피해 내 남자친구들에게 남성호르몬의 의미를 눈짓으로 설명하는 것 같았다. 뭔 의미인지 짐작은 가지만 아무튼 술을 못 드셔서 적적하시겠다 싶었다. 하지만 80세에 남성호르몬 때문에 서운하신 게 있다니, 험!
1928년 구례생 용띠, 순천 중학교 졸업, 연희전문 수학. 넓게 보면 내 선배님이시다. 젊을 적 이야기를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해방되었을 때 내가 18세였어요. 해방되던 날, 구례경찰서로 갔지.”
들은 푸른데 산은 희다. 떠나가는 겨울이 아쉬운 듯 지리산이 잔설을 이고 있다.
지리산 산장 시절에도 이런 배포의 일화는 계속되었다. 지리산 정상. 그는 거기서 호랑이로 통했다. 고성방가는 물론 큰 웃음도 금지, 쓰레기 금지, 남녀상열지사 금지 등등. 이러다 보니 마찰이 자주 일어나 지리산 다른 산장지기는 주먹다짐은 물론 칼 맞고 쓰러지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그는 한 번도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 때리지도 맞지도 않았다. 그러고도 그는 그 카리스마를 전 지리산에 떨쳤던 것이다. 비결을 물으니 예의 간결체로 그가 다시 대답했다. “초반에 팍! 기선을 제압하는 거지.”
산에서 그가 구해낸 인명만도 100명은 넘을 것이란다. “그땐 말이야 등산복이나 있나, 여대생들은 청바지에 반팔 티 입고, 사내놈들도 그렇고 그러다가 산 날씨가 나빠져서 바람 불면 다들 얼어죽게 생기는 거야. 게다가 그 큰 카세트는 왜 그리 들고 다니는지, 작은 카세트 든 놈이 큰 카세트 든 놈한테 야코가 죽는 시절이었지, 하하.”
해가 저물 무렵 우리는 그의 새 거처로 갔다. 40년을 지리산을 위해 담배꽁초 하나라도 세세히 줍던 그가 쫓겨나게 되자 지리산을 사랑하는 이들이 여러 방면으로 애를 썼고 그는 환경부 촉탁직으로 남게 된 것이다. 피아골 입구 관리소에 딸린 작은 방이 이제 그의 거처다. “하산하신 게 아니네요. 여기도 지리산이잖아요?” 내가 묻자 그는 커피 물을 올리며 씨익 웃었다. “800(m)은 넘어야 산이지. 그리고 내가 비록 환경부 직원이지만 케이블카는 절대 반대야, 암 절대!” 그러고는 귀에서 무언가를 빼냈다. 보청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귀마개. 저잣거리에 내려가면 그 무수한 소음 때문에 귀가 아파 그가 고안한 것이었다.
창밖 피아골에 어둠이 짙게 내렸다. “노고단 산장에 처음 가서 내가 호롱불을 만들어 현관에 달아놨어요. 근데 작은 호롱불빛이 말이야, 멀리 화엄사 입구에서도 보여. 등불이라는 게 그렇더라고. 어둠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이 그걸 보고 찾아오는 거야. 길게 밝혀준다고 그걸 장명등이라고 하지.”
그의 말대로 빛이라는 게 그렇구나, 갑자기 우리는 숙연해졌다. 작은 일도 지극해지면 생명을 살리는 등불이 되는구나. 장명등. 그것이 그의 삶이었다. 돌아오는 길,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개구리들이 찻길을 떼지어 건너가고 있는 게 전조등 불빛에 보였다. 행여 치일까 차를 멈추고 겨울을 견뎌낸 그들을 보고 있자니 잔설은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지만 봄이 코앞으로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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