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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행복학교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6) 그곳에서 집을 마련하는 세 가지 방법

공지영 소설가경향신문
ㆍ“집세를 무슨 오만원씩이나, 보일러 놔 달라고 혀”

버들치 시인은 원래 전주 모악산에 살았다. 무당이 살다 버리고 간 곳이라는데 워낙 습하고 응달진 곳이라 장마철이면 벽에서 줄줄 물이 흘러내렸다. 그곳에서 자고 나면 늘 몸이 찌뿌드드하고 개운치 않았다. 그래도 버들치 시인은 공짜로 사는 게 어디냐며 봄이면 꽃도 심고 텃밭도 살뜰히 가꾸며 가을이면 붉은 아기 단풍잎을 창호지에 장식해 뽀얗게 문을 발라 겨울을 준비했다. 어느 해 여름 소설가 한 명과 방송국 PD 한 명이 찾아왔다. 이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실컷 책이나 읽으며 휴가를 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집을 내어주고 버들치 시인은 서울로 갔다. 산골 집에서 무공해의 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잘 해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이곳이 천국이여! 도시는 정말 싫다니께!” “그라제 아, 이 신선한 저녁 공기라니!” 그런데 문제는 어둠이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두 사람은 무언가가 스멀스멀 그들을 덮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 그들의 어깨가 굳어가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혼비백산 산을 내려왔다. 서로 비슷한 것을 느꼈다는 걸 아는 순간 등골로 소름이 쫘악! 훑어 내렸다고 그들은 말했다.

나중에 이 말을 들은 버들치 시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했다. “그려?……내가 처음 와서 한 삼 개월 괴롭히더니 그 뒤엔 지들이 나가떨어진 것 같던데 그새 또 왔는가, 어찐가.”

도사의 집은 그의 손이 닿기 전엔 허물어져가는 폐가였다. 이젠 거실, 침실, 사랑방에 연못과 정자까지 갖췄다. 주인 할머니도 최도사의 알뜰한 집 사랑에 두 손 들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여기서 지들이라 함은…내 생각엔 아마도 귀신이 아닌가 싶은데 어쨌든. 한번은 버들치 시인이 친구를 따라 점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그가 들어서자 갑자기 신들린 점쟁이가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일어났다고 했다. 그런 곳에 처음 간 시인이 놀라자 점쟁이가 말했다.

“거봐 명산대찰 다 찾아다녀봤자 소용 읎다니께. 왜 이제야 왔어. 우리 계의 큰어른 되실 분이.” 예쁘게 생긴 시인에게 어떻게 그런 면이 있어 그 무서운 귀신들을 물리쳤을까, 하고 나는 그후로도 오랫동안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시인은 드디어 그 집을 쫓겨난다, 귀신들보다 독한 사람들 때문이었다. 새만금 살리기 운동에 참여해 글도 발표하고 집회에 참여한 시인의 집에 “불을 확 싸지르겠다”는 협박 전화가 밀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험한 말은 입에 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애인 아닌 장애인으로 태어난 버들치 시인은 그때부터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독화살을 맞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정말로 누군가가 불을 싸지를까봐 겁에 질린 시인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것을 보고 지인들 네 다섯 명이 수를 냈다. 햇살 좋은 지리산 자락에 공짜로 살 빈 집이 났으니 이사를 오라는 것이었다. 실은 지인들이 추렴을 해서 빈집을 하나 사들였지만 시인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남에게 폐가 된다면 오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집 한편에 텃밭을 일구고 배추, 무, 고추, 시금치의 씨앗을 뿌렸다. 집 옆 개울가에는 애기 수련과 노랑 어린 연, 모악산에서 가져온 복수초, 얼레지, 노루귀, 하늘매발톱, 투구꽃을 심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그들에게 속삭였다. “여기가 낯설지? 그래도 잘 살 거야, 우리 잘 살자.” “동화를 써요 동화를!” 내가 놀리면 시인은 씨익 웃으며 햇살 좋은 툇마루에 앉아 생밤을 깎아주었다. 그 후로 우리 사이에서는 그저 주변 친구들을 잘 둬야 집이라도 한 채 얻는다니까 하는 말이 유행했다. 시인이 그 집이 실은 자기 명의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일 년 후의 일이었다.

한편 낙장불입 시인은 단돈 50만원을 가지고 지리산 자락에 온 후 그 돈으로 중고 오토바이를 하나 사고 역시 빈집으로 스며든다. 오토바이에 박스 하나를 실으면 그게 전 재산이니 훨훨 날아다녔다. 그런데 각시가 생기자 좀 번듯한 집이 필요했다. 구례 마고실에 그래도 부엌간이나 쓸 만한 집을 얻었는데 주인이 매달 오만원을 내라고 했다. 그도 각시도 물정에 어두워서 달라는 대로 한 달에 오만원을 주었다. 그러자 동네 할머니들이 들고 일어났다. “무슨 한 달에 오만원씩이나 받는다냐? 하늘이 무섭지도 안탸? 그 돈 받으려면 보일러 놔 달라고 혀.” 혹시나 하고 부부가 주인에게 말을 꺼내자, 주인은 몹시 양심에 찔렸다는 듯이 순순히 백만원짜리 보일러를 놔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마 후 비양심적인(?) 그 집을 떠나 문수골에 집을 구했다. 원래는 일년에 60만원을 내기로 계약했는데 이사를 가기 보름 전 낙 시인이 돈이 좀 모자란다고 하니 50만원으로 깎아 주었다. 그리하여 가끔 도시의 삶에 치이고 부대낄 때마다 나는 생각하곤 하는 것이었다. “50만원이면 돼. 일단 일 년은 지낼 수 있어. 그가 그랬듯이 그렇게 시작하면 되는 거야.”

긴 머리를 휘날리며 쌍계사 골짜기를 누비는 최도사. 그는 다 버리고 빈손으로 백두대간 탈 날을 꿈꾼다.

그런데 이 50만원의 기록은 어떤 강적의 출현으로 다시 한번 무너진다. 그가 언제 지리산 자락에 나타났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학력이 무엇인지 과거가 어땠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다만 그가 어느 날부터인가 길고 검은 생머리를 휘날리며 쌍계사 골짜기를 누비고 다니는 것을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그를 최도사라고 쓰고 도사 형,이라고 불렀다. “여기 오기 전에 뭐했어?” 내가 물으면 “살인하고 강간 빼고 다 해봤지!” 큰소리를 치다가 “에이, 뻥까지 마!” 하면 얼른 입을 꼭 다물어 버리는 숙맥이다. 가끔 내가 전화를 걸어 “도사 형, 나 이제 술 끊을까봐” 하면 정색을 하고 대꾸하곤 했다. “끊긴 뭘 끊어. 인생은 뭘 끊고 그러는 게 아니야. 뭐든 끊어지면 죽는 거야… 그저 줄여가야지.”

악양 평사리에서 주차요원을 하는 그는 주말에만 그것도 성수기 5개월만 일을 한다. 일당 오만원이고 그 일이 일년 내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연봉 200’은 확실하다고 행복해하는 그는 가끔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말이라도 걸라 치면 질색을 하고 말한다. “공사는 구별해야지. 나 지금 공무 중이야.”

언젠가 한 번 그가 내게 물었다. “안색이 나쁘다. 무슨 걱정 있나? “나 힘드네 형” 내가 말하면 최도사는 내 곁에 쭈그리고 앉아 곰곰 생각하다가 “마음을 비워야 힘이 안 들지 너 나보다 돈 많잖아” 했다. 그 무렵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내가 “나 빚 많아” 하자 그는 “빚은 지면 안 되지. 분수 안에서 살아야지” 했다. 이렇게 맞는 말을 할 수가!

그는 배낭 하나에 전 재산을 넣고 목포에서부터 출발해 백두대간 탐사를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 마흔. 하던 일을 접고 모든 것을 배낭 하나에 넣을 때까지의 일에 대해 그는 입을 다물었다. 목포와 해남 진도를 거쳐 광양을 들른 그는 우선 그는 최치원 선생이 귀를 씻었다는 세이암 근처에 텐트를 쳤다. 그런데 하필 그날 밤새 비가 퍼부었다. 불어난 계곡물을 피해 한 잠도 못자고 길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누군가 그를 잡아끌었다. 추운데 자기 집에 가서 묵어도 좋다는 것이었다. 고마웠다. 그런데 그는 주정뱅이였고 아침마다 술병으로 앓았다. 주정은 힘겨웠지만 앓는 그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그는 그 겨울을 거기서 보내고 혼자 독립해서 그 동네의 다른 빈집으로 들어간다. “장가는 왜 안 갔어?” 하고 물으면 “돈 벌기 싫어서!” 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게으른 것은 아니어서 그는 그 빈집을 조금씩 손보기 시작했다.

“낮에 해 긴데 놀면 모해? 살살 삽질하면 금방 연못 하나 만들고 화단도 만들어. 꽃이 참 이쁘지?” 쓰러져 가던 빈집은 그의 손길을 받자 금방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이라는 사람이 집을 비우라고 했다. 버리고 간 자기 집이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다며 별장으로 쓰겠다고 했다. 어차피 세상에 내 것이라곤 없는 법, 그는 거기서 더 윗마을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다시 폐가에 들어가 그 집을 아름답게 꾸몄다. 전주로 나가 노가다를 뛰어 그 돈으로 자재를 사가지고 돌아와 집을 고쳤다. 동네 노인들이 물었다. “자네 누군가? 누구 허락 맡고 이 집에 들어와 사나?” 그는 묵묵히 읍내로 나가 소주와 안주를 사왔다. 그리고 동네 정자에서 노인들께 술을 올렸다. 뭐 딱히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으니 심심하던 노인들은 순순히 그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젊은이들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는 도사다운 무술 솜씨로 그들과 맞짱을 떴고 그의 주먹세례를 맞고 여기저기 뻗어 있는 그들을 일으켜세워 다시 술을 샀다. 그러자 어느 날 주인이 나타났다. 서울 아들네로 올라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집을 둘러본 후 그 집 툇마루에 앉았다.

“누가 전화를 걸어 일 년에 30만원을 낼 테니 이 집에 살고 싶다고 했네.” 주인 할머니는 그의 기색을 살폈다. 무일푼인 그는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여기 와보니 자네가 이 집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네. 그냥 살게.”

세 칸짜리 그의 집에는 없는 게 없다. 거실 침실 그리고 사랑방에 연못과 정자까지! 그는 오늘도 그가 담근 산복숭아술을 우리에게 내놓고 취기가 오르면 먼 곳을 바라보며 말하곤 한다. “벽소령 넘어 백두대간을 탄다고 여기 온 지가 벌써 십 년이야. 돈 없이 살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필요없었는데 요즘 일년에 돈 백이라도 생기니 왜 이렇게 필요한 게 많은지 몰라. 언제 다시 다 버리고 빈손으로 벽소령을 넘어야 하는데! 꼭 넘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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