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절망이 데려간 곳… 그를 기다리는 중생의 손길
1997년 12월을 기억하시는지. 그해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겪어야 했고 기업들은 잡초 뽑듯이 약한 이들을 솎아버렸고 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은 어제보다 못사는 내일이 온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한민국 대표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를 열었다. 일찍이 시인으로 화려하게 등단하고 서울의 큰 신문사 기자가 되어 출세한 촌놈의 대표선수로 뽑혔던 낙장불입 시인은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서울역 노숙자들 틈에서 깨어나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화려한 10여년의 세월이 가고 그는 이제 다시 서울이 뱉어버린 실패한 촌놈의 대표선수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은 50만원. 그해가 다 가기 전 그는 한평생 한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어머니를 잃었고 직장에서 쫓겨났고 아내와 아이들과 이별을 했고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렸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때 그 기차에 오르면서 그가 겪었을 마음의 아픔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는 그 남행을 두고 “생애 처음으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무책임해지는 길이었으며, 분노와 환멸과 절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산 짐승이 마지막으로 가야 할 길”이었다고 표현했지만 말이다.
“왜 하필 지리산이었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묻자 그는 한동안 그냥 웃기만 했는데, 어느 날 작은 술잔을 앞에 두고 처음 입을 열었다.
“고향인 경상도 쪽에는 가고 싶지 않았고 도시는 싫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흔적을 좀 찾고 싶었어.”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는 반공 표어를 지어 대구까지 나가 큰 상을 받는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 보자.’ 우리들도 언젠가 한 번은 들었을 이 표어는 바로 낙장시인의 작품이었는데 대구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붙어 나부끼었고, 그는 상장을 들고 의기양양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언제나 그를 꼭 안아주며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얼굴은 그러나 기뻐하는 그 앞에서 아주 어두워졌다. 그는 그때부터 새벽마다 어머니가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위로 남매 둘을 낳고 남편을 잃었다. 아버지가 빨치산 전사 이현상을 따라 산에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수시로 경찰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집에 놔두고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끌려갔다. 그런데 빨치산이 모두 ‘토벌된’ 이후인 63년 그의 어머니는 낙장불입 시인을 낳는다. 경북의 보수적인 산골 집성촌에서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 여인과 그의 새끼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으신지. 일가붙이에게 화냥년이라고 머리채를 잡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머니는 아기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산한 뒤 죽은 걸로 되어 있던 남편이 살아서 다녀갔다고 하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물론 위로 두 남매마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렇게 낙장시인이 다 클 때까지 어머니는 스스로 자청한 주홍글씨를 가슴에서 떼지 않았다. 대신 늦게 태어난 낙장시인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 시인이 큰 상을 타온 날 어머니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슬픈 얼굴을 그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한 얼굴이 겹쳐졌다. 6살 무렵이던가 장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던 어린 그에게 다가왔던 한 남자. 이름을 묻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품에서 아주 작은 선물을 꺼내주던 사람. 그 사람이 낙오된 빨치산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탄광에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죽어갔던 아버지라는 것을 안 것은 아주 오랜 후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아버지가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으로 죽어가기 직전이었다는 것도. 어머니를 묻고 새로 이룬 가족을 잃고 그리고 직장에서마저 쫓겨난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지리산으로 온 것은 그러니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는 누군가 버리고 간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돌을 던지면 돌을 맞으며” 첫 삼년을 버틴다, 그는 그 삼년 동안 굶어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라고 했지만 나는 안다. 그곳이 지리산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가끔 그에게 편지가 왔다.
“두 끼를 굶었어. 지난밤에는 피아골의 나무가 소식을 보내왔지. ‘나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곧 절정이야’…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게임 고스톱을 치다보면 낙엽들이 ‘낙장불입, 낙장불입’ 하고 떨어지네… 때 이른 단풍 하나 주우려다 보니 인생이 낙장불입인 거 같아… 생각해보면 길을 잃었다고 뭐가 그리 대수일까, 잃어버렸다고 헤매는 그 길도 길인 것을.”
“추석 직후에는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죽은 빗점골에서 다래를 따와 술을 담갔어. 언제나처럼 술병에 날짜와 이름을 써넣었지. 그리운 이들, 선배 문인들, 술친구들,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들. 혹은 악연이었던 그 사람들……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알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술은 익어가고 내가 그들을 까맣게 잊은 날에도 술은 익어갈 것이며 나 혼자 그리움에 절절 매더라도 술은 익어가겠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마음이 아픈 이 글을 읽었던 동갑내기 동료인 나도 그러나 그 무렵 내 생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서울에서부터 품고 내려간 돈 50만원으로 장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25㏄짜리 낡은 중고 오토바이였다. 그는 그것을 타고 지리산 언저리를 누볐다. 많이 자고 많이 멍했고 안주도 없이 오래 혼자 술을 마셨고 그리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하루에 두 번 노고단 꼭대기를 오른 날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중생들에게 돌아오는 계기는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밥을 대놓고 먹는 -그러나 이것도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였다. 나머지는 그냥 소금을 넣은 주먹밥이나 라면으로 연명했다고- 밥집이 있었다. 이 주인 할머니는 밥 인심이 후해서 군인들이나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에게는 공깃밥 값을 따로 받지 않고 몇 그릇이고 더 퍼주곤 했다. 워낙 말이 없던 그가 어느 날 국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슬며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그가 의아해하자 할머니가 결심한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고 했다.
“선상님 이제 그만하면 공부 많이 하신 것 같은디 손금 좀 봐주셔.”
그는 그제야 머리와 수염이 잡초처럼 자라나 있고 비쩍 마른 몸뚱이가 누가 봐도 도를 닦는 산사람의 몰골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할머니는 눈물지으며 다시 말했다.
“선상님 도가 너무 높으셔서 아무한테나 말씀을 안 해 주시는 모냥인디 우리 아들놈 사람 좀 만들어 주씨요 잉. 그 화상이 허라는 짓은 안허고 날마다 놀러만 댕기는디 지난 가실에는 군불 때게 낭구 좀 해오라고 했더니 집 마당의 20년 된 흑감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들었잖요. 저 베라 먹을 놈이.”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 할머니는 시인 주려고 내온 막걸리를 당신이 마시며 울었다. 딱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낙장시인이 우물거리자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우리 아들놈 한글이라도 갈켜주씨요 잉. 한글이라도 알아야 사람구실을 허지 않겄소.”
버젓이 운전면허 따서 운전까지 하고 다니는 그가 어떻게 문맹일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낙장불입 시인은 다음날 그 아들을 길에서 만났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전봇대에 붙은 ‘불조심’이라고 씌어진 표어를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여기 뭐라고 씌어 있는지 한 번 읽어볼래?” 그러자 서른이 다된 아들은 거만한 표정으로 표어를 읽었다. “전, 봇, 대!”
이래저래 그의 인생에 표어가 중요하긴 한가보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때부터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 속으로 조금씩 스미기 시작한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를 지나 법왕리 신흥마을에 이르는 지리산 자락에는 드넓은 야생 차밭이 펼쳐져 있다. 전남 보성 차밭처럼 가지런하지는 않지만 소박하고 넉넉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원규 시인 촬영
1997년 12월을 기억하시는지. 그해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을 겪어야 했고 기업들은 잡초 뽑듯이 약한 이들을 솎아버렸고 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사람들은 어제보다 못사는 내일이 온다는 것을 알았으며 대한민국 대표 사형수였던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국민의 정부를 열었다. 일찍이 시인으로 화려하게 등단하고 서울의 큰 신문사 기자가 되어 출세한 촌놈의 대표선수로 뽑혔던 낙장불입 시인은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서울역 노숙자들 틈에서 깨어나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화려한 10여년의 세월이 가고 그는 이제 다시 서울이 뱉어버린 실패한 촌놈의 대표선수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의 수중에 있던 돈은 50만원. 그해가 다 가기 전 그는 한평생 한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겪어낸 어머니를 잃었고 직장에서 쫓겨났고 아내와 아이들과 이별을 했고 그리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렸다.
아직까지도 나는 그때 그 기차에 오르면서 그가 겪었을 마음의 아픔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는 그 남행을 두고 “생애 처음으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무책임해지는 길이었으며, 분노와 환멸과 절망과 투쟁으로 점철된 삶을 산 짐승이 마지막으로 가야 할 길”이었다고 표현했지만 말이다.
“왜 하필 지리산이었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내가 묻자 그는 한동안 그냥 웃기만 했는데, 어느 날 작은 술잔을 앞에 두고 처음 입을 열었다.
“고향인 경상도 쪽에는 가고 싶지 않았고 도시는 싫었고… 그리고 아버지의 흔적을 좀 찾고 싶었어.”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는 반공 표어를 지어 대구까지 나가 큰 상을 받는다. ‘오랜만에 오신 삼촌 간첩인가 다시 보자.’ 우리들도 언젠가 한 번은 들었을 이 표어는 바로 낙장시인의 작품이었는데 대구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붙어 나부끼었고, 그는 상장을 들고 의기양양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언제나 그를 꼭 안아주며 사랑해주던 어머니의 얼굴은 그러나 기뻐하는 그 앞에서 아주 어두워졌다. 그는 그때부터 새벽마다 어머니가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의 위로 남매 둘을 낳고 남편을 잃었다. 아버지가 빨치산 전사 이현상을 따라 산에 들어가버린 것이었다. 수시로 경찰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고 아니면 어린아이들을 집에 놔두고 어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끌려갔다. 그런데 빨치산이 모두 ‘토벌된’ 이후인 63년 그의 어머니는 낙장불입 시인을 낳는다. 경북의 보수적인 산골 집성촌에서 아비 없는 아이를 낳은 여인과 그의 새끼들이 당한 고통을 짐작할 수 있으신지. 일가붙이에게 화냥년이라고 머리채를 잡혀 온갖 수모와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머니는 아기 아버지에 대해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입산한 뒤 죽은 걸로 되어 있던 남편이 살아서 다녀갔다고 하면 새로 태어난 아이는 물론 위로 두 남매마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렇게 낙장시인이 다 클 때까지 어머니는 스스로 자청한 주홍글씨를 가슴에서 떼지 않았다. 대신 늦게 태어난 낙장시인을 끔찍이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 시인이 큰 상을 타온 날 어머니는 세상에 태어나 가장 슬픈 얼굴을 그에게 보여준 것이었다. 그리고 한 얼굴이 겹쳐졌다. 6살 무렵이던가 장에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며 빈집을 지키던 어린 그에게 다가왔던 한 남자. 이름을 묻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품에서 아주 작은 선물을 꺼내주던 사람. 그 사람이 낙오된 빨치산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탄광에 들어가 이름을 바꾸고 죽어갔던 아버지라는 것을 안 것은 아주 오랜 후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아버지가 탄광에서 얻은 진폐증으로 죽어가기 직전이었다는 것도. 어머니를 묻고 새로 이룬 가족을 잃고 그리고 직장에서마저 쫓겨난 그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지리산으로 온 것은 그러니 너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낙장불입’ 시인은 이따금 섬진강변에서 야영을 한다. 낡은 오토바이가 그의 벗이다.
“두 끼를 굶었어. 지난밤에는 피아골의 나무가 소식을 보내왔지. ‘나 절정이야. 혁명도 없이 희망도 없이 내 몸은 곧 절정이야’… 밤새 단풍나무 벗 삼아 게임 고스톱을 치다보면 낙엽들이 ‘낙장불입, 낙장불입’ 하고 떨어지네… 때 이른 단풍 하나 주우려다 보니 인생이 낙장불입인 거 같아… 생각해보면 길을 잃었다고 뭐가 그리 대수일까, 잃어버렸다고 헤매는 그 길도 길인 것을.”
“추석 직후에는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죽은 빗점골에서 다래를 따와 술을 담갔어. 언제나처럼 술병에 날짜와 이름을 써넣었지. 그리운 이들, 선배 문인들, 술친구들, 한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들. 혹은 악연이었던 그 사람들……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알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술은 익어가고 내가 그들을 까맣게 잊은 날에도 술은 익어갈 것이며 나 혼자 그리움에 절절 매더라도 술은 익어가겠지.”
지금 다시 떠올려도 마음이 아픈 이 글을 읽었던 동갑내기 동료인 나도 그러나 그 무렵 내 생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서로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그가 서울에서부터 품고 내려간 돈 50만원으로 장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125㏄짜리 낡은 중고 오토바이였다. 그는 그것을 타고 지리산 언저리를 누볐다. 많이 자고 많이 멍했고 안주도 없이 오래 혼자 술을 마셨고 그리고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하루에 두 번 노고단 꼭대기를 오른 날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중생들에게 돌아오는 계기는 그러나 뜻밖의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밥을 대놓고 먹는 -그러나 이것도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였다. 나머지는 그냥 소금을 넣은 주먹밥이나 라면으로 연명했다고- 밥집이 있었다. 이 주인 할머니는 밥 인심이 후해서 군인들이나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에게는 공깃밥 값을 따로 받지 않고 몇 그릇이고 더 퍼주곤 했다. 워낙 말이 없던 그가 어느 날 국밥을 먹고 있는데 주인 할머니가 시키지도 않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슬며시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런 일은 처음이라 그가 의아해하자 할머니가 결심한 듯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고 했다.
“선상님 이제 그만하면 공부 많이 하신 것 같은디 손금 좀 봐주셔.”
그는 그제야 머리와 수염이 잡초처럼 자라나 있고 비쩍 마른 몸뚱이가 누가 봐도 도를 닦는 산사람의 몰골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자 할머니는 눈물지으며 다시 말했다.
“선상님 도가 너무 높으셔서 아무한테나 말씀을 안 해 주시는 모냥인디 우리 아들놈 사람 좀 만들어 주씨요 잉. 그 화상이 허라는 짓은 안허고 날마다 놀러만 댕기는디 지난 가실에는 군불 때게 낭구 좀 해오라고 했더니 집 마당의 20년 된 흑감나무를 베어 땔감을 만들었잖요. 저 베라 먹을 놈이.”
남편도 없이 아들 하나만 믿고 살아온 할머니는 시인 주려고 내온 막걸리를 당신이 마시며 울었다. 딱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낙장시인이 우물거리자 할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럼 우리 아들놈 한글이라도 갈켜주씨요 잉. 한글이라도 알아야 사람구실을 허지 않겄소.”
버젓이 운전면허 따서 운전까지 하고 다니는 그가 어떻게 문맹일 수가 있을까 싶었는데 낙장불입 시인은 다음날 그 아들을 길에서 만났다.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전봇대에 붙은 ‘불조심’이라고 씌어진 표어를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여기 뭐라고 씌어 있는지 한 번 읽어볼래?” 그러자 서른이 다된 아들은 거만한 표정으로 표어를 읽었다. “전, 봇, 대!”
이래저래 그의 인생에 표어가 중요하긴 한가보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때부터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 속으로 조금씩 스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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