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 소설가ㅣ경향신문
ㆍ소주잔 위로 매화꽃이 분분한데 딱, 거기 눌러살고 싶더란 말이지…
몇 년 전부터 나는 편집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을 방문했었다. 내 친구 두 사람-그들의 이름은 낙장불입과 버들치 시인이다-에게 그들의 삶을 써보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뭐 딱히 그러지 않겠다고도 그러겠다고도 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편집자들도 나와 함께 내려갈 때는 기세 좋게 기획안을 짜고 이것저것 자문하다가도 막상 지리산 피아산방이나 심원제 황토방에 앉아 술이 몇 잔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네들이 여기 왜 왔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내가 데리고 간 어떤 기자는 한 번도 기타를 쳐 본 일이 없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밤새 기타를 튕기기도 했다. (괴로웠다!) 그리하여 정 그렇다면 그냥 내가 그걸 쓰겠다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리로 내려갈 때는 취재노트와 카메라 등을 챙겨 맑은 정신으로 출발했다가 하루만 지나면 뭐 꼭 그걸 글로 써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연재 시작을 앞둔 지난주 섬진강 망덕 포구에서 손바닥보다 큰 벚굴을 구워 먹는데 비는 내리고 고만 딱, 거기 눌러앉아 살고 싶었다. 옆에 앉은 버들치 시인에게 내가 물었다.
“형, 나 글이고 뭐고. 그냥 여기서 소주 마시고 바다나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자 사람 좋은 그는 너라고 왜 안 그렇겠냐는 듯 대답했다. “그려……………지영아……………내가……………왜…요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는 말 사이에 말보다 긴 뜸을 들이므로 앞으로는 위에 쓴 … 부호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DVD를 3배속으로 재생하듯 그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내가 왜 시를 못 쓰는 줄 아니? 내 시의 바탕이 슬픔인데 여기 지리산에 온 이후로 그게 자꾸 없어져. 그래서 시가 안 되는 거야. 사람들은 말하지. 그럼 기쁜 이야기를 써라. 행복하다고 말이야. 그런데 기쁘고 행복한데 어떤 놈이 시를 쓰겠냐고.”
그랬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나와 지리산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선 내 등반의 역사는 1982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때 해외 원정까지 다니는 베테랑 산악인 네 명(그 등반가 중 한명이 내 친구 오빠였기 때문이다), 내 친구와 함께 설악산으로 첫 산행을 했다. 그들은 내설악으로 들어서더니 남들이 다니는 길은 재미가 없다며 스스로 길을 내며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향해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등산화도 없이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 입고 그들을 따라가던 나는 급기야 산중턱에서 엉엉 울면서 제발 어린 저의 앞날을 보셔서 저 혼자 도로 산을 살살 내려가게 허락해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나는 절벽을 훌쩍훌쩍 건너뛰는 산행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 가운데 한 명이 거의 나를 업다시피 해서 대청봉까지 올라가긴 했는데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내 발로 걷는 등반은 사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산행이 바로 이 지리산이었다. 벌써 25년 전쯤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일부터 꼭 운동을 하자”는 결심은 굳건해서 나는 호기롭게 지리산으로 떠났다. 서울역에서 밤기차를 탔고 밤새 기차 안에서 소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새벽녘 구례구역에 내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우리의 리더였던 형이 역 앞에서 모두에게 할당된 먹거리를 체크했다. 문제는 그 형의 부인이었다. 그들의 문답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쌀은?” “어머!” “김치는?” “어머!” “장조림은?” “어머!” “마늘장아찌는?” “어머! 그런 것도 가져와야 해?” “그럼 당신 뭘 가져왔는데?” “칫솔하고 옷하고 수건하고 샴푸, 초콜릿, 과자 조금 하고…화내지 마. 나 원래 몸 약하잖아.”
부인을 사랑하는 착한 리더 형은 입을 꾹 다문 채 뚜벅뚜벅 걸어가 가게에서 라면 스무 개를 사더니 제 배낭에 넣고 앞장을 섰다. 그때만 해도 일반 가게에서 통조림 외에 밑반찬은 거의 살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점심을 짓기 위해 버너에 불을 붙였다. 리더 형은 말했다. “우리가 쌀도 반찬도 안 가지고 온 주제에 호사스러운 식사를 할 수는 없다. 속죄하는 의미에서 지금부터 라면만 먹는다.”
자존심 센 그가 미안해서 그런다는 걸 뭐라 더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감자에 당근에 감자, 두부, 깻잎에 카레, 쌀, 고등어통조림, 꽁치통조림, 참치, 골뱅이통조림, 고추장, 초고추장, 된장, 쌈장, 버너, 코펠, 침낭, 텐트, 게다가 산에서도 음악은 들어야 한다며 작은 카세트리코더까지 넣은 내 배낭이 너무 무거웠다. 선배의 부인은 가벼운 배낭을 폴락폴락하며 내 앞에서 “지영씨 생각보다 참 못 걷는다” 하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둘러보아도 나를 업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은 물론 잘못하다가는 원래 연약한 선배 부인을 튼튼한 네가 업고 가라 할까봐 겁이 나서 눈물 같은 땀을 흘리며 일단 정상까지 올라는 갔다. 전날 밤 반찬 만든다고 잠 못 자고, 기차 타고 오느라 못 자고 생전 안 오르던 산까지 탄 데다 두 끼 연속 라면만 먹고 나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깊은 기침이 나오며 가래에 피까지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다음날 아침도 참회의 의미로 라면을 먹고 종주를 시작하는데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날 저녁, 나는 리더 형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건의했다.
“내가 참치김치찌개 해줄게, 밥해서 그걸 먹자 형.”
그러자 리더 형은 감동하는 듯 눈물이 핑 돈 눈으로 말했다.
“넌 너무 착하구나. 그러나 안돼, 너무 먹고 싶지만 그건 염치없는 짓이야.”
그도 착하고 나도 착하고 일행도 너무 착했다. 자기네가 안 가져왔으면 자기네들이나 라면을 먹지 왜 우리까지 못 먹게 하는지 아무도 따져 묻지 않았다. 셋째 날이 되자 마음의 열은 물론이고 신체의 열까지 올랐고 이제 나는 이 무리한 산행을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 고산병 걸린 거 같아…내려가야겠어.”
우리 일행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뭐라고? 여기 해발 1700m야 무슨 고산병? 너 심해어족(深海魚族) 출신이냐?”
“안 그래도 어제부터 하반신에만 하얀 비늘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라면을 계속 먹으면 변신하는 거 같아.”
그리하여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러고 보니 요즘 기후변화로 인해 기압도 들쑥날쑥한다는데 왠지 우리도 고산병인 듯하다”고 횡설수설하더니 하산을 결심했다. 그 부부도 더 먹을 것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쌍계사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놀다가 서울로 올라왔고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내 산행은 거의 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였다. 7년 동안 친구들과 거의 접촉 없이 살았던 나는 그 즈음 겨우 막 외출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심히 기자 친구의 취재차에 올라타 지리산 어귀로 왔다. 서울은 깊은 겨울이었는데 희디 흰 매화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자 꿈 같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 버들치 시인의 집으로 갔다. 그 밤 우리가 마시는 소주잔 위로 매화꽃이 분분했고 매화 향기는 봄 바람을 타고 쿵작작 쿵작작 삼박자로 우리 주위를 감쌌다. 그 집 황토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매화나무는 햇살 아래 서서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가슴 한 편이 쓰라리기 시작했던 것은 내 상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감각을 넘어 통증을 느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우선 이 글은 지리산을 오르락내리락한 사람의 글이 아님을 짐작하셨으리라. 다시 말해 지리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지리산을 등에 지고 섬진강을 내다보며 옹기종기 살고 있는 내 친구들과 그 이웃에 대한 글이니까 말이다. 원래 아무개의 뭐 뭐, 라는 식의 제목을 몹시 싫어하는 나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딱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가 맞다.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쓰겠지만 편의상 신원을 다는 밝히지 않을 것이고 어려운 이야기는 본인의 동의가 없는 한 각색될 것이다. 굳이 그들이 누군가 알려고 하지 않으시면 더 좋겠다. 다만 거기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느긋하게 그러나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이들이 도시의 자욱한 치졸과 무례와 혐오에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려고 하는 그때, 든든한 어깨로 선 지리산과 버선코처럼 고운 섬진강 물줄기를 떠올렸으면 한다. 거기서 정직하게 살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혹여 잠시의 미소와 휴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이 거기서 어떻게 돈 없이도 잘, 그것도 아주 잘, 살고 노는지 저와 함께 지켜보시기를.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직 기미도 보이지 않으나 곧 닥쳐올 이 봄처럼 말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편집자들을 데리고 지리산을 방문했었다. 내 친구 두 사람-그들의 이름은 낙장불입과 버들치 시인이다-에게 그들의 삶을 써보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뭐 딱히 그러지 않겠다고도 그러겠다고도 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편집자들도 나와 함께 내려갈 때는 기세 좋게 기획안을 짜고 이것저것 자문하다가도 막상 지리산 피아산방이나 심원제 황토방에 앉아 술이 몇 잔 들어가기만 하면 자기네들이 여기 왜 왔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내가 데리고 간 어떤 기자는 한 번도 기타를 쳐 본 일이 없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밤새 기타를 튕기기도 했다. (괴로웠다!) 그리하여 정 그렇다면 그냥 내가 그걸 쓰겠다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리로 내려갈 때는 취재노트와 카메라 등을 챙겨 맑은 정신으로 출발했다가 하루만 지나면 뭐 꼭 그걸 글로 써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연재 시작을 앞둔 지난주 섬진강 망덕 포구에서 손바닥보다 큰 벚굴을 구워 먹는데 비는 내리고 고만 딱, 거기 눌러앉아 살고 싶었다. 옆에 앉은 버들치 시인에게 내가 물었다.
“형, 나 글이고 뭐고. 그냥 여기서 소주 마시고 바다나 보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자 사람 좋은 그는 너라고 왜 안 그렇겠냐는 듯 대답했다. “그려……………지영아……………내가……………왜…요즘…………….”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는 말 사이에 말보다 긴 뜸을 들이므로 앞으로는 위에 쓴 … 부호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DVD를 3배속으로 재생하듯 그의 말을 옮기면 이렇다. “내가 왜 시를 못 쓰는 줄 아니? 내 시의 바탕이 슬픔인데 여기 지리산에 온 이후로 그게 자꾸 없어져. 그래서 시가 안 되는 거야. 사람들은 말하지. 그럼 기쁜 이야기를 써라. 행복하다고 말이야. 그런데 기쁘고 행복한데 어떤 놈이 시를 쓰겠냐고.”
그랬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나와 지리산의 인연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선 내 등반의 역사는 1982년 여름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때 해외 원정까지 다니는 베테랑 산악인 네 명(그 등반가 중 한명이 내 친구 오빠였기 때문이다), 내 친구와 함께 설악산으로 첫 산행을 했다. 그들은 내설악으로 들어서더니 남들이 다니는 길은 재미가 없다며 스스로 길을 내며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을 향해 등반을 하기 시작했다. 등산화도 없이 청바지에 반팔 티셔츠 입고 그들을 따라가던 나는 급기야 산중턱에서 엉엉 울면서 제발 어린 저의 앞날을 보셔서 저 혼자 도로 산을 살살 내려가게 허락해달라고 애원하기에 이르렀다. 고소공포증까지 있는 나는 절벽을 훌쩍훌쩍 건너뛰는 산행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결국 그 가운데 한 명이 거의 나를 업다시피 해서 대청봉까지 올라가긴 했는데 아무튼 그 이후로 나는 내 발로 걷는 등반은 사양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산행이 바로 이 지리산이었다. 벌써 25년 전쯤 이야기일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일부터 꼭 운동을 하자”는 결심은 굳건해서 나는 호기롭게 지리산으로 떠났다. 서울역에서 밤기차를 탔고 밤새 기차 안에서 소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새벽녘 구례구역에 내릴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우리의 리더였던 형이 역 앞에서 모두에게 할당된 먹거리를 체크했다. 문제는 그 형의 부인이었다. 그들의 문답은 이렇게 진행되었다. “쌀은?” “어머!” “김치는?” “어머!” “장조림은?” “어머!” “마늘장아찌는?” “어머! 그런 것도 가져와야 해?” “그럼 당신 뭘 가져왔는데?” “칫솔하고 옷하고 수건하고 샴푸, 초콜릿, 과자 조금 하고…화내지 마. 나 원래 몸 약하잖아.”
부인을 사랑하는 착한 리더 형은 입을 꾹 다문 채 뚜벅뚜벅 걸어가 가게에서 라면 스무 개를 사더니 제 배낭에 넣고 앞장을 섰다. 그때만 해도 일반 가게에서 통조림 외에 밑반찬은 거의 살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잠시 후 우리는 점심을 짓기 위해 버너에 불을 붙였다. 리더 형은 말했다. “우리가 쌀도 반찬도 안 가지고 온 주제에 호사스러운 식사를 할 수는 없다. 속죄하는 의미에서 지금부터 라면만 먹는다.”
자존심 센 그가 미안해서 그런다는 걸 뭐라 더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라면을 먹고 일어서려는데 감자에 당근에 감자, 두부, 깻잎에 카레, 쌀, 고등어통조림, 꽁치통조림, 참치, 골뱅이통조림, 고추장, 초고추장, 된장, 쌈장, 버너, 코펠, 침낭, 텐트, 게다가 산에서도 음악은 들어야 한다며 작은 카세트리코더까지 넣은 내 배낭이 너무 무거웠다. 선배의 부인은 가벼운 배낭을 폴락폴락하며 내 앞에서 “지영씨 생각보다 참 못 걷는다” 하며 걸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둘러보아도 나를 업어줄 사람이 한 명도 없음은 물론 잘못하다가는 원래 연약한 선배 부인을 튼튼한 네가 업고 가라 할까봐 겁이 나서 눈물 같은 땀을 흘리며 일단 정상까지 올라는 갔다. 전날 밤 반찬 만든다고 잠 못 자고, 기차 타고 오느라 못 자고 생전 안 오르던 산까지 탄 데다 두 끼 연속 라면만 먹고 나자 머리가 어질거렸다. 그러자 다음날부터 깊은 기침이 나오며 가래에 피까지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평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다음날 아침도 참회의 의미로 라면을 먹고 종주를 시작하는데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날 저녁, 나는 리더 형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건의했다.
“내가 참치김치찌개 해줄게, 밥해서 그걸 먹자 형.”
그러자 리더 형은 감동하는 듯 눈물이 핑 돈 눈으로 말했다.
“넌 너무 착하구나. 그러나 안돼, 너무 먹고 싶지만 그건 염치없는 짓이야.”
그도 착하고 나도 착하고 일행도 너무 착했다. 자기네가 안 가져왔으면 자기네들이나 라면을 먹지 왜 우리까지 못 먹게 하는지 아무도 따져 묻지 않았다. 셋째 날이 되자 마음의 열은 물론이고 신체의 열까지 올랐고 이제 나는 이 무리한 산행을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미안해, 나 고산병 걸린 거 같아…내려가야겠어.”
우리 일행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뭐라고? 여기 해발 1700m야 무슨 고산병? 너 심해어족(深海魚族) 출신이냐?”
“안 그래도 어제부터 하반신에만 하얀 비늘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라면을 계속 먹으면 변신하는 거 같아.”
그리하여 산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나머지 두 사람은 “그러고 보니 요즘 기후변화로 인해 기압도 들쑥날쑥한다는데 왠지 우리도 고산병인 듯하다”고 횡설수설하더니 하산을 결심했다. 그 부부도 더 먹을 것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쌍계사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놀다가 서울로 올라왔고 뭐 그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부터 내 산행은 거의 다 현대문명의 이기를 이용한 것이었다.
폭설 뒤 맑게 갠 하늘 아래 지리산.
그리고 다시 지리산을 찾은 것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였다. 7년 동안 친구들과 거의 접촉 없이 살았던 나는 그 즈음 겨우 막 외출을 시작하고 있었다. 무심히 기자 친구의 취재차에 올라타 지리산 어귀로 왔다. 서울은 깊은 겨울이었는데 희디 흰 매화꽃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자 꿈 같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 버들치 시인의 집으로 갔다. 그 밤 우리가 마시는 소주잔 위로 매화꽃이 분분했고 매화 향기는 봄 바람을 타고 쿵작작 쿵작작 삼박자로 우리 주위를 감쌌다. 그 집 황토방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매화나무는 햇살 아래 서서 나를 보고 환히 웃었다. 가슴 한 편이 쓰라리기 시작했던 것은 내 상처가 꿈틀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감각을 넘어 통증을 느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니까 말이다.
우선 이 글은 지리산을 오르락내리락한 사람의 글이 아님을 짐작하셨으리라. 다시 말해 지리산에 대한 글이 아니라 지리산을 등에 지고 섬진강을 내다보며 옹기종기 살고 있는 내 친구들과 그 이웃에 대한 글이니까 말이다. 원래 아무개의 뭐 뭐, 라는 식의 제목을 몹시 싫어하는 나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은 딱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가 맞다.
많은 친구의 이야기를 쓰겠지만 편의상 신원을 다는 밝히지 않을 것이고 어려운 이야기는 본인의 동의가 없는 한 각색될 것이다. 굳이 그들이 누군가 알려고 하지 않으시면 더 좋겠다. 다만 거기서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느긋하게 그러나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이들이 도시의 자욱한 치졸과 무례와 혐오에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려고 하는 그때, 든든한 어깨로 선 지리산과 버선코처럼 고운 섬진강 물줄기를 떠올렸으면 한다. 거기서 정직하게 살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가 혹여 잠시의 미소와 휴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이 거기서 어떻게 돈 없이도 잘, 그것도 아주 잘, 살고 노는지 저와 함께 지켜보시기를. 어쩌면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우리에게 다가올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직 기미도 보이지 않으나 곧 닥쳐올 이 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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