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원 실크로드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50)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신비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경향신문
  • 빼어난 조형문화… 어찌 야만·변방인가

    기원전 수세기 동안 북방 유라시아 대륙을 풍미하던 스키타이의 문화, 특히 휘황찬란한 미술공예의 신비에 관해서는 아직껏 많은 수수께끼가 입방아를 찧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서구문명 중심주의에 의해 문명권에서 소외된 북방 유목기마민족 문화를 하나의 새로운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스키타이 문화에 관해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장 몇 곳을 돌아보기는 했지만, 유물을 종합적으로 관조할 수 있는 기회는 종시 차려지지 않았다. 그러던 차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스키타이관을 찾게 된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내의 미술전시관들은 관람객들로 붐비지만, 웬일인지 이 스키타이관만은 한산한 편이다. 덕분에 유물을 꼼꼼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유물과 더불어 몇 가지 기록에 의해 스키타이 정체가 점차 밝혀지고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아가 그들을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탄 채로 줄지어 엄습하는 잔인한 북방 민족으로 묘사하고 있다. 같은 시기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 새겨진 에사르하돈 왕(기원전 681~669년 재위)의 연대기에는 그들을 ‘이슈구(쿠)자이’라고, 그리고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스키타이와의 교역을 시작한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스키타이’ 혹은 ‘스키테스’라고 부른다. 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은 스스로를 ‘스콜로텐’ 혹은 ‘슈크’라고 칭한다. ‘이슈구(쿠)자이’나 ‘스키타이’는 이러한 ‘스콜로텐’이나 ‘슈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금제 여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사진 왼쪽). 금제 남자 얼굴상(옷 장식용,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의 시조와 인종 및 본향에 관해서는 이견이 구구하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명저 <역사>에서 스키타이의 시조에 관해 두 가지 전설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타르기타오스란 시조인데, 그의 아버지는 태양신 제우스이고 어머니는 보리스테네스 강(현 드네프르 강)을 낀 땅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헤라클레스가 드네프르 강 연안에 있는 울창한 삼림지대인 힐라에아에 살던 사녀(蛇女, 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뱀)와 동거해 낳은 셋째 아들 ‘스키테스’가 바로 스키타이 시조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상징적인 전설에서 공통되는 점은 시조의 출현이 드네프르 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인종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신명(神名)이나 인명, 지명 등을 감안하면 스키타이어는 인도-유럽 어족의 인도-이란 어군 중 동이란 아어군(亞語群)에 속한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인종적 혼합을 많이 겪어왔지만, 원초적 인종은 이란인의 한 계통이라는 데 견해가 모아지고 있다.

    스키타이 무사들의 전투 장면을 새긴 금제 빗(기원 전 4세기).

    스키타이의 본향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동쪽으로부터의 서진설이다. 이 설에 의하면 그들은 아락세스 강(현 볼가 강) 동쪽에 살다가 중앙아시아의 일족인 마사게타의 공격을 받자 강을 건너 흑해 북안에 진출한다. 그러자 원주민 킴메르인들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그들을 추격하던 끝에 근동 지방에 이른다. 당시 여러 세력들 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혼란한 상태를 틈타 스키타이는 근동지방을 손쉽게 장악하고 28년간이나 통치한다.

    이러한 시조나 인종 및 본향을 가진 스키타이의 형질적 용모는 대체로 우람한 체구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턱수염이 더부룩하다. 키는 계층에 따라 다른데, 상층부는 비교적 큰 편(176~180㎝)이나 평민은 중위(약 164㎝)에 머문다. 귀를 덮는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쓰고 헐렁한 통바지에 버선 모양의 가죽 단화를 신고 전개형(카프탄·앞이 트인 형)의 짧은 상의에 허리띠를 졸라맨 모습은 흡사 고구려인의 옷맵시를 연상케 한다.

    철검과 금제 칼집(기원전 7~6세기, 사진 왼쪽). 길이 41.4㎝의 금제 말머리 꾸미개(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왕국은 왕족 스키타이가 다른 스키타이(유목이나 농경 스키타이)를 통솔하는 부족 연맹적 성격이 짙은 왕국이다. 말 위의 궁술가들인 스키타이는 가재도구를 실은 차를 집으로 삼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유목기마민족이다. 그들의 기동력이나 전투력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따라잡을 수가 없으며, 사회 전체가 군사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이라면 그들을 공격한 어떤 적도 그들로부터 도망갈 수 없고, 그들이 피하고자 하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다는 점이라고 자탄 어린 지적을 한 바 있다. 징병제를 근간으로 한 각 부족에게는 기마 전사단이 조직되어 있으며, 부족장은 언제나 진두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전투를 지휘하며 퇴각은 애당초 불허된다.

    스키타이의 무사정신과 승전욕, 그리고 형제애는 남다르다. 무사가 첫 번째 적을 죽이면 적의 피를 마시는 특별 의식을 거행하며, 살해된 적의 머리 가죽을 벗겨서는 무두질해 손수건이나 옷감으로 쓰기도 하고 말고삐에 매달아 과시하기도 한다. 그들은 손가락을 자르는 엄숙한 서약을 통해 의형제 관계를 맺고 상호 충절을 확인한다. 스키타이의 무사 정신이나 사회의 군사적 성격은 마구와 기마 전술용 무기가 발달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스키타이관에 전시된 유물 중에는 이를 증명하듯 안장, 가죽 등자, 청동제 갑옷, 짧은 활, 방패, 쌍날이 달린 아키나케스형 단검 등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띈다.

    청동제 투구(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의 종교의식은 토테미즘적이고 샤머니즘적이다. 그들은 자연현상을 의인화한 신과 동물을 숭배한다. 그러나 신을 위한 신전이나 조상(彫像)을 세우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전쟁신 아레스는 각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마른 장작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꼭대기에 아레스의 상징인 오래된 철검을 꽂는 의식을 매해 치른다. 종교적 의례로서의 희생이나 순장 흔적도 곳곳에서 보인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알려고 하지 않았지만, 스키타이는 인류에게 실로 풍부하고 값진 문화유산을 남겨놓았다. 그 가운데서 으뜸가는 것은 단연 신비의 경지에 이른 미술공예다. 조형 기법이나 소재, 문양, 용도, 그리고 외래문화의 영향 관계에 따라 미술공예사를 세분해 5기로 나누기도 하고, 또는 전·후 2기로 대별하기도 한다. 5분법은 기원전 8~7세기를 1기, 6세기를 2기, 5세기를 3기, 4세기를 4기, 3세기 이후를 5기로 나누는 분법이다. 2분법에서 전기는 기원전 8~5세기로 5분법의 제1·2·3기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아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주요 유물들이 쿠반 강 유역에 널려 있다. 후기는 기원전 4세기 이후로 5분법의 제4·5기에 해당하며, 주로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드네프르 강 유역에 유물이 집중되어 있다.

    사슴 모양의 금제 방패장식판(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특징은 동물의장의 신통한 발달과 황금을 비롯한 귀금속의 세공이다. 무구(武具)와 마구(馬具)와 함께 이른바 ‘스키타이 3요소’를 이루고 있는 동물의장(양식)은 원래 스키타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전승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스키타이인들이 나름대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독특한 예술 기법을 도입해 스키타이 특유의 동물의장을 창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물의장의 기원에 관해서는 북시베리아 삼림지대 기원설과 오리엔트 기원설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산양이라든가 사나운 들새와 날짐승 같은 사실적 야생동물이 주제로 많이 다루어진다. 이에 비해 후자의 경우에는 환상적이고 기괴한 동물들이 등장해 서로 싸우는 이른바 ‘동물투쟁’이 주 모티브를 이루고 있다. 스키타이는 이러한 북시베리아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리엔트의 동물투쟁 기법을 창의적으로 받아들여 독특한 동물의장을 안출하고 발전시켰다.

    사슴 모양의 방패 장식판 유물에서 보다시피 미술공예가들은 짐승들의 몸을 일정한 형태의 틀 안에 넣기 위해 기발한 형태로 동물의 몸통을 변형시키거나 압축함으로써 짐승이 가지는 힘과 탄력을 생생하게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들은 동물의 투쟁 장면을 모티브로 하여 동물의 몸을 좁은 공간에 압축시키고 그 표현을 도식화하고 편화(便化)해 동물의 힘을 강조하거나 과장하며, 그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상을 추구한다. 그것은 유목민이 본능적으로 간직하는 동물에 대한 관심과 관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 자신의 추상적 예술감각과 미감을 발산하고, 거기에 그리스 미술의 사실성과 오리엔트 미술의 환상성을 가미함으로써 신선하고 독특한 스키타이식 동물의장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스키타이 동물의장이 지닌 또 하나의 특색은 짐승 몸의 주요 마디나 근육 부분에 콤마형 또는 반달형 틀을 만들고 거기에 보석을 끼워 넣는 감입(嵌入) 기법을 쓰는 것이다. 본래 이 기법은 아시리아에서 시작해 스키타이가 받아들인 후 시베리아를 거쳐 중국 수원(綏遠·오르도스)으로, 더 나아가 한반도까지 파급되었던 것이다.

    지혜의 여신 얼굴이 새겨진 금제 장식품(기원전 4세기).

    지금까지 우리 학계에서는 스키타이 동물의장을 분석하면서 거기에 그들의 고원(高遠)한 우주관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을 제대로 밝혀내지 못했다. 그들은 우주가 수직으로 3개의 세계, 즉 상계(하늘)와 중계(땅), 하계(지하)로 구성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들은 이러한 공간적 우주 구조에 대응시켜 상계는 조류를, 중계는 굽동물(사슴·양·염소 등)을, 하계는 맹수나 어류, 파충류를 상징화해 동물의장을 꾸미는 슬기를 발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스키타이 신화에도 나오지만 굽동물이자 육식성 맹수이기도 한 멧돼지가 하계와 중계를 연결하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 밖에 상징성 동물인 그리핀은 맹수이지만 동시에 날개를 달고 있어 상계와 관련이 있는 동물로 둔갑한다.

    스키타이 미술공예는 이러한 동물의장과 함께 금을 비롯한 귀금속을 다량 사용한 것이 또 하나의 특색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금은 재질로서 영원불멸할 뿐만 아니라, 그 광채는 암흑과 불안을 몰아내는 광명과 상통한다고 하여 권력과 재력의 상징으로 삼아왔다. 가재를 수레에 싣고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 금은 가장 편리하고 안전한 재화다. 그리하여 스키타이, 특히 상층들은 장신구는 물론 의기(儀器)와 제기를 비롯해 방패나 칼자루, 칼집, 활집 같은 무기나 용기 및 도구도 금으로 장식하기에 급급해한다. 그리하여 3~4㎏의 순금제 공예품이 부장된 고분이 수두룩하게 발견되고 있다. 그들의 금속 세공품은 한결같이 모티브가 기발할 뿐만 아니라, 가공 기술 또한 일품이다. 현대의 기술로도 따라잡기 힘든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들이 사용한 이 많은 금은 도대체 어디서 구해왔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남부 카프카스의 콜키스 지방에서 사금이 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엄청난 양의 금 수요를 충당할 수는 도저히 불가능했을 터. 아마도 동방 무역을 통해 금의 원산지인 알타이 일원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추단된다.

    이와 같이 스키타이 미술공예의 이모저모를 스키타이관에서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유물은 되돌아가서 다시 보곤 하니 시간은 촉박할 수밖에 없다. 관리원의 종관을 알리는 독촉을 몇 번 듣고서야 문을 나섰다. 차창을 스치는 노을 비낀 네바 강 수면이 마냥 역사의 거울처럼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구석구석을 비춰준다. 어쩐지 뇌리에 진하게 투영되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그 화사한 그림들보다는 세진(世塵)이 켜켜이 쌓여있는 스키타이의 녹슨 유물들이다. 근 5000년 전에 신석기시대를 갓 벗어난 에게 해 지역의 문화를 이른바 ‘에게 문명’으로 정의하면서도 이보다 3000년 후에 눈부신 금속문화를 꽃피운 이 유목기마민족들의 문화는 문명 밖의 ‘미개’와 ‘야만’, ‘중심문화’를 멀리 떠난 ‘주변문화’로 얕잡아봤으니, 어리석음치고 더한 어리석음이 또 어데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