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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30)해방이 되자 난 하루종일 태극기를 그려 집집마다 나눠주었어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일제강점기 이야기를 선생님처럼 실감나게 들려준 분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이 겪은 식민지 경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끝나는 방식이었다고 한 브루스 커밍스의 말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해방은 어떻게 왔습니까?

고은=감격! 감격이란 단어보다 먼저 감격을 경험했어. 시학이나 시론에 훨씬 앞서 태초에 시가 있는 것처럼 말이네. 감격이란 하나의 춤이었어. 저절로 절로 나오는 춤이었어. 옛말에 절로 노래하고 절로 춤추네(自歌自舞)가 있는 것도 이런 감격의 맥락일 것이네.

김형수=세상의 모든 것, 대지와 동물, 풀과 나무, 바람과 물결이 일제히 몸을 흔드는, 그 움직임이 모두 춤이 되는 사태를 말씀하시는 거죠? 휘트먼이 언젠가 미국이 노래하는 걸 들었다고 했듯이 조선이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림 | 임옥상 화백

고은=1945년 8월15일에는 그래서 감탄사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표기할 때는 반드시 감탄부가 붙어야 했지. 한반도의 현대사의 절반은 3·1운동의 ‘3·1’에 이어 마침내 그것의 목적지인 ‘8·15’라는 역사의 기호를 이루어낸 것이지. 감격이 오랜 촌락 공동체의 자연부락에서 자라난 나의 본능에 불 지르는 내면의 화인(火印)의 명사이고 동사이고 형용사이고 부사였다면 또 하나의 단어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선포되는 기호였어. 해방 말이네.

김형수=한국인을 역사의 행위자로 승격시키는 발화점이 그렇게도 또렷했습니까?

고은=해방! 바로 이 해방이라는 단어야말로 전혀 미지로부터 내달려와서 내 고향의 앞산과 뒷동산에 그리고 마을 남녀노소의 오장육부와 4·5대 조상의 무덤 속 해골들을 언제 깨어날 줄 모르는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강제적이며 자발적인 사명을 뜻했어. 그래서 해방이라는 낱말이 입에 나오자마자 그 뒤에 감탄사가 붙어야 했다네. 그래서 해방이 곧 감격이고 감격이야말로 해방의 표현이었어.

김형수=쾌재라. 오오….

고은=해방은 파도쳤어. 해방은 하나가 아니라 전부였어. 해방은 집단이고 총체이고 공공과 보편의 명제였어. 해방은 나에게도 나 개인의 운명 첫걸음에도 해방이었고 삼천만 동포라는 민족 집단의 운명에도 새로운 역사 개막의 열린 마당이고 모든 사슬이 풀려버린 적나라한 신체들의 총화였어. 어디에서나 일장기에 먹물로 태극기를 맞든 틀리든 그려 넣어 그것을 뜨거운 8월의 공기 속에서 휘날리게 했어.

김형수=해방은 파도쳤어! 존재의 내부에서 생명이 춤추고 사유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표현입니다. 그래서 첫 발자국을 어디에 찍었습니까?

고은=나는 종이란 종이는 다 구해다가 하루 내내 태극기를 그려서 집집마다 나눠주었어. 내 그림 솜씨가 좀 있는 것이 마을에 알려졌으므로 지난날 화투 한 목씩 그려주고 몇 푼을 받았던 터이고 또 내가 그린 호랑이 그림이 몇 집의 안방 벽에 붙여진 일이 있으므로 해방이 되자마자 태극기 화가가 되어버린 셈이지.

김형수=단지 목격한 것이 아니라 그 환희의 행위자였네요. 한데, 시골 분위기도 그랬습니까?

고은=물론 우리 마을은 두메 중의 두메인지라 새 소식이 즉각 들려오는 곳이 아니었건만 해방이라는 이 위대한 사건이야말로 두메조차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개벽이었어. 일본 왕실 히로히토(裕仁)의 느릿느릿한 라디오 녹음방송 소식은 그것이 일본 쪽의 말로는 ‘옥음(玉音)’이든 조선 쪽의 말로 장타령이든, 8월15일 다음날 아침 나절 알게 되었어. 폭염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지며 집집마다 식구들이 다 쏟아져 나와 우리 집 뒤의 쇠정지 마루로 모여들어서 “해방이 됐다네” “일본이 항복했다네” “조선이 독립된다네” “정신대 복자도 순자도 돌아오고 군속 간 삼만이 아버지도 모집 간 맹모 아저씨도 며칠 있으면 돌아온다네” “아이고 일본 순사 사가와란 놈 꼴 안 보게 되었네 그려” 따위의 말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며 날 저무는 줄 몰랐어.

김형수=누군가 신바람의 바람은 바람의 ‘소리’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 신바람을 타면 입에서 노랫소리가 절로 나오고 다리가 기뻐서 춤을 춘다는 말과 함께요.

고은=우리 집 뒤의 쇠정지 국기게양대 밑에서 아버지랑 동네 아저씨들이랑 독립만세를 불렀어. 그러자 이집 저집에서 아낙네들이 몸뻬 차림 그대로 뛰어나와 만세를 불러댔어. 마치 기미 만세가 을유년의 만세로 이어진 것 같았어. 어린 나도 목이 쉬어 버렸지. 찬물 먹고 부르고 또 불렀지.

김형수=2002년 월드컵 때의 열기가 생각나요. 전기도 없고 연료도 귀하던 때인데.

고은=밤에도 모깃불 놓고 잠들 줄 몰랐지. 석유 없는 집들이야 아예 밤새도록 달빛 별빛 아니면 개똥벌레 빛이나 있을 뿐인데 그 어둠의 순수 속에서 잠을 자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지. 그래도 몇몇 집에서는 아껴오던 석유병 속에 등잔불 석유를 담아 한두 시간은 방안의 불빛이 있었지. 제삿날 밤이나 되어야 방 밖의 처마에 매단 장명등을 밝혀 제사상 받는 조상귀신께서 오시게 했는데 이런 불빛도 1943년 후반부터는 방공장막으로 불빛이 새어가지 못하게 검정 기름종이로 문짝을 가려야 했네. 해방이라는 말은 바로 그런 기름종이를 떼어내는 것을 뜻하기도 했어.

김형수=해방 직전의 대기는 어땠습니까? 개벽의 기미 같은 게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고은=그동안 하늘의 B-29 4발 폭격기가 일본인에게는 적기였으나 조선인의 속내로는 증오의 대상으로서의 적기가 아니었어. 나 역시 그 비행기의 은색을 공포의 대상이기보다 신기하다는 느낌으로 쳐다보았지. 이제 하늘에도 땅에도 대동아 성전(聖戰)이라는 그 역사 범죄로서의 전쟁은 끝장나서 한동안 진공상태가 되어 그 진공 속에 해방이라는 것, 독립이라는 것이 돌연히 당겨진 것이네.

김형수=아아, 농업사회에서 쳐다볼 것은 하늘밖에 없으니.

고은=그야말로 해방이라는 말은 바로 이제부터는 ‘밥’이라든가 ‘어머니’라든가 하는 말보다 더 많이 입에 달고 다녀야 하는 새로운 세상의 기호가 되었지. 무엇보다도 ‘국어’라는 말의 일본어 상용(常用)이 진짜 국어인 조선어 상용의 시대로 바뀐 것이 바로 해방의 시대를 뜻했네 그려.

김형수=선생님의 직립보행기, 그러니까 대략 1935년에서 1945년까지를 일본은 중공업단계라 하여 급속히 산업화를 진행시켰던 것 같아요. 각종 징집으로 엄청난 인구 이동과 이향(離鄕)이 일어났잖아요. 성인 인구의 절반이 고향에서 뿌리 뽑혔는데 그들의 음성은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들판의 푸성귀처럼요.

고은=만약 일제강점기 36년, 그 식민지 36년이라는 기간이 그 갑절인 70년 이상 혹은 100년쯤이었다면 그때까지 죽어가면서 그 명맥이나마 한반도 산야의 어느 골짝에 남아있던 조선어는 사어(死語)로 되고 말았을지도 모르지. 이런 사실은 세계 언어사상 수많은 언어가 사멸과 생성 그리고 수많은 변화를 거듭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아찔한 노릇이지. 그것은 오늘날 세계화 시대에 영어와 중국어 등 지배언어의 기세로 인해 지금은 비록 세계 10위권의 당당한 한글이 동남아 어느 섬의 공용문자가 되고 미국과 유럽 등의 대학 어문 교육에서 한국어의 위상이 높아지는 행복이 있다 한들 앞으로 100년 내지 500년 안에 과연 살아있는 언어이고 살아있는 문자언어이겠는가 하는 위기의식까지 맞닿아 있지 않겠는가.

김형수=역시 선생님은 8·15를 언어의 부활로 기억하시네요.

고은=내가 세종을 내 신으로 섬기는 까닭은 이런 내 모국어와 조국의 문자에 대한 절실한 자기방어 때문이라네. 바로 이런 조선어의 해방이 바로 해방의 근원적인 의미가 됨으로써 1945년 여름 이후는 모국어의 무한을 상상할 수 있지 않은가.

김형수=아아!

고은=이런 모국어 시대를 열망하는 처연한 시가 바로 1930년대 심훈의 시 ‘그날이 오며는’이 아니던가. 그 시는 갓 서른 살의 죽음을 앞둔 피어린 시인의 절규이기도 했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죽기 전에 그날이 오면/ 나는 한밤중 까마귀처럼 날다가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려보리라…” 놀랍게도 이 시가 현대 한국시사에서 소외된 사실과는 반대로 이 시야말로 20세기 세계 시단에서 가장 인상 깊은 감동의 시로 예찬된 사실을 확인하고 싶네.

김형수=세계 시단이라면 서양 문단을 이르는 말씀입니까?

고은=1966년 옥스퍼드대 시학교수이자 부총장이던 세실 M 바우라의 격조 있는 시론서 <시와 정치>에 전편 인용으로 소개되고 있더군. 패전 직후의 독일 시인 한스 베르만 슈타이너의 ‘1945년 5월8일’이라는 독일 항복 조인의 당일을 소재로 삼은 계시적 소묘와는 달리 심훈은 강렬한 상상적 관념을 통한 대비로 말하는데 이는 T S 엘리엇과 같은 현실의 냉철한 해부도와는 다른 점도 밝혀지기 마련이었지. 또한 바우라는 ‘그날이 오며는’이 구약시편 다비데의 고대적 공상 기법을 썼다는 것과 조선의 해방을 예건하는 이미지를 형성한다고도 강조했어.

김형수=한국인은 ‘생각’이 태어나는 곳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라고 합니다. 한국 사람이 “내 생각에…”라고 말할 때 자기 가슴을 가리킨다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 그런 뜻에서 심훈은 ‘가슴의 문학’을 했다고 봅니다.

고은=나는 1930년대 후반 동북아시아 전역의 암흑 속에서 조국의 광복과 민족 해방을 열화같이 노래하는 시인의 그 의지와 용기 그리고 그의 뛰어난 감수성의 발로야말로 그 당시부터 한반도 문학의 노예근성이 드러나는 환경에서 실로 경이적인 사례라고 몇 번이라도 강조하고 싶어지네. 아니 이 시는 조금도 경직된 명제로만 지적될 수 없는 시 자체로서의 유연한 언어 구사로 가장 비대중적인 경지와 가장 대중적인 호소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네. 심훈은 그의 소설 <상록수>만으로 말해서는 안되는 시인의 성좌(星座)이지.

김형수=다시 보겠습니다. 후대의 민중문학 같은 현장의 진정성이 분명히 있었어요.

고은=해방의 현재가 이런 해방의 전야로서 예언자적 절창의 다음인 줄이야. 어린 내 두메 마을에서의 8·15는 알 까닭이 없었어. 다만 나는 학교에서 일본어만 공부하다가 그동안 언문이라 부르던 한글을 공부하게 된 것이 그야말로 ‘영문도 모를 기쁨’이 되었지.

김형수=모국어 의식의 출발점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고은=나는 진작 열 살 미만의 서당 학동 시절 한자를 익히는 낮과 머슴방에서 배운 언문의 밤이 있었으므로 식민지 시대 전기까지 있어온 조선의 책들 가운데서 종조부네 서가에 꽂힌 <의지할 곳 없는 청춘> 따위를 읽다가 종조부한테 꾸지람을 받은 적도 있고, 아버지의 이야기책들도 주룩주룩 읽어낸 적도 있어. 머슴 대길이 아저씨의 언문책 읽기 영향이 컸지.

김형수=선생님의 작품을 손가락으로 꼽을 때 ‘선제리 아낙네들’이 반드시 들어가리라 봅니다. 하늘에서 기러기의 울음소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과 인간의 마을에서 아낙네들이 주고받는 소리를 연결시킨 작품인데, 세상은 멀리서 보면 생명이 나고 죽는 것밖에 없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존재의 그 깊은 골짜기가 다 읽혀집니다. 끝내 식민지 시대가 걷히고 마는 그 전천후적인 사변을 맞아 공동의 정신사에 참여했던 기념비를 결국 언어가 아니면 무엇으로 지켜갈 수 있겠습니까?

고은=세종대왕의 신념인 바, 문자가 사백억 개는 되어야 천지자연의 소리를 표기할 수 있다고 한 것이나 세종 아래 한글 창제의 한 공신인 정인지가 ‘천지자연의 소리가 있을진대 반드시 천지자연의 문자가 있을지어다’ 하던 그 당당한 언어와 세계가 일치되는 커다란 문화 경륜이야 당시의 어린아이가 알 턱이나 있었던가. 옛 선사시대 조상이 새 발자국을 글의 기원으로 삼고 거북 등때기 무늬로 표현의 근원 형상을 삼은 이래 한글의 인류사적 출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기도 하지. 한글이 1945년 8월15일 이후에 이르기까지 그 암담한 핍박과 멸시와 소외로도 멸종되지 않고 그것의 방치로도 변질되지 않은 채 살아남은 것은 저쪽 15세기와 이쪽 20세기 사이의 사대봉공과 외세파쇼를 이겨낸 비극적인 승리가 아닌가.

김형수=네, 맞습니다. 하지만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나이에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순백의 공동체 앞에 섰던 것은 행운이 아닐까 싶어요. 그때 추억할 일은 없습니까?

고은=나는 종이가 귀한 시절이어서 오래된 종이상자를 펴서 거기에 먹물의 붓글씨로 ‘가나다라…’를 쓰고 또 썼어. 한글이야말로 없던 내가 다시 생겨난 느낌이었으니까. 좀 심해진 이런 기분은 한동안 한자조차 싫어져서 ‘조선독립만세’라는 것을 으레 한글로 써야 했지. 새로 찾은 내 이름도 국문으로 몇 번이고 써 본 뒤 비로소 내가 제대로 된 나 자신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네.

김형수=그 자리는 우리 작가들이 매순간 떠나지만 돌아와야 되는 순정의 원점이 아닌가 합니다. 마을에서 혹시 건국 준비 같은 건 없었는지요?

고은=아버지는 벌써 앞으로의 새 나라 이름을 대동진(大東震)이라고 말했어. 대동진공화국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지. 7세기 말 대조영이 고구려 옛땅인 동모산 밑에 자신의 나라를 선포할 때의 진(震)이었지. 이것이 발해 국명과 바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옛 사서로 알려진 <신지비사(神誌秘詞)>의 ‘구변진단(九變震檀)’의 바로 그 진단이 예부터 조선을 부르는 칭호였다네. 용비어천가 15장에도 이 진단 운운이 나오지. 이 진단과 다른 진단(震旦)은 중국의 이칭이기도 하지. 인도에서 중국을 ‘치나스타나’ ‘치니스탄’이라 한 데서 생긴 것이지. 아무튼 식민지 시대에 생긴 조선사 연구모임의 이름이 ‘진단학회’였던 것도 그것이 조선반도 및 고대 대륙까지 아우르는 국사공간을 반영하려는 뜻이었겠지.

김형수=정치적으로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지, 마치 원시부족의 새 아침을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합니다. 당연히 새로운 지도자들도 부각되기 시작했겠지요?

고은=아버지는 여운형이라는 이름과 이승만 박사 또는 김구 선생이라는 이름을 나에게 알려주었어. 그리고 우리 동네 쇠정지에 ‘환영 연합군 만세’라는 솔가지 아치를 세우고 거기에 미·영·소·중의 네 국기를 내가 그려서 붙였어. 중국기는 그 당시는 오성기가 아닌 청천백일기였어. 오늘날의 대만 국기 말이네.



선제리 아낙네들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댄다

이런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