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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9)어릴 적에 최치원의 시와 글 읽으며 문자와 친해졌지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식민지 시대 농사꾼의 존재란 논두렁에 내린 이슬 같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황새처럼 들에 나타나 역시 들에서 자취를 감추기 마련이련만 어찌 루소를 만나고 고흐를 그리고 또 먼 대륙들을 꿈꾸었는지 신기하기만 합니다.

고은=누군가가 아시아 농업풍경을 함부로 왈가왈부한 적이 있어. 자바사람의 일거리는 1년에 65일뿐이고 한국의 농부는 100일만 일을 하고 일본인은 140일 일하고 인도 데칸에서는 다섯 달의 농한기가 보통이고 복합추수기 한 대로 중국 농촌의 한 마을 전체가 할 일을 해낸다는, 이 단정으로 보자면 아시아 농민들의 한가함과 나태함을 비아냥거리는 느낌도 없지 않지. 하지만 식민지 시기의 조선 농촌은 가난의 평등만이 평등의 의미가 있는 전천후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생활이었어. 농업이 풀의 세계를 들풀과 잡초로 구분해 놓았거니와 우리나라 논의 잡초가 150여종이고 밭 잡초가 300여종인데 이것과의 싸움이 농업의 ‘육장’이었어. ‘육장’은 5일장, 7일장이 아닌 상설시장을 말하지.

김형수=그러게요. 농사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제 형님은 해방둥이인데, 어릴 때 쓰던 지게가 늘 처마 밑에 있었어요. 크기는 장난감만 하지만 거기에 엉긴 땟자국이 엄청난 노동의 양을 웅변합니다.

그림|임옥상 화백

고은=뼈에서는 항상 뿌드득 소리가 났지. 논밭 노동 말고도 땔감이나 두엄 만들기, 새끼 꼬기, 가마니 짜기 등 눈 뜨면 일밖에 없다시피 했어. 쌀 한 되는 그야말로 피땀 한 되였어. 아이들이라는 것도 너덧 살부터 당연히 노동력의 미숙련 상태였지. 그래서 나도 그냥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 농부였어. 풀 매고 풀 베고 갈퀴나무를 한 짐씩 해왔지. 이런 농부의 절대 환경 안에서 문자에의 꿈이 있게 된 것은 등불이 없는 한밤중에 등불 하나가 밝혀진다는 비유가 과장이 아니었지.

김형수=아버지의 신명과 삼촌들의 자극이 이제 문자를 얻어가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고은=아 참, 고향 옥구의 바닷가 일대나 서해의 고군산군도에는 최치원의 출생설이 파다하지. 이것이 나에게 문자 운명의 첫 대본인지 모르겠네.

김형수=신라 최치원이 그곳에서 났습니까?

고은=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 서유거(徐有渠)와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이능화(李能和)는 고군산군도의 한 섬이 신라 하대의 최치원이 태어난 곳이라고 못 박고 있다네.

김형수=저는 경주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고은=본이 경주이지. 이런 주장은 그밖에도 최치원이 두주(杜州) 문창(文昌)에서 출생했다는 설로도 뒷받침되고 있는데 이 두 곳이 다 고군산을 속도(屬島)로 삼은 지역이라네. 실제로 옥구군 미면 서쪽 바닷가에는 식민지 왕자로 군림하기 위해서 건너온 일본 규슈의 대규모 농업 야망가들이 개척한 간척지 한 지역이 문창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어왔는데 해방 직후 그곳에 세워진 문창국민학교라는 이름도 거기에 연원을 두고 있어.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을 기리는 그의 연고지로 된 것이지. 실제로 옥구군 바닷가에는 언덕 위에 자천대(紫泉臺)라는 오래된 정자가 있는데 그곳이 어린 최치원이 글 읽던 곳이라 전해오고 심지어는 거기서 달 밝은 밤에 글 읽는 소리가 바다 건너 중국 동해안까지 들려서 중국 아이들이 그 글 읽는 소리로 공부를 했다는 전설이 있어.

김형수=그러고 보니 책 읽는 소리가 중국 쪽으로 밀려가려면 발원지가 경주보다 서해 어디여야 맞겠어요.

고은=어떤 기록으로는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崔肩逸)이 문창골의 부임지로 와서 아들을 낳은 것을 누차 말하기도 하지. 이 고을 이름이 나중의 시호가 된 것인지 몰라. 이런 전설은 고군산군도의 한 섬인 선유도나 신시도에까지 최치원의 신선(神仙) 전설로도 남아 있어. 신시도 원영대도 최치원이 시를 읊은 곳이라 하지. 육지와 지척에 있는 내초도라는 작은 섬에도 최치원이 모래톱에 글을 쓰며 공부했다는 전설이 있어.

김형수=재미있는 전설이 많았네요. 한데, 신라 사람이 구백제의 골짜기로 왔으면 그다지 신분이 높지는 않았겠습니다.

고은=경주 최씨라는 최치원의 본을 가진 사람들은 내리닫이 육두품이지. 고대 핏줄은 7대까지가 한 가족단위였어. 신라의 지배구조에서 오랫동안 철칙이 되어온 골품제 혈통으로 볼 때 영영 변경될 수 없는 밑바닥 계급이지. 그런데 그 말기에는 바로 이 골품제의 신분 고착이 지극히 불안한 상태로 되었어. 8세기 150년간 왕이 20번이나 바뀌지. 오랫동안 토지도 지위도 없는 육두품은 지배계층의 하수 노릇만 해오다가 이런 말기에 이르러서야 사회체제의 분열과 지방 호족세력의 위협과 함께 그 세력이 슬슬 고개를 들었을 때였지만 그것이 혈통의 전통을 송두리째 극복할 수는 없었지. 물론 이 신라 하대에 이르러 그간의 왕실 불교에 반기를 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재야적 선불교가 할거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자장율사의 호국주의 국통(國統) 불교의 근성을 뛰어넘지 못한 것과도 엇비슷하지. 선은 제도적 인과 중심의 업보종교가 아니라 수행하면 성불한다는 탈제도적 개인종교였어.

김형수=최치원이 유불선의 뿌리이며 신라의 마지막 화랑이었다는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온 건가 봅니다.

고은=최치원의 아버지는 육두품이라는 가망 없는 소외계층으로서 구백제 지역 바닷가 수자리를 사는 사람이었어. 장남은 장래의 보장 없는 자신의 처지대로 소년 시절에 입산 삭발의 출가승이 되고 차남 치원은 해외로 보내지게 되지. 당나라에 건너가는 유학생은 승려들의 유학과는 달리 당의 숙위제(宿衛制)의 대상인데 중국에 대한 왕족 귀족의 인질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그래서 처음에는 왕자나 왕족의 자제들밖에 갈 수 없었어. 김운경(金雲卿) 등 60여명이 그 숙위유학으로 외국인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서 장원급제를 했지. 그런데 점점 이 엄격한 숙위제가 풀어지기 시작했어. 그래서 왕족 귀족 출신의 자제들이 낯선 당나라에 가기를 싫어하자 그들 대신 신분이 낮은 우수한 청소년들이 그 어려운 공부에 대신 선발되었지.

김형수=출구가 서쪽으로 열려 있었네요? ‘초추’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서쪽으로는 울 치지 마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쪽이다.” 이 구절이 마치 최치원 아버지의 심정 같아서요.

고은=최치원의 아버지는 거의 한평생을 서해 파도소리만 들어야 하는 수자리 삶이라 바다 건너 어떤 세계에의 야망을 제 아들에게 부여함으로써 숙위유학의 기회를 기필코 만들어내어 제 아들을 보낸 것이지. 최치원의 총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서 그 열두 살짜리를 거의 무리로 보냈어. 너 10년 내 장원 아니면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호통을 쳐 보냈지. 본국에의 차디찬 절망이 외국에의 뜨거운 희망으로 된 것이지.

김형수=식민지 시대의 동경 유학쯤, 지금의 미국 유학쯤 되는데, 발품으로 이동하던 시대에 삶의 무대가 어찌 그리 클 수 있는지. 최치원을 어느 정도의 문재(文才)로 봐야 합니까?

고은=최치원은 신라 하대의 삼최(三崔)의 하나였어. 나중에 두 최인 최신지(崔愼之)는 고려 왕건의 사부가 되고 최승후는 후백제 견훤의 군사(軍師) 겸 문관이 된 나머지 몰락하지. 그 무렵의 천재인 김가기는 아예 당나라 선술에 몰입하다가 귀국과 재출국을 반복하고 김이어(金夷魚)도 도교 신선이 되었어. 그때까지 한반도 남북조시대의 북조 발해 숙위유학생이 장원을 계속 독점한 나머지 신라는 자존심이 몹시 상한 상태였는데 모처럼 최치원이 빈공과 장원을 하게 되어 신라사회 전체가 갈채를 보냈어.

김형수=그래놓고도 난세를 만나 포부를 펼치지 못하고 산과 강, 바다를 떠돌았다고 하는데, 그런 유랑 이미지가 선생님의 한때와 겹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고은=그런 그가 만당(晩唐)시대 당나라에서 한동안 촉망을 받다가 암살과 배제의 쓴맛을 보고 당나라 황제 희종(僖宗)의 윤허를 얻어 신라의 관직까지 받아왔어. 신라 관직을 당이 직접 임면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는 본국에 돌아와 처음의 환영 다음에는 본국 수구세력에게 철저하게 소외되지. 당나라에서도 신라에서도 그의 포부는 결국 무효였지. 나중에 조선시대 퇴계나 율곡으로부터 망불자(妄佛者)로 낙인찍히고 도학(道學)과는 상관없다고 배척당함으로써 고려 초기의 추존(追尊)말고는 미래로부터도 불운의 대상이 되고 말았어. 이런 최치원의 생애 첫 걸음이 바로 그 아버지의 임지인 내 고향에서 시작된 것이네.

김형수=군산 열도에서 이미 옛 거장의 기를 받으셨군요?

고은=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최치원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자에의 막연한 친연화가 이루어진 셈이었네.

김형수=그때의 문자는 물론 한자였지요?

고은=그렇지. 한글이야 글 축에도 들 수 없었네. 내 서당 학동생활도 상당한 기간 반농반학(半農半學)으로 지속되었지. 지금도 기억나는데 내가 처음으로 잿정지 서당으로 가는 날 아침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를 따라 나도 명절 옷을 차려입고 앞산 선영의 고조, 증조의 산소에 가서 그 시향(時享) 조상의 혼령한테 자손의 글공부를 고(告)하는 배례를 했어. 당신의 자손이 글을 시작하나이다라는 인사였어. 조선 유교는 고대, 중세와 달리 조상과 자손을 너무 짙은 색감으로 연결 고착시켰어. 조상에의 예의가 종교였지. 그것이야말로 나의 이데올로기 유전자까지 되고 말았어. 먼 곳에 갈 때나 먼 곳에서 돌아올 때도 조상의 산소나 집 뒤란의 사당에 먼저 인사를 드리고 나서 부모나 웃전 어른에게 인사를 했지.

김형수=모든 존재는 다 많은 서사들이 상호작용을 하는 ‘장’ 안에서 사는 건가 봅니다.

고은=과연 사람마다 달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도 한 개아의 고유명사이기 전에 조상의 승인을 받아야만 온전한 인간의 명칭으로 확정되었다네. 조상에게 바치는 고기를 담은 제기(祭器)를 상형한 문자가 ‘名’이지. 심지어 이런 신성한 이름을 여자가 가졌을 경우라면 그 이름을 남자에게 말한다는 것은 몸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어.

김형수=명명(命名)한다는 말 속에 그런 뜻이 숨어 있었습니까?

고은=이런 이름이야말로 상형의 직접성으로는 ‘어둠 속의 소리’를 뜻하기도 하지. 해가 진 저녁이나 밤에는 눈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으므로 입을 벌려 소리로 부를 수 있단 말이네. 그러므로 존재를 암흑 속에서 이끌어내는 것이 이름의 의미가 되겠지.

김형수=문자란 결국 어둠 속의 소리를 시각화시킨 거로군요?

고은=인간이 문자를 만난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먼저 표시할 수 있다는 원초적인 사명으로부터 문자와 문화가 열리는 뜻에 닿는 것인지 몰라. 물론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게 있는 일상의 소리 이름이야 굳이 문자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신성한 삶의 부호임에 틀림없으나 문자가 본디 통치자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권력의 표상이었던 사실의 한쪽에서는 문자란 인간 자신의 이름을 쓴다는 신성행위로서도 의미심장하지.

김형수=그러니까 선생님이 자연적인 ‘소리’의 시대를 마감하고 ‘글’의 시대를 시작하는 때가 정확히 언제였습니까?

고은=나는 몇 해 동안 세 군데의 서당을 다니면서 <천자문> <동몽선습> 그리고 <소학> <논어> 등을 차례로 공부했네. 1938년부터 1942년까지였어. 도중의 한두 해 몇 달 동안은 서당을 중단한 채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독학자습을 하기도 했지.

김형수=1933년생이시니 다섯 살 때 <천자문>을 만난 거네요?

고은=<천자문>은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하지. 처음 간 서당의 훈장은 늙은 홀아비였어. 이를테면 사궁(四窮)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분이었어. 사궁의 첫째가 늙은 홀아비, 다음이 늙은 과부, 셋째가 고아, 넷째가 자식 없는 노인이지. 늙는다는 것이 유가(儒家)의 정서로는 어른이지만 생존의 실감으로는 가장 곤궁한 상태이지. 이 늙은 훈장은 <천자문>을 늘 백수문이라고 불렀어. 그 자신도 백발상투를 틀고 있었는데 교육자이기보다 방죽가의 초가삼간 주인답게 틈만 나면 물가에 나가 낚싯대를 놓고 앉아 있기를 좋아했어. <천자문>은 전해오는 바로는 양무제가 주흥사라는 선비에게 하명해서 지은 4자시(四字詩) 250개라고 하지. 김성동의 <천자문> 풀이가 매혹적이지. 이것을 단 하룻밤에 다 지어내고 난 다음날 새벽에 보니 지은 사람의 머리가 백발로 변해 있었다 해서 백수문이라 하는 모양이야.

김형수=<천자문>은 입문서인데, 창작의 고통을 전해주는 야사도 그렇고, 백발상투에 낚싯대를 드리운 훈장님의 존재도 그렇고, 탈속적(脫俗的) 지성의 이미지가 아주 어울립니다.

고은=그런데 이 <천자문>은 처음부터 ‘철수야, 바둑아’로 시작하는 게 아니야. 바로 하늘과 땅이고 우주야. 이것은 그 다음 공부인 <동몽선습> 첫머리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유일사상을 내세우는 차원과도 달라. 바로 세계이고 우주지. 과연 이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天地玄黃)”는 주역 곤괘의 ‘천지이지황(天地而地黃)’을 그대로 들어다놓은 것이네. 이런 4자시로 한 자도 반복되지 않게 1천자의 철리(哲理)를 완성한 것이 <천자문>인데 이것은 공부의 시작이지만 끝내는 공부의 궁극이기도 한 셈이지. 끝에 이끼야(也)가 매우 시사적이지 않는가.

김형수=<천자문>이 자연으로 시작해서 인륜으로 나아갔다는 점도 사유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 같습니다. 인문학적 글쓰기니까요. 맨 끝에 교훈적인 문장을 장식하는 어조사 ‘야(也)’는 여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모성과 생산을 뜻한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고은=<천자문> 공부란 맨바닥에 앉아서 상반신을 끄덕이며 큰소리를 내어 익히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다 암기하게 되지. 그래서 <천자문> 한 권 읽기를 마치면 책을 뒤에 놓고 돌아앉아 하늘 천부터 맨 끝의 이끼 야(也)까지 구성지게 외우는 것이 시험이야. 이때는 어머니가 찰떡 한 말을 해서 시루째나 떡판을 머리에 이거나 아버지가 지게에 지고 와서 훈장을 비롯해 여러 학동들을 먹인다네. 물론 훈장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쌀이나 돈으로 학자금을 바쳤어. 부자한테는 훈장을 사랑방에 맞아놓고 아들을 가르치게 하는 독선생 사례도 있지만 나는 다섯 명이나 일곱 명의 학동들과 함께 배웠어. 여섯 살짜리도 열일곱 살짜리도 있었지.

김형수=그 다섯 명이나 일곱 명이 다 시를 쓰지는 않았습니다. 한 시인의 탄생이 천수답 마른 물꼬에서 미꾸라지가 승천하듯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해서 재래 농촌의 집합주의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관계망에서 독립하여 고독한 행보를 하게 되었는지 그 계기가 매우 궁금해집니다.

초추初秋
아우야 서쪽으로는 울 치지 말아라
내가 가야 할 곳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쪽이다

돌아온 아우야
살아가면서
몇 잔 술에 취하여
가을이 오면 이 땅에는 들이 많아진다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쪽
나뭇가지 사이 서쪽이 무한하다

이제 이 세상도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저문다

아우야 네가 돌아와
빈 마당 울을 치고
다시 살아가려는 아우야
이제 너에게 맡기고
오늘처럼 나는 가려고
어둑어둑한 서쪽으로 환히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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