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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하동에 오시려거든, 푸른 들판 가득 담으러 오시라

하동 | 글 오광수 기자·사진 박성배(사진작가) oks@kyunghyang.com

여름은 대개 휴가로 기억된다. 이 땅에서의 휴가는 운명적으로 짧고 강렬할 수밖에 없다. 꽉 막힌 도로, 넘쳐나는 사람, 살인적인 물가…. 그래도 1년에 한 번 대개의 사람들은 이맘때면 짐을 싼다. 당장은 고통스러워도 추억을 쌓기 위해 떠난다. 결국 한 장의 사진으로 남지만 ‘그해 여름 어디 있었다’ ‘휴가 때 어딜 다녀왔다’는 중요한 스펙이기 때문이다.

경남 하동은 그러한 ‘여행스펙 쌓기’에 더없이 좋은 휴가지다. 누군가 지리산을 얘기하거나 섬진강을 얘기할 때 뒤로 물러나지 않아도 된다. 또 문학작품을 논할 때나, 숨은 맛집을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리산을 배경으로 섬진강이 휘돌아 흐르는 하동은 벚꽃길과 야생차, 섬진강 은어로 유명하지만 여름은 계곡과 푸른 들판이 제격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중략)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중략)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일부

‘하늘 아래 첫 동네’ 의신 마을은 지리산의 고봉들 사이에 위치해 있다. 사진은 의신 마을에서 바라본 지리산. 골짝마다 낀 물안개가 아름답다.


하동여행은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시작되는 섬진강변 19번 국도를 중심으로 하는 게 좋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의 하나로 하동송림~평사리 공원~최참판댁~남도대교~화개장터~쌍계사~지리산으로 이어진다. 일명 ‘하동포구 팔십리’다. 그중에서도 여름의 백미는 화개장터에서 시작하여 쌍계사와 칠불사, 의신마을로 이어지는 16㎞의 긴 계곡이다.

비 그친 뒤 화개장터를 지나 만난 쌍계사 입구의 화개계곡은 물안개가 지천이었다. 계곡을 휘도는 물줄기는 마치 청년의 식스팩처럼 꿈틀거리며 굽이친다. 자연은 언제나 감동적이어서 이럴 땐 어느새 눈물이 고인다. 선경(仙景)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까. 계곡에 발을 담그니 머리끝까지 한기가 오른다. 묵은 때가 쭉 빠지는 느낌, 여름에 맛보는 탁족(濯足)의 진수다. 계곡의 어디를 들어서도 맑은 계곡과 푸른 숲, 너른 바위가 기다린다.

마음먹고 푸른 여름의 평사리 들판. 사이좋게 어깨를 겯고 서 있는 소나무가 꼭 오누이 같다.


쌍계사 뒤편에 숨은 불일폭포는 하동 8경의 하나로 놓칠 수 없는 비경이다. 쌍계사 뒤편으로 약 3㎞, 어른 걸음으로 1시간 남짓 오르면 만날 수 있다. 도무지 폭포가 나타날 것 같지 않은 깊은 산중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굉음이 들린다. 굉음의 진앙지에 다다르면 물줄기가 60여m에 이르는 2단 폭포와 만난다. 지리산에서 반달곰을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정수리를 가르며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다가 넋을 잃는다. 요즘 비 때문에 수량이 풍부하여 폭포가 살이 토실토실하게 올랐다.

이끼 낀 바위 사이로 장쾌하게 흐르는 지리산의 계곡물.

그 계곡의 끝에 있는 의신마을은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하늘 아래 첫 동네’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의신마을은 한국 근현대사의 문제적 전적지로 꼽힌다. 동학농민운동, 한일합방, 한국전쟁 등의 고비마다 농민군, 의병, 남부군 등이 이곳 산자락에서 최후를 맞았다. 삼도봉, 명선봉, 토끼봉, 형제봉, 칠선봉, 연하봉, 삿갓봉 등 지리산의 고봉 사이에 위치한 의신마을을 중심으로 대성계곡, 선유동계곡, 의신계곡, 빗점골 등이 부챗살처럼 펼쳐진다. 몇 가구 되지 않는 마을주민들은 대개 약초를 캐고 벌을 치고 고로쇠를 채취해 삶을 꾸려간다. 무공해 밥상을 만날 수 있는 민박도 가능하다.

의신마을에서 좀 더 모험적인 여행을 원한다면 빗점골을 추천한다. 이곳은 남한 빨치산부대인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최후까지 은거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이다. 의신마을을 출발하여 의신계곡을 타고 넘어 4㎞쯤 가면 벽소령으로 오르는 등산 코스의 들머리인 삼정마을을 만난다. 여기까지는 마을 주민들에 한해 차량 통행이 허용되기에 의신마을 주민의 허락을 받고 차를 몰고 갈 수 있다. 이곳부터 빗점골까지는 인적마저 고요한 산길이다. 30여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한다. ‘빗점’이란 여러 비탈의 밑자락이 한 군데로 모이는 곳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이름대로 빗점은 절터골, 산태골, 완골의 자락이 한데 모이면서 지리산을 타고 내린 물이 합쳐진다. 그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다보면 지리산의 가슴속까지 숨어든 느낌이다. 자칫 그 천혜의 자연에 때라도 묻힐까 겁이 날 정도다.

최참판댁 대청마루에 앉아, 서희와 길상이도 떠올리시라

최참판댁

계곡 물놀이에 지쳤다면 악양마을과 최참판댁 나들이에 나서는 것도 좋다. 화개장터와 쌍계사 계곡에서 불과 10여분 거리에 하동군 악양마을과 최참판댁이 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었거나, 앞으로 읽을 사람이라면 최참판댁에 들를 일이다. <토지>의 서희와 길상이의 사랑이 시작된 최참판댁은 14동의 한옥촌이 너른 평사리 들판을 내다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 우리 민족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은 토지 세트장과 가을에 토지문학제가 열리는 평사리 문학관도 있다. 넓은 대청마루에 앉으면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토지> 속 인물들이 부지런히 마당을 오가고, 별채에서 사랑을 속삭인다.

두 그루의 소나무가 벌판 한가운데 그림처럼 서 있는 평사리 들판은 시방 온통 초록이다. 들판 저쪽으로 섬진강이 굽이 돌아 흐르는 풍광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관광객들에겐 생소한 길이지만 최참판댁의 뒤편 지방도를 통해 화개장터 방향으로 가다보면 평사리와 섬진강, 지리산 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뷰포인트를 만날 수 있다.

최참판댁을 끼고 있는 악양면은 2009년에 슬로시티로 인증받은 인간미 넘치는 마을이다. 소설가 공지영이 경향신문에 연재한 <지리산 행복학교>의 주무대가 이곳이다. 버들치 시인, 낙장불입 시인, 고아르피엠 여사 등 연봉 200만원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사는 곳이다. 느릿느릿 걸어서 다원에 들러서 차를 한 잔 하거나, 고택들을 돌아보다보면 왜 공지영이 ‘행복학교’라고 칭했는지 알 수 있을 듯하다.

▶여행길잡이

●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로 진입해 전주~순천을 잇는 고속도로를 타고 구례IC로 나오면 그곳에서 화개나 하동까지 30~40분이면 갈 수 있다. 구례에서는 19번 국도를 타고 섬진강을 끼고 달려 화개삼거리에서 우회전, 1023번 지방도로를 따라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면 의신계곡 입구인 의신마을이다. 또 다른 방법은 경부고속도로로 대전까지 간 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이용해 함양IC에서 빠져 나오면 된다.

● 하동의 맛은 녹차와 재첩국, 은어 등이 꼽힌다. 올해 수확량이 줄어든 섬진강 재첩은 전국 제일로 꼽히며, 재첩으로 끓인 국은 탁월한 숙취해소 효능이 있다. 화개장터에 위치한 늘봄식당(055-883-8411), 고향산천(055-883-2823) 등지에서 맛볼 수 있다.

● 숙박시설은 많은 편이 아니다. 의신마을에서는 ‘지리산 화개 깊은 골’(정연대씨 댁·055-883-1310) 등지에서 민박이 가능하며 조용하고 쾌적한 하룻밤을 원한다면 화개천변, 쌍계사를 지나 칠불사로 가는 길 옆의 ‘쉬어가는 누각’(055-884-0151)도 좋다. 화개계곡의 시원한 물소리를 밤새 들을 수 있는 집이다. 재첩국 등 식사도 가능하다. 문의 하동군청 문화관광과(055)880-2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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