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 전북대 교수·영문학
아프리카에 다녀왔습니다. 세상 더럽고 어지러운 것들 모두 쓸어버리려는 듯 종말의 홍수 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술의 신 바쿠스의 힘을 빈 것도 아니요, 어느 시인처럼 “보이지 않는 시의 날개”를 이용한 것도 아닙니다. 두려운 바깥세상과 담을 쌓으려는 듯 창문 모두 암막으로 가린 채 하얀 연기 요란한 기차를 타고 케냐의 커피농장으로 향했습니다.
말을 타기도 했고 성능보다 겉모습이 멋스러운 지프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식민야욕에 점점 멍들어가고 있는 땅. 한때는 ‘지상낙원’이라 불리기도 했던 검은 대륙의 볼수록 다채로운 풍광들을 둘러보기 위해.
결국 노란 경비행기의 유혹에 이끌려 광활한 초원과 그 위를 뛰어다니는 물소들, 못지않게 널따란 물길 따라 힘찬 비상의 날갯짓을 해대는 수많은 새떼들, 그리고 장엄한 붉은 빛 석양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이쯤 돼야 제대로 된 일탈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말을 타기도 했고 성능보다 겉모습이 멋스러운 지프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전쟁과 식민야욕에 점점 멍들어가고 있는 땅. 한때는 ‘지상낙원’이라 불리기도 했던 검은 대륙의 볼수록 다채로운 풍광들을 둘러보기 위해.
결국 노란 경비행기의 유혹에 이끌려 광활한 초원과 그 위를 뛰어다니는 물소들, 못지않게 널따란 물길 따라 힘찬 비상의 날갯짓을 해대는 수많은 새떼들, 그리고 장엄한 붉은 빛 석양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이쯤 돼야 제대로 된 일탈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래도 가파르게 흐릿해지는 기억력을 감안해 시집 몇 권은 챙겼습니다. 시는 어디에서나 필요하답니다. 머리를 감겨줄 때도 필요하고 장례식 때에도 요긴하게 쓰일 수 있습니다. 영시를 가르치면서도 영국 시인 콜리지의 ‘늙은 수부의 노래’나 하우스만의 ‘젊어 죽은 운동선수에게’가 그렇게 기탄없이 인용될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렇게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으로 데니스(로버트 레드포드)와 카렌(메릴 스트립)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사랑을 느끼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으랴!”던 그 남자. “당신에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소!” 하며 초원으로, 창공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이끌다 헝클어진 머리를 감겨주며 “사랑을 잘하는 사람이 기도도 잘한다오!” 시를 읊조리는 사내. 미래를 상상할 줄 모르는 마사이족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동물들처럼, 오직 ‘지금 이 자리’에 충실한, 소유하는 것도 소유당하는 것도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구름 나그네. 남정네들을 더욱 주눅 들게 하는 것은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차르트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다는 거. 그가 들려주는 클라리넷 협주곡을 들으며 “졌다!” 한숨짓지 않는 이 어디 있으리오?
그에 못지않은 매력으로 뭇 사내들을 두렵게 하는 카렌. “월계수는 일찍 자라지만, 장미보다 빨리 시들어버리는구나” 처연히 읊조리며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다스릴 줄 아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여인. 사랑하는 사람과 커피농장 등 모든 것을 상실하고도 자기 소유의 땅을 원래의 주인인 원주민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무릎 꿇기도 주저하지 않는 당당한 영혼의 귀부인 역시 스스로를 ‘정신 여행자(Mental Traveller)’라 칭하며 블레이크 전공자를 한숨짓게 했습니다. (‘정신 여행자’는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제목입니다!) 마음 여행을 통해 엮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데니스의 선물에 화답하는 모습은 ‘천사들의 질투’를 야기할 만큼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랑은 없다던가? 불완전한 이 세상에 진정한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없다는 시인 포의 말처럼. 애너벨 리가 천사들의 시기를 받아 일찍 세상을 떠났듯 이들의 사랑도 때 이른 죽음을 통해 그 온전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당한 영혼들의 ‘용쟁호투’가 사랑에 물린 범부들의 시시콜콜한 기싸움으로 흐르지 않았을까요?
애초에 이들을 맺어준 이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 아다지오의 우수어린 아름다움이 이런 결말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곡.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면서 친애하는 벗 안톤 슈타틀러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헌정한 이 협주곡 2악장은 죽음으로 마감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삶에 대한 애틋한 심정이 슬프도록 아름답게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그랬던가요? “죽음이란 곧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데니스의 죽음이 그렇듯이. 영화에서처럼 원숭이들도 좋아하는 모차르트 음악에 자주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런 상념으로 이 처연한 선율을 되뇌며 아프리카로부터(Out of Africa) 돌아왔습니다. 이 마음 여행의 선물로 벨기에의 다나 위너가 편곡해 부른 ‘아침이 올 때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세요’도 함께 올립니다. 장마의 후줄근함 털어버리라고!
※음악은 경향닷컴(www.khan.co.kr)과 이종민 교수 홈페이지(http://leecm.chonbuk.ac.kr/~leecm/index.php)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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