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홍규 | 소설가
시가 일상어를 조탁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면 산문인 소설은 일상어를 새로운 맥락에 위치시키려는 경향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도 시정신과 산문정신의 차이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겠는데 현대문학에서 가장 두드러진 산문양식은 소설일 테고 그런 산문정신이 유독 깊이 엿보이는 소설가 가운데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박완서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의 소설은 애써 꾸미려 하지 않지만 어떤 비유보다 선명히 독자에게 각인된다. 그래서 “연이 엄만 돈이 아까워서, 너무너무 아까워서 뼈가 저려 본 적 있수?”(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와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적인 말에 뼈가 저리기도 하는 것이다.
삶과 문학의 자유로운 넘나들이는 문학인이 늘 꿈꾸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종종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기에 불가능은 가능의 그림자언어인 법이다.
내 독서범위에서 볼 때 세계문학에 두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오스만제국에 저항해 끊임없이 봉기한 크레타인들의 비극적인 아이러니(소년은 전쟁이 끝났다고 외치며 대로를 달리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리고 소년은 만우절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한다)를 묘사한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선생의 앞서 언급한 소설의 대화 한 토막이다. 월북한 오빠가 남파간첩이 되어 내려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차라리 넘어오다…”라고 말꼬리를 흐리자 딸은 이렇게 속으로 덧붙인다. ‘넘어오다 차라리 사살되었으면 하고.’ 그리고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어머니와 나는 마녀보다도 더 잔인해졌다.’
냉정한 문장 아래 눈물이 흐른다. 떠난 선생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누군가 그립다면 괜히 그리운 게 아니다.
삶과 문학의 자유로운 넘나들이는 문학인이 늘 꿈꾸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러나 종종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기에 불가능은 가능의 그림자언어인 법이다.
내 독서범위에서 볼 때 세계문학에 두 가지 장면이 있다. 하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미할리스 대장>에 등장하는 것으로 오스만제국에 저항해 끊임없이 봉기한 크레타인들의 비극적인 아이러니(소년은 전쟁이 끝났다고 외치며 대로를 달리고 사람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다. 그리고 소년은 만우절 거짓말이었다고 고백한다)를 묘사한 장면이며, 다른 하나는 선생의 앞서 언급한 소설의 대화 한 토막이다. 월북한 오빠가 남파간첩이 되어 내려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모녀가 대화를 나누는데, 어머니가 “차라리 넘어오다…”라고 말꼬리를 흐리자 딸은 이렇게 속으로 덧붙인다. ‘넘어오다 차라리 사살되었으면 하고.’ 그리고 스스로를 이렇게 평가한다. ‘어머니와 나는 마녀보다도 더 잔인해졌다.’
냉정한 문장 아래 눈물이 흐른다. 떠난 선생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다. 누군가 그립다면 괜히 그리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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