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방은 옥탑입니다. 여름에는 아래층 순댓국밥 집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고스란히 방바닥을 달궈 연신 수건으로 땀을 훔쳐야 합니다. 겨울에는 찬바람이 얇은 샌드위치 패널 벽에 꽁꽁 달라붙어 보일러를 아무리 돌려도 코끝을 얼게 하는 옥탑방. 그곳에서 엄마는 세월을 견디고 있습니다. 엄마는 여든둘입니다. 세월은 엄마의 살을 야금야금 갉아먹었습니다. 아니 뼈 마디마디까지 파고들었습니다. 대여섯 걸음 앞에 있는 화장실 가는 일조차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걸음을 뗄 수 있습니다. 이를 악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었던 세월이었기에 엄마의 입안은 텅 비었습니다. 틀니를 끼지 않고서는 두부 한 조각도 씹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틀니마저도 무용지물입니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잇몸은 틀니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죽을 쑤어 오물오물 침과 함께 삼켜야 합니다. 엄마는 이소선입니다. 엄마의 큰아들은 40년 전 평화시장 앞에서 불길로 타올랐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아들의 외침을 엄마는 듣지 못했습니다. "엄마, 내일 낮 한 시에 평화시장 앞 구름다리로 오면 안 돼?" 아들의 간절한 부탁을 엄마는 모르쇠 했습니다. 배고픈 어린 여공들을 돕는답시고 사장에게 대들다가 공장에서 쫓겨난 아들, 버스비로 풀빵을 사서 어린 여공들에게 나눠주고 집까지 두세 시간을 걸어 다니던 아들, 겨울 외투를 입혀 공장에 보내면 헐벗은 이에게 건네주고 발발 떨며 집에 오던 아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으면서도 밤새 한자투성이 근로기준법을 펼치고 낑낑대던 아들. 그 아들이 지옥 같은 평화시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겠다며 11월 13일 평화시장 앞에서 시위를 하겠다는데, 엄마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은 떠났고, 엄마는 아들이 되어 살고 있다
| ▲ 이소선 가족사진 (맨 왼쪽이 이소선, 가운데 어린이가 전태일). | ⓒ 전태일재단 | |
|
엄마는 아들을 병원에서 만났습니다. 이미 숯덩이가 된 아들은 온몸에 허연 붕대를 감고 입과 코만을 내놓고 누워 있었습니다. 엄마가 어떻게든 아들을 살려달라고 의사를 잡고 매달리자 아들은 엄마를 불렀습니다. "엄마 소용없는 일이야. 난 살아날 수가 없어. 내 말 좀 들어줘. 그리고 약속해줘. 내가 못다 이룬 꿈을 엄마가 꼭 해주겠다고 약속해줘." 아들은 자신이 하려고 했던 일을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습니다. "엄마, 배가 고프다." 벌써 사십 년 전 일입니다. 그렇게 아들은 떠났고, 엄마는 아들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부탁한 약속을 이루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어 모진 세월을 견뎌왔습니다. 사십 년을 세상 가장 낮은 곳, 세상 가장 힘든 이가 눈물 흘리는 곳을 찾아다니며 미친 듯 살아왔습니다. "건다리, 너는 내가 왜 사는지 아냐?" 우연찮게 이소선을 만났고, 엄마를 만난 순간 엄마의 방에 주저앉았습니다. 밤마다 조막만 한 녹음기를 틀어놓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짠지 매운지도 모르고 차리는 엄마의 밥상을 야금야금 훔쳐 먹으며 보냈습니다. "야, 건다라(엄마는 하는 일 없이 엄마 방에 숨어들어 옛날이야기만 듣고 '왔다리 갔다리'하는 나를 '건다리'라고 불렀다),너는 내가 왜 사는지 아냐?" 엄마가 물으면, "내가 우찌 아노? 내가 우예 사는지도 모르는데 엄마 사는 것까지 고민해야 되나!" 이리 쌀쌀맞게 굴며 엄마의 심장을 한꺼풀씩 벗겨갔습니다. 엄마의 이야기는 어둑어둑 어둠이 깔린 뒤에 시작됩니다.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희끗하게 동이 터야 이부자리를 깝니다. 엄마의 입이 열리면 멈추지를 않습니다. "엄마, 자고 내일 들으면 안 될까?" 졸음에 겨워 방바닥에 드러누우며 말하면 엄마는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뭐시? 잔다고!" 깜짝 놀라 누워서 몸을 옆으로 틉니다. "아, 아냐. 허리가 아파서 요리 누워서 들을 테니까 계속해." 엄마는 모로 누워 있는 내가 졸든 말든 이야기 이어갑니다. "야, 근데 니 졸고 있는 것 아니냐?" "아, 아냐. 재밌구만. 계속해." "니 졸든 말든 나는 계속한다. 근데 어디까지 했냐?" "그걸 우찌 아노? 그냥 생각나는 데부터 해."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 끝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형광등이 꺼지고 내 몸에는 이불이 덮여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엄마의 목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말입니다. 슬그머니 눈을 뜨고 엄마를 찾습니다. 엄마는 방 한 귀퉁이에서 성경책을 머리맡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합니다. 훌쩍훌쩍, 습한 기운이 방을 타고 전해옵니다. 엄마는 자신의 몸 안에 있는 아들과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 ▲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전태일(평화시장 동료들과 함께 1960년대 후반). | ⓒ 전태일재단 | |
|
"태일아! 이 엄마 만나줄래. 니가 부탁한 약속 지키지 못하면 엄마가 하늘나라에 가도 만나주지 않는다고 했잖아. 근데 엄마가 인제 다리에 힘이 없어 싸우러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엄마는 가끔 내게 묻습니다. "건다라, 내 죽으면 태일이가 만나줄 것 같냐?" 엄마의 이야기 끝 무렵에 늘 하는 질문입니다. "엄마가 왜 지금 그 걱정인데? 아직도 삼사십 년은 너끈히 살 것 같구만. 엄마 몸 걱정이나 해!" 야속한 내 말에 엄마는, "니가 볼 때는 내가 정상으로 보이냐? 내가 살아 있는 거로 보이냐 말이야!" 성을 냅니다. "멀쩡하구만, 뭐!" 말을 옆으로 돌리면, "썩을 놈, 내가 니랑 말을 하나 봐라!" 하며 엄마는 픽 돌아눕습니다. 엄마의 고민은 끝도 없다... "이 망할 비정규직 세상은 언제 끝날라고" 여든둘 엄마의 고민은 끝도 없습니다. 며칠 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식농성을 시작한다는 말에 큰 한숨을 쉽니다. "건다라, 니라도 가봐라. 지난번에 백일 가까이 단식한 (기륭 김소연) 분회장은 굴착기에 올라가 있다며? 제발 밥 먹으며 싸우라고 해라. 굶어 죽어도 내가 죽어야 하는데, 이 망할 비정규직 세상은 언제 끝날라고, 저리 힘들게 외쳐도 모른 척한다냐." 아들이 버스비로 풀빵을 사줬던 '시다'가 요즘 '비정규직'이 아니냐고 엄마는 묻습니다. 세상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노동자가 많다고 합니다. 정규직은 제 배가 부르니까 비정규직 문제에 모르쇠 한다고 목청을 높입니다. 내가 지금은 정규직이라고 해도, 내 자식 때가 되면 세상이 모조리 비정규직 세상이 된다는 걸 깨우치지 못하면 못난 아빠 엄마가 된다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지팡이를 짚고 가서 나무랍니다. | ▲ 기륭전자 비정규직 천일 농성장에 찾아간 이소선. | ⓒ 오도엽 | |
|
엄마는 오늘 밤도 기도를 합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말하고, 기륭전자 노동자를 찾습니다. "기운도 없으면서, 밤새 울며 기도하지 말라"고 말리건만 소용이 없습니다. 사십 년 동안 노동자들 싸우는데 쫓아다녔고, 수배가 되어 도망도 다녔고, 징역에도 갔으면 엄마 할 일 수백 번도 다했다고, 이젠 태일이도 엄마 밥 잘 먹고 건강하기만을 바랄 거라고 소리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난 그날 이후로 죄인이야. 내가 왜 사는 줄 아냐. 죽어서 태일이 얼굴 보려고 이제껏 산 거야. 미쳐서 죽었으려면 수천 번도 죽었을 세월, 태일이가 부탁한 거 하려고 살았던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한 아들인데……" 엄마가 밉습니다. 태일이 말고도, 아들 태삼이가 있고 딸 순옥이 순덕이가 있는데 말입니다. 이제는 손녀 손자들 자라는 걸 보면서 편안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지금 엄마가 농성장에 찾아가지 않고, 거리집회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할 사람도 없는데 말입니다. 옷도 몸뚱이도 온통 까만 엄마... 고운 옷 한 번 입은 모습 보고 싶다 이보다 더 미운 일이 있습니다. 삼 년 전입니다. 어렵사리 엄마를 꼬여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태어나 한 번도 여행을 간 적이 없다는 엄마에게 추억을 선물하고 싶어 진달래 곱던 봄에 거사를 꾸몄습니다. 싫다던 엄마도 '건다리'의 엉뚱한 생각에 혹해 승낙했습니다. 출발 하루 전날, 엄마와 종로4가 광장시장을 갔습니다. 모처럼 여행인데 건다리 옷 한 벌 사주겠다는 겁니다. 내 옷보다는 엄마 옷 때문에 따라 나섰습니다. 늘 칙칙한 검은색 옷만 입고 다니는 엄마에게 이번에는 꽃무늬가 그려진 화려한 옷을 입히고 싶었습니다. | ▲ 2007년 봄 어머니의 묘소를 찾은 이소선. | ⓒ 오도엽 | |
|
"야 이 건다리야. 내가 이런 옷을 우찌 입냐. 난 못 입는다." 한 번 걸쳐만 보라 해도 손사래를 칩니다. "내가 이런 옷을 입고 다니면 남이 뭐라 하겠냐!" 엄마는 옷을 내팽개치고 돌아섭니다. 억지로 발길을 붙들고 입게 했습니다. "뭐 예쁘기만 하네. 엄마 이거 사자. 응?" 엄마는 못 이기는 척하고 검정 봉투에 담긴 옷을 가방에 쑤셔 넣습니다. 엄마의 몸은 늘 까맣습니다. 아들이 떠난 뒤로 숱한 이들이 전태일을 따른다고 세상에 목숨을 던지며 싸웠습니다. 날마다 영안실로 추도식장으로 분향소로, 그리고 농성장으로 다녀야 했던 엄마는 티셔츠도 겨울 외투도 목도리도 검은색입니다. 옷만이 아닙니다. 몸뚱이도 까맣습니다. 거리에서 경찰서에서 교도소에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엄마는 몽둥이에 맞고 구둣발에 짓밟혀 온통 시커먼 멍투성입니다. 몸뚱이만이 아닙니다. 엄마의 심장은 까맣게 타들어가다 못 해 허연 재가 되었습니다. 만지면 부서지고 후 불면 흩어지고 말 엄마의 심장. 그래서 고운 옷 한 번 입는 모습 꼭 보고 싶은데, 엄마는 한사코 검정 옷만을 고집합니다. 사십 년이 지난 오늘도 말입니다. '늘 엄마 곁에 있을게'라는 말이 목울대를 떨며 올라왔지만
우연찮게 엄마를 만났는데, 홀연히 엄마와 이별할까 걱정입니다. "니 이제 내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펴냄, 2008년) 썼으니까 갈 거지?" "왜? 나 밥 해주기 싫어." "썩을 놈, 누가 싫다고 했냐!" "그럼 신경 쓰지 마. 내가 언제 우찌 살 건가 생각하고 살았어. 그냥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엄마의 속을 후벼 놓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 이리 말했습니다.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늘 엄마 곁에 있을게'라는 말이 목울대를 떨며 올라왔지만 이리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마석 모란공원에 묻는 날, 함께 흙에 묻히려고 했습니다. 너무도 사랑했던 아들을 혼자 보낼 수 없어 관 위로 몸을 던졌습니다. 하지만 사십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만남이 그랬듯 헤어짐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엄마 품을 떠날지, 엄마가 내 품을 떠날지……. 엄마가 사십 년을 아들을 놓지 못했듯, 엄마는 나도 놓고 싶지 않을 겁니다. 아마 내가 엄마 품을 떠나겠지요. "자주 찾아올게"라는 허망한 말을 남기고 말입니다. | ▲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사진 가운데) | ⓒ 전태일재단 | |
|
2008년에 엄마와 오백 날을 먹고 자며 나눈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뒤, <전태일평전> 개정 작업을 했습니다. 전태일의 일기장을 다시 꺼내 읽었습니다. 고인이 된 조영래 선생이 완벽에 가깝게 재현한 전태일의 삶이 오롯이 담긴 <전태일평전>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개정판 교정을 일곱 번을 봤습니다. 단 한 글자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전태일의 죽음을 보기 전에 삶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전태일 삶의 한 부분입니다. 또 느낀 게 있습니다. 전태일의 삶을 제대로 알려면 이소선의 삶을 들어야 합니다. 전태일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에 앞서 전태일의 삶을 몸으로 살아온 이소선을 알아야 합니다. 전태일은 사십 년 전의 인물이 아닌 오늘도 비정규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잠 못 드는 이소선의 몸에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40주기는 기념하거나 기억할 일이 아직은 아닙니다. 엄마가 살아 전태일이 되었듯, 이제는 내가 전태일이 되고 이소선이 되어야 합니다. 굳이 전태일의 사상과 정신을 이곳에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소선의 삶의 흔적을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 눈길을 잠시 옆으로 돌리면 전태일이 사랑했고, 이소선이 함께했던 이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 나는 돌아가야 한다 / 꼭 돌아가야 한다 /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전태일 일기> 가운데서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부탁하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 그라는 거라.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그라면 또 피가 퍽 쏟아지고……. 그라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그게 태일이 마지막 말이었어.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나도 정신을 잃었어. -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 가운데서 창신동 구불구불한 골목길 옥탑방, 오늘도 엄마의 방에는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두런두런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방 틈 불빛 사이로 태일이가, 비정규직이, 노동이 흘러나옵니다. 엄마의 방문을 열지 못하고 돌아섭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서며 엄마의 창문을 봅니다. 조용히 속삭입니다. "엄마를 부탁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