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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에 대하여

[환경칼럼]농업과 문명의 종말

황대권| ‘야생초 편지’ 저자
내가 사는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에 수만평 넓이를 자랑하는 큰 밭이 하나 있다. 오늘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니 넓은 밭에 그 비싸다는 배추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아마도 올 겨울 김장감으로 내다 팔 모양이다. 나 역시 산속 농장에 김장거리를 심어놓았다. 아침마다 밭고랑에 들러붙어 벌레를 잡는 나로서는 참으로 편하게도 농사를 짓는구나 싶어 은근히 부아가 난다. 달포 전에 같은 땅에 사료용 옥수수를 수확하고 바로 배추를 심었는데 밭에 풀 하나 없고 배추는 반질반질한 게 구멍 하나 없다. 그 넓은 밭을 이토록 말끔하게 유지하려면 화학비료와 제초제, 살충제를 듬뿍 쳐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농사를 지어 큰돈을 버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게 대규모 화학영농의 문제이다. 이웃동네에서 주유소를 하는 한 지인은 가게를 부인에게 맡겨놓고 남의 땅을 빌려 대규모 농사를 지었다가 지난 5년간 수억원을 까먹고 지금은 다시 주유소 영업에 전념하고 있다.

완전히 기계화되어 흙을 전혀 밟지도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시내의 고층아파트에 살면서 자동차로 출퇴근하며 농사를 짓는다. 화학비료와 비닐만 있으면 땅의 상태와 날씨에 상관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유전자를 조작해 조물주도 본 적이 없는 농산물을 만들어낸다. 심지어 자기 땅과 돈이 없어도 은행 실적과 경영능력만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농부라는 말보다 벤처기업의 사장님으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리하여 들판에 ‘기업지천하지대본’이라는 만장이 나부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시대이다.

이런 사태를 농부가 원했을 리는 없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농부들은 가차없이 직업전선에서 퇴출당하고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새로운 농민만 살아남았다. 그렇다 보니 어느덧 전통적 의미의 농업은 사라지고 기술과 경영능력(Technology & Management)을 중시하는 기업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친환경농업이 각광을 받고는 있지만 다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도 먹고살아야 하는 업종이다 보니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살아남을 수 없기에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이 시대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이다.

믿고 싶지 않지만 많은 과학자와 선지자들이 문명의 종말을 예고하고 있다. 책방엘 나가 보면 종말과 관련된 도서가 책장으로 하나는 된다. 세기가 바뀔 때마다 또는 큰 변괴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 종말론이 유행하곤 했지만 지금의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시대가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 변화가 지질학적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농업만 보더라도 도무지 출구가 없다. 그런 식으로 농사를 짓다가 만에 하나 에너지 공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조작된 유전자가 환경적응에 실패라도 하게 되면 대부분의 농사는 바로 중단되고 만다.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석유에너지의 공급이 수십년 내에 중단될 것과 기후변화로 인한 천재지변의 가능성을 수없이 예고하고 있다. 식량생산의 중단은 곧바로 문명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다.

원래 농업은 인위의 문명이 자연적응에 성공한 대표적인 산업이다. 그런 농업이 시대상황을 좇아 대자연의 법칙을 정면으로 어기고 여타 기업과 마찬가지로 지구생태계를 파괴하는 쪽으로 계속 간다면 문명의 종말은 더욱 앞당겨질 것이 분명하다. 다른 것은 다 망해도 농업이 자연의 질서 안에 자리한다면 최소한 새로운 미래를 건설할 수 있는 근거는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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