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취재팀 http://wherelive.khan.kr
ㆍ소통 공간 없는 ‘아파트 숲’… 정글사회 고스란히 투영
ㆍ“아파트 = 새로운 계층”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건물 외관조차 상업화
ㆍ이익·효율성 앞세운 채 주변과의 조화는 뒷전… 도시 균형발전 저해
“정신이 도시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거꾸로 도시의 모습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문명비평가 멈포드(L. Mumford)는 도시의 형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이처럼 정의한다. 이 말을 아파트가 점령한 한국의 대도시에 거울로 비춰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보다 개인의 이익이 앞서는 ‘정글로서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오늘날 아파트의 형태를 통해 드러난다.
서울은 아파트의 숲이다. 해마다 새로 들어서는 건물 중 아파트 비율이 2007년 기준으로 30.8%를 차지한다. 이 같은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축물이 파괴된 상황에서 전통가치나 건축에 대한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집합공간의 개념, 일종의 ‘수용소’로서 아파트라는 주거시설이 도입된 데 따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철, 콘크리트, 유리 등의 자재로 이른 시일에 대량의 건축물을 지어올리는 서구의 국제주의양식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대도시에 인구집중에 따른 주택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입됐다.
그래서 우리의 아파트는 대부분 ‘성냥갑’ 같은 판상형이다. 김성홍 교수(서울시립대 건축학부)는 수요자의 욕망과 민간공급자들의 이익창출이 극점을 이루며 만난 형태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수요자인 한국인은 집과 외부와 접한 면적이 최대화되도록 방들이 가로로 길게 배열된 횡장형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일조가 좋은 남향을 선호하는 데다, 바깥 경치가 잘 보이는 조망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주차장이 있는 아파트를 요구하죠. 그리고 건설사들은 좁은 면적에 최대의 층수, 최다 가구를 건축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합니다. 양측의 욕망을 채우려면 한국에서는 사실상 ‘아파트’ 이외의 주거형식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세계 3위이고, 인구숫자만으로 볼 때 2006년 현재 1023만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내 소유의 큰 집’이다. 중산계급 이상에게 집이 사회적 지위를 대외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그래서 고층의 아파트들은 ‘내부공간’이 극대화되는 중대형 평형 위주로 지어진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건물과 건물이 유기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도시맥락으로 볼 때 이 같은 아파트의 단지는 ‘섬’과도 같다. 주변 건물, 도로나 보행자 동선 등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로서 배려가 이뤄지기 전에 최대 용적률과 건폐율의 ‘이익’과 ‘효율성’만이 공간을 지배한다.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은 주변의 행인이 선뜻 발딛기 꺼려지는 녹지가 둘러싸면서 되려 주변과의 차별화가 시도되고, 해당 지역은 거주민들만의 공간으로 독점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주택단지를 관통하는 도로는 외부에 개방되지 않으면서 유기적인 길의 흐름은 끊긴다. 그래서 도시에 아파트가 늘어날수록 그들만의 집단화는 심화된다. 또 단지가 커질수록 도시의 공공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이처럼 우리의 대도시에는 사람이 소통하는 공원과 광장 등의 공공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들은 돈을 주고 사유화된 공간 서비스를 소비하게 된다. 찜질방, 노래방, 카페 등의 각종 ‘방’들이 한국에서 성행하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원래는 정부 등 공공영역에서 했어야 하는 그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민간이 공급하고 민간이 소비하는 것이다.
건축평론가 전진삼씨는 “공공공간이 부족한 도시일수록 더 좁고 갑갑하게 느껴져서 개인이 더 넓은 사적공간, 더 넓은 집을 욕망하도록 만든다”며 “서구의 경우 공공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집이 다소 좁다 하더라도 공원과 광장, 박물관 등 집 밖에 너른 공간을 통해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또한 공공공간을 가꿔나갈 재원인 세수는 지방자치에 따라 도시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한다. 서울의 경우 자치구 가운데 강남구와 다른 구는 최고 6배 가까운 재산세 수입의 격차를 보인다. ‘좋은 동네-부동산 가격 상승-세수입 증가-재투자-좋은 동네’의 선순환 또는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아파트의 ‘계급지표화’에 따라 건물 외형 또한 ‘차별적인 신분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건물들은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권위적인 형태를 취한다. 일례로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고층아파트 군단이 일렬로 늘어선 위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강남구 도곡동의 주상복합인 타워팰리스 단지는 최고높이 264m, 73층의 높이로 주변의 건물을 압도하며 양재천을 점령한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랜드마크’로 자리매김을 노렸다뿐 조경에서 주변과의 조화는 부차적인 고려대상으로 밀려났다.
유리로 외장마감을 하는 ‘커튼월’은 ‘시각의 권력’을 상징한다. 김성홍 교수는 “조망은 권력이며 돈이다. 창이 투명해지고 커질수록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공간의 장벽은 높아진다”며 “타워팰리스의 거실은 거리의 일상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투명해질 수 있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며 건물로의 진입은 철저히 통제된다는 점에 있어서 ‘유리’는 투명함의 역설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승자독식’이란 우리 사회 정글의 규칙은 자연경관을 독점한 집들의 모습에서도 반복된다. 정기용씨는 “인위적인 도시환경 속에서 자연경관을 선호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어떤 환경조형물보다 시민들에게 중요한 조망의 대상은 자연”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주택개발과정에서 우리는 이 같은 원칙을 잃어버렸다. 경관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가진 자의 독점대상이 된다. 풍경의 공공성은 실종된 지 오래다.
한강변에는 아파트들이 일렬로 늘어서 병풍을 쳤고, 능선이 수려한 수도권의 산자락은 흉물스러운 대단위 아파트단지에 점령됐다. 김철수 계명대 교수(건축학)는 저서 <도시공간의 이해>를 통해 “특히 고층아파트의 등장으로 도시 주변녹지로의 시야가 차단돼 자연적 요소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이 침해를 받는다. 특히 도시외곽 구릉지로의 시야차단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물론 도시 전체 경관의 질을 저하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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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아파트 = 새로운 계층”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건물 외관조차 상업화
ㆍ이익·효율성 앞세운 채 주변과의 조화는 뒷전… 도시 균형발전 저해
“정신이 도시 속에 그 모습을 나타내고 거꾸로 도시의 모습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도시문명비평가 멈포드(L. Mumford)는 도시의 형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이처럼 정의한다. 이 말을 아파트가 점령한 한국의 대도시에 거울로 비춰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가치보다 개인의 이익이 앞서는 ‘정글로서의 한국사회’의 모습은 오늘날 아파트의 형태를 통해 드러난다.
서울은 아파트의 숲이다. 해마다 새로 들어서는 건물 중 아파트 비율이 2007년 기준으로 30.8%를 차지한다. 이 같은 비율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렵다.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건축물이 파괴된 상황에서 전통가치나 건축에 대한 고민을 할 틈도 없이 집합공간의 개념, 일종의 ‘수용소’로서 아파트라는 주거시설이 도입된 데 따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량으로 생산되는 철, 콘크리트, 유리 등의 자재로 이른 시일에 대량의 건축물을 지어올리는 서구의 국제주의양식은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대도시에 인구집중에 따른 주택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입됐다.
그래서 우리의 아파트는 대부분 ‘성냥갑’ 같은 판상형이다. 김성홍 교수(서울시립대 건축학부)는 수요자의 욕망과 민간공급자들의 이익창출이 극점을 이루며 만난 형태라고 말한다. “아파트의 수요자인 한국인은 집과 외부와 접한 면적이 최대화되도록 방들이 가로로 길게 배열된 횡장형을 좋아합니다. 그중에서도 일조가 좋은 남향을 선호하는 데다, 바깥 경치가 잘 보이는 조망권, 집에서 가까운 곳에 주차장이 있는 아파트를 요구하죠. 그리고 건설사들은 좁은 면적에 최대의 층수, 최다 가구를 건축해 이익을 극대화하려 합니다. 양측의 욕망을 채우려면 한국에서는 사실상 ‘아파트’ 이외의 주거형식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의 인구밀도는 세계 3위이고, 인구숫자만으로 볼 때 2006년 현재 1023만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지만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은 ‘내 소유의 큰 집’이다. 중산계급 이상에게 집이 사회적 지위를 대외적으로 표시하기 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그래서 고층의 아파트들은 ‘내부공간’이 극대화되는 중대형 평형 위주로 지어진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건물과 건물이 유기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도시맥락으로 볼 때 이 같은 아파트의 단지는 ‘섬’과도 같다. 주변 건물, 도로나 보행자 동선 등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장소로서 배려가 이뤄지기 전에 최대 용적률과 건폐율의 ‘이익’과 ‘효율성’만이 공간을 지배한다.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은 주변의 행인이 선뜻 발딛기 꺼려지는 녹지가 둘러싸면서 되려 주변과의 차별화가 시도되고, 해당 지역은 거주민들만의 공간으로 독점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주택단지를 관통하는 도로는 외부에 개방되지 않으면서 유기적인 길의 흐름은 끊긴다. 그래서 도시에 아파트가 늘어날수록 그들만의 집단화는 심화된다. 또 단지가 커질수록 도시의 공공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최근 강남 등지에 조성된 30층 이상의 초고층아파트 단지의 경우가 그 예다. 강남의 ‘브랜드’ 단지인 ㅈ아파트 안에는 아기자기한 길과 공원, 분수대와 카약장이 있는 놀이터, 잔디가 깔린 축구장 등 공공공간이 형성돼 있지만 막상 거주민들은 “외부인이 자주 들락거려 꺼림칙하다”는 불편한 반응을 보인다. 독일 베를린 등 서구 아파트의 경우 건물이 블록을 형성하면서 거리와 바로 인접하고, 건물의 저층부에 카페와 상점 등이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시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우리의 대도시에는 사람이 소통하는 공원과 광장 등의 공공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시민들은 돈을 주고 사유화된 공간 서비스를 소비하게 된다. 찜질방, 노래방, 카페 등의 각종 ‘방’들이 한국에서 성행하는 것은 이 같은 맥락이다. 원래는 정부 등 공공영역에서 했어야 하는 그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음에 따라 민간이 공급하고 민간이 소비하는 것이다.
건축평론가 전진삼씨는 “공공공간이 부족한 도시일수록 더 좁고 갑갑하게 느껴져서 개인이 더 넓은 사적공간, 더 넓은 집을 욕망하도록 만든다”며 “서구의 경우 공공공간이 충분하기 때문에 집이 다소 좁다 하더라도 공원과 광장, 박물관 등 집 밖에 너른 공간을 통해 충분히 해소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또한 공공공간을 가꿔나갈 재원인 세수는 지방자치에 따라 도시의 균형적인 발전을 저해한다. 서울의 경우 자치구 가운데 강남구와 다른 구는 최고 6배 가까운 재산세 수입의 격차를 보인다. ‘좋은 동네-부동산 가격 상승-세수입 증가-재투자-좋은 동네’의 선순환 또는 악순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아파트에 산다’는 것은 ‘기호의 소비’에 해당한다. 건축가 정기용씨는 저서 <사람, 건축, 도시>를 통해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 어디 사냐고 물으면 ‘나는 현대에 살고, 너는 삼성에 살며, 그 친구는 대우에 살고, 저 친구는 우성에 산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동네가 아니라 대기업체의 이름 속에 당당하게 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기보다는 (집이라는) 상품을 소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진삼 평론가는 이것을 ‘선민주의(選民主義)’로 요약한다. “건설회사가 아파트에 거주함으로써 ‘새로운 계층’으로 구분하도록 수요자를 유인”하면서 ‘이 집에 살면 특별하다’는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아파트의 ‘계급지표화’에 따라 건물 외형 또한 ‘차별적인 신분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건물들은 주변의 경관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 권위적인 형태를 취한다. 일례로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경부고속도로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고층아파트 군단이 일렬로 늘어선 위압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강남구 도곡동의 주상복합인 타워팰리스 단지는 최고높이 264m, 73층의 높이로 주변의 건물을 압도하며 양재천을 점령한 듯한 풍경을 연출한다. ‘랜드마크’로 자리매김을 노렸다뿐 조경에서 주변과의 조화는 부차적인 고려대상으로 밀려났다.
유리로 외장마감을 하는 ‘커튼월’은 ‘시각의 권력’을 상징한다. 김성홍 교수는 “조망은 권력이며 돈이다. 창이 투명해지고 커질수록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공간의 장벽은 높아진다”며 “타워팰리스의 거실은 거리의 일상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투명해질 수 있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으며 건물로의 진입은 철저히 통제된다는 점에 있어서 ‘유리’는 투명함의 역설을 갖는다”고 지적한다.
아파트단지 자체가 군사문화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규칙적 간격으로 늘어선 건물들, 위병소처럼 내부 출입을 통제하는 폐쇄적인 공간의 심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야간에는 이들 아파트를 지은 대기업의 ‘브랜드’를 조명을 켜는 방식으로 주변지역과의 차별화가 시도된다. 도시민들은 이 같은 간판을 보기 싫어도 반강제로 봐야 하는 신세다. 건축 공공성의 기본이라는 건물의 외관은 상업주의에 점령당한 지 오래다.
‘승자독식’이란 우리 사회 정글의 규칙은 자연경관을 독점한 집들의 모습에서도 반복된다. 정기용씨는 “인위적인 도시환경 속에서 자연경관을 선호하는 것은 그야말로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어떤 환경조형물보다 시민들에게 중요한 조망의 대상은 자연”이라고 정의한다. 하지만 주택개발과정에서 우리는 이 같은 원칙을 잃어버렸다. 경관은 모두의 것이 아니라 가진 자의 독점대상이 된다. 풍경의 공공성은 실종된 지 오래다.
한강변에는 아파트들이 일렬로 늘어서 병풍을 쳤고, 능선이 수려한 수도권의 산자락은 흉물스러운 대단위 아파트단지에 점령됐다. 김철수 계명대 교수(건축학)는 저서 <도시공간의 이해>를 통해 “특히 고층아파트의 등장으로 도시 주변녹지로의 시야가 차단돼 자연적 요소로 이루어진 스카이라인이 침해를 받는다. 특히 도시외곽 구릉지로의 시야차단은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물론 도시 전체 경관의 질을 저하시킨다”고 지적한 바 있다.
■ 특별취재팀 = 최민영(사회부)·이주영(산업부)·김기범(사회부)·임아영(전국부) 기자, 김설아·황성호 인턴기자
■ 공식 블로그 = http://whereliv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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