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폴 김 theodorepaul@naver.com
ㆍ자연의 재탄생 아닌 과대망상… 물고기·철새·사람 내쫓는 파괴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은 다음 두 원칙이 지켜져야 정당성을 가진다. 첫째는 장마와 가뭄 피해 방지며, 둘째는 자연생태계가 보존된 관광·휴식·문명 장소의 탄생이다. 그런데 첫 번째 원칙이 두 번째를 장악한다면 이 정책은 건설이 아닌 파괴로 둔갑한다. 자연생태보존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동식물군의 생태계에 지역성을 고려한 새로운 자연환경의 탄생을 의미하지 지역 전체를 불도저로 싹 쓸어내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단정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관광·휴식의 장소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지역 고유의 자연생태계(동식물군)를 조성하는 것이지 유럽형 주택·관광단지를 개발하여 강변을 참혹한 부동산 투기의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강은 인류 문명의 중심지이므로 각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흔적이 표현되는 상징적 장소가 되어야 한다. 즉 강에서 출발하여 마을, 도시로 변천했던 문명의 기원이 강변에 함축되어야 하는데 남아 있는 역사적 흔적들을 도리어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4대강 사업은 강을 살리는 사업이다.
수질오염은 절대 없으니 나를 믿으라’며 장난감 물고기를 보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 대신 4대강 유역은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 강 주변 모래사장과 생태계가 심하게 훼손되어 물고기·철새들은 사라졌고, 건설현장에서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로 발암물질이 기준치보다 20배 이상, 수질은 4등급으로 악화되어 상수원이나 공업용수도 아닌 농업용수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산골에 있는 저수지 둑 건설로 지역주민을 내쫓거나 4대강 건설사들이 다단계 하도급 방식을 취하여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하는 해괴망측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 현상은 인간 중심의 정치가 권력자 개인의 욕망으로 뒤바뀐 경우로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다. 즉 지난 10년 전부터 지자체들이 개최했던 수많은 국제행사는 재정낭비·혼란의 부작용만 있었지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도시는 시민을 위한 축제의 무대이기에 행사는 불가결의 요소이지만 그 목적이 시민이 아닌 단체장의 업적과시·정치권력의 홍보로 변질된 것이다.
왜 우리 도시에는 정치의 원칙이 거짓과 위선으로 둔갑되어 나타나는가? 그것은 시민 중심의 정치철학을 권력쟁취·욕망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정신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들이 도덕성·윤리로 걸러져 승화되어야 문명이 발달하며, 승화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도시와 사회는 일관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한 정치가의 무지와 욕망이 원칙과 합리성으로 걸러지지 않고 몰지각한 권력의 우격다짐으로 추진되는 탓에 자연과 도시가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그럼 인간의 욕망이 걸러지는 정치란 어떤 것일까? 어느 산 암반 위에 세워져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 지형학적으로 돌이 많아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곳 시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도시는 나무가 없는 곳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청에서 시내에 공원을 계획하고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 나무를 심었네! 그런데 공원에 나무 몇 그루가 뭐야’라고 생각하고 너도나도 나무를 심었다. 나무 몇 그루의 공원은 훌륭한 숲이 되었고, 시민들은 이 공원을 계기로 집·동네마다 나무를 심어 그들의 도시를 돌의 도시에서 숲의 도시로 변화시켰다. 정치가 권력쟁취에서 시민의 삶으로 승화되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사막과 바다에 터무니없는 호수와 인공 섬을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외화를 부채로 끌어들여 국가위기의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야기한 과대망상정치와 근본이 다르다. 여기서 공원은 정책이며 나무심기는 방법론이다. 돌이 많다고 조각공원을 만들었다면 정책은 훌륭하지만 방법론은 주어진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또 정부가 경제 활성·고용창출을 구실로 정경유착하여 공원 대신 골재채취장을 허가했다면 이 도시는 폐광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시민이 감동하고 미래가 제시된 정책만이 도시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짓고 허물고 재개발’의 시장경제를 외치는 정치가에게 도시를 맡긴다는 것은 도시를 파괴하라고 폭탄을 주는 것과 같다. 올바른 사고의 정치가는 일확천금의 기회와 대박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용납하지 않는다. 도시 전체가 흰색이라면 누가 감히 자기 집을 시뻘겋게 칠하겠는가? 주위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고 도시 전체가 놀랄 것이다.
시민 중심의 정치가 행해지는 사회는 누가 엉뚱한 짓을 하는지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보지만, 권력에 미친 정치가가 난무하는 사회는 자연과 문화가 파괴되는 심각한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놀라거나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 경향신문 & 경향닷컴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사업은 다음 두 원칙이 지켜져야 정당성을 가진다. 첫째는 장마와 가뭄 피해 방지며, 둘째는 자연생태계가 보존된 관광·휴식·문명 장소의 탄생이다. 그런데 첫 번째 원칙이 두 번째를 장악한다면 이 정책은 건설이 아닌 파괴로 둔갑한다. 자연생태보존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동식물군의 생태계에 지역성을 고려한 새로운 자연환경의 탄생을 의미하지 지역 전체를 불도저로 싹 쓸어내고 콘크리트 구조물로 단정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다. 관광·휴식의 장소란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하는 지역 고유의 자연생태계(동식물군)를 조성하는 것이지 유럽형 주택·관광단지를 개발하여 강변을 참혹한 부동산 투기의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남부 미디(Midi) 강은 콘크리트 수중보와 구조물 공간 대신 동식물이 한데 어울려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신비를 선택했다.
수질오염은 절대 없으니 나를 믿으라’며 장난감 물고기를 보이던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 대신 4대강 유역은 심각하게 오염되고 있다. 강 주변 모래사장과 생태계가 심하게 훼손되어 물고기·철새들은 사라졌고, 건설현장에서 배출하는 각종 오염물질로 발암물질이 기준치보다 20배 이상, 수질은 4등급으로 악화되어 상수원이나 공업용수도 아닌 농업용수로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산골에 있는 저수지 둑 건설로 지역주민을 내쫓거나 4대강 건설사들이 다단계 하도급 방식을 취하여 엄청난 부당이득을 취하는 해괴망측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 현상은 인간 중심의 정치가 권력자 개인의 욕망으로 뒤바뀐 경우로 전국 곳곳에서 나타난다. 즉 지난 10년 전부터 지자체들이 개최했던 수많은 국제행사는 재정낭비·혼란의 부작용만 있었지 성과는 없었다고 한다. 도시는 시민을 위한 축제의 무대이기에 행사는 불가결의 요소이지만 그 목적이 시민이 아닌 단체장의 업적과시·정치권력의 홍보로 변질된 것이다.
왜 우리 도시에는 정치의 원칙이 거짓과 위선으로 둔갑되어 나타나는가? 그것은 시민 중심의 정치철학을 권력쟁취·욕망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정신심리학자 프로이드는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들이 도덕성·윤리로 걸러져 승화되어야 문명이 발달하며, 승화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도시와 사회는 일관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한 정치가의 무지와 욕망이 원칙과 합리성으로 걸러지지 않고 몰지각한 권력의 우격다짐으로 추진되는 탓에 자연과 도시가 무참히 파괴되고 있다.
그럼 인간의 욕망이 걸러지는 정치란 어떤 것일까? 어느 산 암반 위에 세워져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작은 동네가 있었다. 지형학적으로 돌이 많아 나무가 크게 자라지 않기 때문에 그곳 시민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도시는 나무가 없는 곳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청에서 시내에 공원을 계획하고 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그것을 본 동네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어 나무를 심었네! 그런데 공원에 나무 몇 그루가 뭐야’라고 생각하고 너도나도 나무를 심었다. 나무 몇 그루의 공원은 훌륭한 숲이 되었고, 시민들은 이 공원을 계기로 집·동네마다 나무를 심어 그들의 도시를 돌의 도시에서 숲의 도시로 변화시켰다. 정치가 권력쟁취에서 시민의 삶으로 승화되었기에 가능했다.
이것은 사막과 바다에 터무니없는 호수와 인공 섬을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외화를 부채로 끌어들여 국가위기의 모라토리엄(moratorium)을 야기한 과대망상정치와 근본이 다르다. 여기서 공원은 정책이며 나무심기는 방법론이다. 돌이 많다고 조각공원을 만들었다면 정책은 훌륭하지만 방법론은 주어진 한계를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또 정부가 경제 활성·고용창출을 구실로 정경유착하여 공원 대신 골재채취장을 허가했다면 이 도시는 폐광지로 사라졌을 것이다.
시민이 감동하고 미래가 제시된 정책만이 도시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 ‘짓고 허물고 재개발’의 시장경제를 외치는 정치가에게 도시를 맡긴다는 것은 도시를 파괴하라고 폭탄을 주는 것과 같다. 올바른 사고의 정치가는 일확천금의 기회와 대박만이 존재하는 약육강식의 사회를 용납하지 않는다. 도시 전체가 흰색이라면 누가 감히 자기 집을 시뻘겋게 칠하겠는가? 주위사람들이 깜짝 놀랄 것이고 도시 전체가 놀랄 것이다.
시민 중심의 정치가 행해지는 사회는 누가 엉뚱한 짓을 하는지 모든 사람이 다 지켜보지만, 권력에 미친 정치가가 난무하는 사회는 자연과 문화가 파괴되는 심각한 일이 벌어져도 사람들은 놀라거나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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