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폴 김 theodorepaul@naver.com
ㆍ조선총독부 등 역사적 장소 없애고 무분별한 재개발로 민족 정기 말살
도시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만일 도시가 ‘살기 편하다’는 기능만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곳은 빽빽하게 배치된 고층아파트만 가득할 것이다. 파리 근교 ‘천국’이라는 고급아파트에 사는 어느 부인은 “커다란 콘크리트건물 구멍 안에 사는 두더지 같다. 먼지나 소리 없이 조용한 이 아파트가 감옥같아 고통스럽다. 시간이 빨리 가라고 창문 아래의 자동차 숫자나 세고 있다”고 말한다. 모양은 천국이지만 실제 삶은 지옥인 것이다.
도시는 인간의 삶이 연출되는 무대로, 훌륭한 연기는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볼 연극을 선택할 때 광고보다 줄거리를 챙기고, 표지의 화려함보다 내용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처럼 도시라는 무대는 고층빌딩보다 감동적인 시나리오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도시의 시나리오는 그 형태와 사회적 요인, 역사의 보전, 도시의 다이내믹성과 품격을 지키는 도덕성, 유동성으로 완성된다.
도시 형태란 지리적·건축적·자연생태적 요인으로 구성된 도시의 스타일과 영역이며, 사회적 요인은 사회활동의 모든 분야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발전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사회 시스템을 의미한다. 역사의 보전은 도시에서 인간의 삶과 존재성을 증명하며, 도덕성이란 무례하고 자기욕심만 채우는 원시인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행동하게 하는 규범과 원칙이다. 유동성이란 도시와 지방을 연계해 균등한 삶을 이루게 하는 네트워크다.
이 중 역사의 보전은 도시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그 가치는 개인의 소장품이 아니라 공공의 것일 때 나타난다. 어느 재벌의 빌딩이 불에 타버렸다면 이는 단순히 재산유실이지만 숭례문 화재는 온 국민을 비탄에 잠기게 했다. 인간은 살면서 각자의 역사를 만들지만 보전가치는 공공성에서 비롯된다.
선조들이 살았던 장소는 우리의 근원과 실체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다. 조상에게 부동산을 상속받았다는 사실은 일확천금의 행운이 아니다. 철저하게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상속해야 하는 의무를 뜻한다. 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인간들을 고발해 반성하게 만든다. 한국과 같은 민족분단의 시련을 거친 독일은 과거 독재자들이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던 장소들을 보전하여 전 세계에 낱낱이 고발하지만 한국은 역사적 증거들을 부동산 요지로 둔갑시켜 팔아버렸다. 4년 동안 약 400만명 이상의 유태인과 폴란드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신체로 비누·카펫·수제품들을 만들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태인들을 잡아 아우슈비츠로 보냈던 베를린의 안알터(Anhalter)역의 장소는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한국은 1995년 민족정기 부활을 외치며 일제침략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를 소멸시켰다. 50년 동안 정부청사로 사용한 일제의 건물을 사라지게 한 것은 일제가 36년간 저지른 학살과 만행의 장소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처참했던 위안부들의 삶, 독립열사의 사지와 목을 자르는 대학살, 문화의 말살행위를 전 세계에 고발해 민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그 건물을 때려 부수는 것보다 더 진정한 민족정기의 부활이었을 것이다.
한국 고유문화를 말살하는 일제 무단정치에 대항해 1919년 3월1일 일어난 독립민족운동은 주요 지도자들이 종로구 경운동에서 모여 협의하고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완성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많은 독립열사들이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 민족독립운동이 실제로 일어난 장소에는 볼품없는 콘크리트 기념비만 있고, 엉뚱한 곳에 세워진 거창한 기념관에서의 ‘전설의 이야기’가 되었다. 3·1운동은 폭력의 투쟁이 아닌 정의와 인도주의를 내세운 평화 시위였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동양의 평화로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라는 독립선언문은 우리 선조들의 인격과 성품이 얼마나 고귀했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 고귀함과 성스러움의 장소인 옛 종로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부동산 건물들로 난장판이다. 민족의 대표 48인이 태어나 살아온 실제의 장소는 보전되어 있는지, 도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흔적도 기억조차 사라지고 있다. 영광스럽고 숭고한 선조들의 역사적 장소를 보전하기는커녕 꼴불견의 재개발로 민족 정기를 말살하면서 세계를 향해 서울디자인 만세를 외치고 민족의 긍지를 운운하고 있다.
도시의 정체성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만일 도시가 ‘살기 편하다’는 기능만으로 만들어졌다면 그곳은 빽빽하게 배치된 고층아파트만 가득할 것이다. 파리 근교 ‘천국’이라는 고급아파트에 사는 어느 부인은 “커다란 콘크리트건물 구멍 안에 사는 두더지 같다. 먼지나 소리 없이 조용한 이 아파트가 감옥같아 고통스럽다. 시간이 빨리 가라고 창문 아래의 자동차 숫자나 세고 있다”고 말한다. 모양은 천국이지만 실제 삶은 지옥인 것이다.
도시는 인간의 삶이 연출되는 무대로, 훌륭한 연기는 시나리오에서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볼 연극을 선택할 때 광고보다 줄거리를 챙기고, 표지의 화려함보다 내용으로 책을 구입하는 것처럼 도시라는 무대는 고층빌딩보다 감동적인 시나리오가 더 중요하다. 이것이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도시의 시나리오는 그 형태와 사회적 요인, 역사의 보전, 도시의 다이내믹성과 품격을 지키는 도덕성, 유동성으로 완성된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중심의 안알터역은 나치의 만행을 인류의 후손들에게 폭로하기 위해 부서진 모습 그대로 70여년을 보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제가 저지른 잔학한 만행의 장소가 어디인지, 그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도시 형태란 지리적·건축적·자연생태적 요인으로 구성된 도시의 스타일과 영역이며, 사회적 요인은 사회활동의 모든 분야를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발전의 의무를 다하는 정치·사회 시스템을 의미한다. 역사의 보전은 도시에서 인간의 삶과 존재성을 증명하며, 도덕성이란 무례하고 자기욕심만 채우는 원시인을 인격적인 인간으로 행동하게 하는 규범과 원칙이다. 유동성이란 도시와 지방을 연계해 균등한 삶을 이루게 하는 네트워크다.
이 중 역사의 보전은 도시 정체성을 증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그 가치는 개인의 소장품이 아니라 공공의 것일 때 나타난다. 어느 재벌의 빌딩이 불에 타버렸다면 이는 단순히 재산유실이지만 숭례문 화재는 온 국민을 비탄에 잠기게 했다. 인간은 살면서 각자의 역사를 만들지만 보전가치는 공공성에서 비롯된다.
선조들이 살았던 장소는 우리의 근원과 실체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다. 조상에게 부동산을 상속받았다는 사실은 일확천금의 행운이 아니다. 철저하게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상속해야 하는 의무를 뜻한다. 또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인간들을 고발해 반성하게 만든다. 한국과 같은 민족분단의 시련을 거친 독일은 과거 독재자들이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던 장소들을 보전하여 전 세계에 낱낱이 고발하지만 한국은 역사적 증거들을 부동산 요지로 둔갑시켜 팔아버렸다. 4년 동안 약 400만명 이상의 유태인과 폴란드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신체로 비누·카펫·수제품들을 만들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태인들을 잡아 아우슈비츠로 보냈던 베를린의 안알터(Anhalter)역의 장소는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한국은 1995년 민족정기 부활을 외치며 일제침략의 상징인 조선총독부를 소멸시켰다. 50년 동안 정부청사로 사용한 일제의 건물을 사라지게 한 것은 일제가 36년간 저지른 학살과 만행의 장소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한 것이다. 처참했던 위안부들의 삶, 독립열사의 사지와 목을 자르는 대학살, 문화의 말살행위를 전 세계에 고발해 민족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 그 건물을 때려 부수는 것보다 더 진정한 민족정기의 부활이었을 것이다.
한국 고유문화를 말살하는 일제 무단정치에 대항해 1919년 3월1일 일어난 독립민족운동은 주요 지도자들이 종로구 경운동에서 모여 협의하고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완성하였다. 독립운동으로 많은 독립열사들이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 민족독립운동이 실제로 일어난 장소에는 볼품없는 콘크리트 기념비만 있고, 엉뚱한 곳에 세워진 거창한 기념관에서의 ‘전설의 이야기’가 되었다. 3·1운동은 폭력의 투쟁이 아닌 정의와 인도주의를 내세운 평화 시위였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동양의 평화로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기 위한 목적이다”라는 독립선언문은 우리 선조들의 인격과 성품이 얼마나 고귀했는지를 증명한다.
그러나 그 고귀함과 성스러움의 장소인 옛 종로의 흔적은 사라지고, 지금은 부동산 건물들로 난장판이다. 민족의 대표 48인이 태어나 살아온 실제의 장소는 보전되어 있는지, 도시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흔적도 기억조차 사라지고 있다. 영광스럽고 숭고한 선조들의 역사적 장소를 보전하기는커녕 꼴불견의 재개발로 민족 정기를 말살하면서 세계를 향해 서울디자인 만세를 외치고 민족의 긍지를 운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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