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로마제국에는 수많은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콜로세움으로 대표되는 원형 경기장이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 나오는 전차 경기장 같은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유물이니 온전히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지요. 하지만 긴 세월 동안 사라져버린 것이 더 많은 건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흔적이나마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다. 현대 로마의 나보나 광장이 좋은 예입니다. 옛 전차 경기장 자리는 광장이 되었고, 관중석이던 곳은 르네상스 시대의 건물로 대체되었습니다. 광장이 이상하리만큼 길고 좁은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도시들에도 희미하게나마 옛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대구는 재미있는 예가 됩니다. 조선시대 작은 읍성이던 곳이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남아 있던 성벽은 이제 가장 번화한 길로 대체되었습니다. 지하철 중앙로역을 에워싸고 있는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가 대구읍성의 성벽이 있던 곳입니다. 옛것이 사라져버린 점은 아쉬운 일이지만 다행히 나보나 광장에도, 대구 동성로에도 많은 사람이 오갑니다. 그들은 시간의 흔적 위에서 현재를 즐깁니다. 개인적으로는 변형된 형태의 자취가 복원된 상태의 모조품보다 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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