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거의 사회학

[도시·사회·시민 이야기](4) ‘역사적 실체’ 파괴하는 개발은 테러

테오도르 폴 김 | 도시건축학자 theodore.kim@orange.fr

ㆍ강북을 강남처럼 만들면 ‘주거 권리’ 빼앗는 것

도시 시민은 주거의 권리를 가진다. 주거권리란 무엇인가? 도시란 가정을 이루는 집이 동네·마을·도시로 확장되어 가족의 삶, 사유재산의 개념이 공공의 것으로 전이된 장소다. 그래서 도시는 가정의 보호자처럼 자식의 성장·교육·사회 활동과정을 지키고 보장해야 하는데, 이것이 주거권리다. 주거권리에는 도시 형성의 최종 목적인 철학·사회학·미학·인류학적 가치가 내포된다. 역사적으로 도시에서는 늘 주거권리의 회복을 위한 시위가 이어졌다. 때론 불순분자 때문에 권리의 본질이 세력 쟁취의 수단으로 변질됐지만, 권리 회복을 위한 시위는 민주사회의 본질적 권리였다. 시민 시위는 합리성과 휴머니즘을 거부하는 법과 제도를 몰아내고 공정한 시민사회를 세우는 능력이 있지만, 그 당위성이 검증되어야 가능하다. 시위의 목적·행동은 사회질서와 공공이익을 구현해야 한다. 만일 합리성·휴머니즘이 없다면, 아무리 거창한 대규모 조직일지라도 사회체제를 위협하는 파괴집단일 뿐이다.

시민들의 주거권리를 소중히 생각하고 지켜주는 도시는 역사적 맥락과 문화의 파괴를 용납하지 않는다. 사진은 지금과 큰 차이가 없는 1890년대의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의 모습.


인문사회학자들은 정부·기관에 항의하는 시위를 계기로 도시를 재점검한다. 시민의 주거권리를 지키는 복지·정의·자유·자연·문화·경제 등 사회적 요인들이 정상적으로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임무는 도시를 발전시키는 건축가·기술사·정치가들이 비틀리고 해괴한 모양의 도시를 바로잡을 수 있도록 지식을 공급하는 데 있다.

주거권리가 보장되는 도시란 어떤 장소인가? 시민 일상생활인 ‘소우주세계’와 사회적 공동생활인 ‘대우주세계’가 연계된 시스템의 도시다. 소우주세계는 행복한 삶이 주체가 되는 집의 영역이고, 가족·조상·민족·자연이 어울려 조화된 장엄한 예술의 세계다. 인간의 숭고한 탄생을 책임지고 사고·추억·꿈 같은 삶의 에너지를 만든다. 조상이 살았던 시간이 길수록 집에서 발산하는 삶의 에너지는 더욱 강해서 현재와 미래에 지혜와 꿈을 공급한다. 사물의 존재를 ‘물질’과 ‘정신’의 두 실재로 설명하는 데카르트 이원론에 따라 집은 장소의 실체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하는 인간 정신과 휴머니즘의 집합체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므로 주거 장소가 똑같을 수 없다. 집은 신분·인격을 나타내는 공간이기에 얼마나 오래 점유했는지 ‘기간’과 오랜 세월 같은 상태로 있었는지 ‘연속성’ 개념으로 봐야한다. 즉 오래된 집일수록 훌륭한 가문의 인격체로 간주된다.

대우주세계는 사회공동체의 활동을 강하게 만드는 ‘도시 원동력’ ‘도시 다이내미즘’이다. 사회·문화·경제 분야를 발전시켜 시민들을 위한 풍부한 삶의 환경을 창조하는 능력이다. 경제 분야에서 기업들이 창출한 이익은 사회에 반드시 재투자되어야 도시 원동력이 가동된다. 지분 참여의 공동사업자들이 이익을 독식하면 도시에는 정경유착·재벌사회의 혼란과 불균형의 아노미가 찾아온다. 도시 다이내미즘은 사회 모든 분야를 통제·검증하는 정치 시스템이 실현되어야 가능하다. 예컨대 외환위기에 따른 공황, 서민경제 악순환 같은 사회 문제의 해답은 경제 논리만으로 찾을 수 없다. 시작은 경제 요인이지만 결과는 폭력·사기·부정부패 등 범죄와 파산에 따른 자살·실업 문제들이 쏟아지는 비극 사회로 치닫기 때문이다.

정부는 5000년 역사의 대한민국을 증명하는 강북을 강남처럼 개발한다고 한다. 국가 존재를 증명하는 ‘역사적 실체’를 파괴하면서 외치는 개발은 테러와 같다. 그들의 재개발·뉴타운 건설과 용산·왕십리·용강동의 강제 철거로 많은 시민들이 죽고 추운 거리로 내쫓겼다. 자손대대 한 곳에서 살아야 하는 주거권리가 이 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울시가 외치는 ‘디자인 서울’은 한강에 수백억원의 인공섬을 띄우거나 수천억원대의 청사 건설이라는 허상일 뿐이다. 도시 환경오염이고, 국세 낭비다. 도시는 정치철학에 무지한 정치인들의 취향·욕망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1890년대의 파리는 2010년 지금과 다름없다. 주거의 권리를 지켜주는 도시는 삶의 변화만 있을 뿐 역사적 맥락과 문화의 파괴를 용납하지 않는다. 시민의 삶의 권리를 중요하게 인지하는 도시만이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