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100년 (27) 썸네일형 리스트형 [주영하의 음식 100년](26) 간략한 20세기 음식사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예전엔 … 골목마다 달랐던 ‘요맛조맛’ ㆍ요즘은 … 어딜가나 똑같은 ‘이맛그맛’ “청진동 명물은 부랑자들이 좋아하는 내외주점이다. 호수 육백호에 내외주점만 열한 집이나 되고 보니, 이 동리의 대표적인 명물로 당당하지 않습니까. 이 당당한 명물이 작년에는 삼십여 호, 재작년에는 사십여 호나 있었답니다. 참 그때에야 굉장하였겠지요. 열 집에 내외주점 하나씩! 장관이었겠습니다. 내외주점의 역사를 캐어보면 옛날에는 이름같이 아낙네들이 술상만 차려 내보내고 내외를 착실히 하던 술집이었습니다. 이것이 차차 개명하여져서 내외법이 없어지고 술상 옆에 붙여 앉아 웃음을 팔면서 노래를 팔더니 결국에는 매음까지 하게 되어 요사이에는 내외주점 하면 밀매음이 연상되게 되었습니다. 내외주점을 찾아가면.. [주영하의 음식 100년](25) 청어과메기-껍질 벗긴 쫀득한 속살의 유혹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은 조선 최초의 미식서인 을 썼다. 이 책에서 “네 종류가 있다. 북도에서 나는 것은 크고 배가 희다. 경상도에서 나는 것은 껍질이 검고 배가 붉다. 호남의 것은 조금 작다. 해주에서는 2월에 잡히는 것이 맛이 매우 좋다. 옛날에는 매우 흔했으나 고려 말에 쌀 한 되에 오직 40마리밖에 주지 않았으므로, 이색이 시를 지어 이를 한탄하였다. 난리가 나고 나라가 황폐해져서 모든 물건이 부족하기 때문에 귀해졌다고 했다. 명종 이전만 해도 쌀 한 말에 50마리였는데, 지금은 전혀 잡히지 않으니 정말로 괴이하다”고 했다. 바로 청어(靑魚)를 두고 자신의 미식경험을 쓴 내용이다. 알다시피 청어는 냉수성 어종으로 수온이 2~10도인 저층 냉수대에서 .. [주영하의 음식 100년](24) 쏘가리매운탕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생선인데도 희한하게 ‘돼지고기 맛’ 1933년 9월3일자 동아일보의 ‘지상병원’이란 코너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20세 남자이온데 년 전에 늑막염으로 고생하다가 나아섯는데 올부터 가삼이 답답하고 엽구리와 잔등이가 몹시 쑥쑥 결리고 압흡니다. 몸이 몹시 약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기가 실코 힘이 듬니다. 기침이 혹시 나오고 노란가래침이 나옴니다. 이와 같은 병에 쏘가리를 살머먹으면 좋다하오니 어떠한지요. 병명과 약방문을 가르켜주요.(개성의 고통생)” 이 질문에 대해 당시 경성부 진찰소 내과 박종영 박사의 대답은 이러하다. “늑막염의 재발이 안인가 생각됨니다. 일차 의사의 진찰을 받어 병명을 확실히 안 후에 치료방침을 정하십시오. 문의하신 쏘가리는 섭취하여도 무관할 것입니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3) 돼지순대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경제개발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ㆍ서민들 고달픈 삶 위로했던 단골안주 “흔히들 순대는 돼지나 소의 내장(창자)으로 하는데 물론 맛도 좋지만 이것은 값이 비싸고 쉽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만들기도 쉽고 값이 싸며 맛도 좋은 ‘오징어순대’가 있답니다.” 이 글은 동아일보 1964년 1월19일자에 실렸다. 당시 돼지나 소의 내장으로 만든 순대가 값이 비싸다니 무척 의아스럽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이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일반 서민들이 쇠고기나 돼지고기를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가난한 때였다. 그러니 그 내장으로 만든 순대 역시 지금과는 사정이 달랐다. 알다시피 순대는 보통 북한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1994년 조선료리협회에서 발간.. [주영하의 음식 100년](22) 빈대떡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1920년대 길거리 간이음식점 인기 메뉴 ㆍ해방 후엔 빈대떡집 유행 ‘최고 안주로’ “오늘도 조선여행사에 있는 H형이 찾아왔다. 그가 묻지 않고 내가 말하지 않아도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시간이 되면 가방을 들고 내 단골집인 빈대떡집으로 찾아간다. 을지로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그마한 빈대떡집까지 극성이도 차서 가곤 한다. 여늬 술집처럼 젊은 여인네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건만 구수한 빈대떡에 약주 맛은 유달리 기맥힌 매력이 잠재해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해방 후 급속도로 발전하고 보급된 것의 하나는 누구나 빈대떡이 아니랄 사람은 없을 게라. 여하간 빈대떡이 없으면 내가 망하고 내가 없으면 빈대떡이 망할 것만 같다. 개중에는 빈자(貧者)떡 혹은 빈대병(賓待餠) .. [주영하의 음식 100년](21) 대폿집의 유행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5·16 혁명 직후 눈의 띄도록 서리를 맞은 것은 사창 이외에도 고급요정이 있다. 그러나 이 년 후인 지금 혁명적인 청신한 기풍은 찾아보기가 힘들고 혁명 전의 ‘장’이나 ‘관’이 한때 ‘왕대포’를 팔았으나 또다시 무슨 ‘나무집’ 등 예전 이름으로 바꿔놓고 밤늦게까지 주지육림의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밤만 되면 홍등가는 술내 풍기는 젊은이들이 흥청거리고 한때 영업이 안 되어 굶어 죽겠다던 ‘바’에서는 값비싼 ‘맥주’가 바닥에 질펀하며 통금시간이 다가오면 남녀가 쌍쌍이 술 취한 걸음거리로 ‘호텔’과 ‘여관을 찾는다. 도시의 뒷골목은 다시 혁명이전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고급요정에 나타나는 술꾼들의 직업은 예나 이제나 거의 다름없지만 그 얼굴이 크게 바뀌었다고나 할까?” 이 글은 동.. [주영하의 음식 100년](20) 탕평채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사색당쟁 버리고 화합하라” 영·정조의 탕평음식 유래설 요사이 한정식당에 나오는 음식 중에서 탕평채(蕩平菜)만큼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없을 듯하다. 칼럼리스트 이규태(1933~2006)는 탕평채를 두고 “노란 창포묵에 붉은 돼지고기, 파란 미나리, 검은 김을 초장에 찍어먹는 3월의 시식(時食)이다.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은 사색 당쟁을 탕평코자 정조는 도처에 탕평비를 세우고 이렇게 음식까지 만들어 먹게함으로써 파당을 화합토록 했던 것이다”(조선일보 1987년 3월17일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지금 야당의 속사정으로 미루어 손가락을 생각말고 손바닥을 생각할 때며 탕평채를 푸짐하게 버무려 서로 나누어 먹을 바로 지금 .. [주영하의 음식 100년](19) 명란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1922년 10월1일 경성의 장곡천 공회당에서 경성상공회 주최로 조선식량품 품평회가 개최되었다. 매일신보 당일자 신문에서는 ‘물가조절문제가 고조된 작금 식량품평회 개최’라는 제목을 붙여 이 내용을 보도하였다. 그러면서 “값싸고 간이한 생활을 하려거던 반드시 한번 구경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품평회 관람은 일반인에게도 필요하지만 부인에 대해서는 가장 간절하다고 썼다. 식량이니 당연히 음식이 중심이 된 전시회였다. 전시장은 일본·조선·중국·서양으로 나누어졌고, 심사위원에 의한 품평회도 진행되었다. “조선요리는 식도원에서 출품하야 매일 가러 놓으며 군대요리는 군대에서 하며 기차벤또는 회기 중 전 조선의 것을 출품하여 공중 심사에 붙이며 학생벤또는 매일 가러서 회에서 출품..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