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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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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의 음식 100년](16) 편육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음식이 편육 … 돼지머리가 일미 조선시대 사람들이 음식을 상에 차릴 때 어떤 규칙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무척 궁금하지만 불행하게도 19세기 중반 이전의 문헌 중에서 아직까지 이것이 발견된 것은 없다. 다만 19세기 말경에 쓰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의 말미에 ‘반상식도’가 나올 뿐이다. 이 책의 ‘반상식도’에는 구첩반상·칠첩반상·오첩반상·곁상·술상·신선로상·입매상의 상차림 규칙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곁상·술상·신선로상을 제외한 나머지 상 모두에는 한글로 쓰인 ‘숙육’이란 음식이 나온다. 그만큼 이 책의 저자는 숙육을 상을 차릴 때 반드시 내야 하는 음식으로 이해한 듯하다. 숙육이란 어떤 음식인가? 당연히 이 책에 그 조리법이 나온다. 한자로 ‘孰肉’이라 썼지만, 아마도..
[주영하의 음식 100년](17) 생복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선요리옥은 1920~30년대 대단히 번창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1940년대에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생이 최악의 상태였지만, 고급요정은 오히려 성업을 하였다. 결국 1948년 10월29일에 국회의원 김상돈이 ‘고급요정봉쇄’를 법령으로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1951년 12월1일에도 정부에서는 위생감찰단까지 조직하여 고급요정의 음식물을 간소화시키고, 요리 가격도 통제하였다. 당시 자료를 통해서 요정에서 판매되었던 요리 종류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한국요리’로 분류된 요리와 가격을 살펴보자. “신선로 1만1천원, 맥운(매운탕) 1만1천원, 생복(生福) 8천원, 닭쁘꿈(닭볶음) 8천원, 게활..
[주영하의 음식 100년](16) 구절판 주영훈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여덟가지 재료 밀전병에 돌돌~ 한입에 쏙~ ㆍ정초 손님접대 음식으로 인기 ‘구절판’은 음식을 담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거기에 담긴 음식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나온 조리서를 아무리 뒤져도 구절판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일제시대, 그것도 1935년이 되어야 비로소 신문에 구절판이란 음식이 나온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9일자 ‘가을요리(6) 내 집의 자랑거리 음식 구절판, 배추무름’이란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는 기자가 윤숙경이란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옮긴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오늘 소개케하랴는 음식은 특별히 술안주에 좋고 또 복잡한 듯하면서 비교적 만들기 좋은 것입니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에서는 구절판이 한자로 ‘九折板’이 된다고 하면서..
[주영하의 음식 100년](15) 당면잡채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중국의 당면·일본의 간장·한국의 손맛 ㆍ삼국 합작으로 무친 잔칫상 단골 음식 1923년 10월28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우리 손으로 제조하는 재래지나제 당면·분탕·호면’에 대한 광고가 실렸다. 이 광고를 낸 업체는 경의선 사리원역전에 있던 광흥공창 제면부였다. 대리점으로 평양에 있는 삼정정미소를 별도로 표기해 둔 것으로 보아, 광흥공창은 생산 공장인 것으로 보인다. 이 광고는 그 후 10월28일, 11월5일, 그리고 다음해인 1924년 4월24일과 5월9일에도 같은 신문에 실렸다. 그런데 1939년 5월23일자 매일신보의 사리원 특집면에서 이 광흥공창의 사장이 양재하라는 인물임을 밝혔다. 그 기사에 의하면, 당면 제조의 원조인 광흥공창의 사장 양재하가 사리원상업학교 부지..
[주영하의 음식 100년](14) 약주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탁주에 용수를 박아 맑게 정제한, 갈색을 띤 연노랑의 투명한 술 ㆍ달큰하고 깔끔, 입에 감기는 여운의 맛 “선대의 유업이라면 듣기에 큰 사업인 것 같습니다만은 저의 선친께서 가난한 술장사를 하시다가 제가 20살 때에 돌아가셨는데 실상은 아무것도 아니 남겨두신 이 술장사를 제가 20세 되는 해 맡아가지고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돈 이백 원 하나를 융통하여 가지고 내 손으로 술을 만들며 팔며 외상을 걷으러 다니는 등 일절 일을 혼자서 하였었는데 바로 이 동안이 뭣보다도 오늘날의 성공을 있게 한 직접 원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매일신보, 1936년 6월10일자) 이 말을 한 사람은 일제시대 서울에서 가장 큰 술 공장 중의 하나였던 천일양조장의 사장 장인영이다. 천일양조장..
[주영하의 음식 100년](13) 갈비구이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개화기 선술집서 먹던 서민들의 ‘술안주’ ㆍ인기 끌자 요리옥서 ‘갈비찜’으로 고급화 “곰국을 끓이고 갈비와 염통을 굽고 뱅어저냐까지도 부쳐 놓았다. 정란은 수놓은 앞치마를 입고 얌전하게 주인 노릇을 하였다. (중략) ‘참 그렇습니다. 김치는 음식 중에 내셔널 스피리트(민족정신)란 말씀이야요.’ 하고 그 지혜를 칭찬한다는 듯이 상철을 보고 눈을 끔쩍한다. 상철은 픽 웃고 갈비를 뜯는다. ‘갈비는 조선 음식의 특색이지요.’ 하고 어떤 학생이, ‘갈비를 구워서 뜯는 기운이 조선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기운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응, 그런 말이 있지.’ 하고 한선생이 갈비를 뜯던 손을 쉬며, ‘영국 사람은 피 흐르는 비프스테익 먹는 기운으로 산다고.’ 하고 웃었다.” 이 글..
[주영하의 음식 100년](12) 신선로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식지않게 먹는 색색의 산해진미…외국인도 반한 “마침 명월관 앞을 지나면, 이때 임비(마비)돼가는 뇌신경이 현기(어지러움)에 가까운 상상의 반역을 진압할 수가 있겠는가? 없을걸세.두어 고팽이 복도를 지나, 으슥한 뒷방으로 들어서거든, 썩 들어서자, 첫눈에 뜨인 것이 신선로. 신선로에서 김이 무엿무엿 나는데 신선로를둘러 접시·쟁반·탕기 등 대소기명(大小器皿)이 각기 진미를 받들고 옹위해 선 것이 아니라, 앉았단 말일세. 차(此) 소위 교자시라. 애헴 ‘안석’을 지고 ‘방침’을 괴고, 무엇을 먹을고 위선 총검열을 하것다. 다 그럴듯한데, 욕속수완(성급하게 서둘지 않고)이라, 서서히 차려보자. ‘닭알저냐’를 하나 초고초장에 찍어먹고, 댐으로 어회, 또 댐으로 김치, 이러다보니, ..
[주영하의 음식 100년](11) 조선요리옥의 탄생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광화문 인근 ‘명월관’이 효시… 일본·청요리옥과‘맛 삼국지’ ※ 우리 음식의 역사, 그 음식에 깃든 문화와 삶을 풍성한사료를 토대로 맛있게 요리해온 ‘주영하의 음식 100년’이 두 번째 주제를 시작합니다. ‘가장 오래된 외식업, 국밥집’을 주제로 설렁탕 등 9개 음식을 소개한 데 이어, 18일자부터는 ‘조선요리옥의 탄생’을 주제로 신선로에서 묵까지 새로운 아홉 가지 음식을 들고 찾아갑니다. “삼사십여년 과거지사나 그때에 우리 조선은 그윽이 적막하야 인정(人定)을 진 후면 사람의 왕래가 끊어지고 국도(國都)에 내외국인간 여인교제(與人交際)할 자리가 없었으니 이천만 민중지국으로서 이러한즉 한심한 생각을 하고 보니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외국인이 다녀갈 적엔 그 나라 정도(定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