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식100년

(27)
[주영하의 음식 100년](10) ‘1000년의 구수한 맛’ 숭늉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조선시대 식후 음료로 사랑, 제사 땐 차 대신 올리기도 ㆍ전기밥솥 등장으로 멀어져 “숙수(熟水)는 약재를 달이고 끓이는 데 사용하는 물이다. (중략)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밥을 짓고 이미 익었으면 곧장 노구솥의 밑바닥이 그을리게 되는데 여기에 물을 부어 한번 끓으면 삶은 밥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가리켜서 숙수라고 부른다. 곧 같은 이름이지만 그 실체는 다르다.” 이 글은 조선후기의 학자 서유구(1764~1845)가 붓으로 쓴 책인 에 나온다. 본래 중국 송나라 때 사람들은 숙수를 약재를 달이는 데 쓰는 좋은 물을 가리켰는데 조선 사람들은 솥의 밑에 남은 누룽지가 뜨거울 때 물을 부어 만든 삶은 밥인 숭늉을 가리킨다는 설명이다. 비록 숙수에서 숭늉이란 말이 생겨났다고 서유..
[주영하의 음식 100년](9) 배추김치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진수성찬도 김치 없으면 허전”… 켜켜이 감칠맛…그립다 ‘조선배추’ “김치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이 밥 다음에는 김치 없이 못 견디나니 만반진수가 있더라도 김치가 없으면 음식 모양이 못될 뿐 아니라 입에도 버릇이 되어 김치 못 먹고는 될 수 없나니 어찌 소중하다 아니 할까부냐.그런고로 봄과 여름과 가을은 일기가 춥지 아니한 고로 조금씩 담가 먹어도 무방하거니와 겨울은 불가불 한데 하여야 오륙삭을 먹나니 그런고로 진장(珍藏)이라 하는 말은 긴할 때 먹기로 보배로 감춘다는 말이라.” 이 글은 이용기가 1924년에 펴낸 근대조리서인 에 나온다.여기서 만반진수는 한자로 ‘滿盤珍羞’ 곧 상 위에 가득히 차린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리킨다. 김치가 없으면 밥 먹을 맛이 나지 않는..
[주영하의 음식 100년](8) ‘사시사철’ 별미, 냉면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1920년대 제빙기술 도입… 여름음식으로 ‘재 탄생’ “평양냉면, 해주냉면 다음으로 서울냉면을 손꼽을 만큼 이제는 서울냉면이 냉면 축에서 뻐젓하게 한몫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성냉면은 말하자면 평양냉면의 연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입 까다로운 서울사람들의 미각을 정복해보려고 평양냉면 장사들이 일류 기술자-냉면의 맛은 그 기술 여하에 달렸습니다-를 데리고 경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여 이제는 움직일 수 없는 굳은 지반을 쌓아놓았습니다. 여름 한철 더군다나 각 관청 회사의 점심시간이면은 냉면집 전화통에서는 불이 날 지경입니다.” 1936년 7월23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냉면’ 관련 기사의 첫 부분이다. 1930년대 중반, 서울의 냉면집들이 성업을 하고 있는 정황을 이 글은 생..
[주영하의 음식 100년](7) ‘보양의 상징’ 삼계탕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1987년 8월에 주요 일간지에 실린 소화제 광고는 헤드카피로 ‘삼계탕이 아니고 계삼탕입니다’를 내세웠다. 그 내용은 이렇다. “흔히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삼계탕의 본래 이름은 계삼탕(鷄蔘湯)입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등에는 계삼탕에 대한 기록이 두루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우리말 사전에도 ‘어린 햇닭의 내장을 빼고 인삼을 넣어 곤 보약’이라고 계삼탕에 대해 풀이하고 있으니, 삼계탕이란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계삼탕이 삼계탕으로 바뀌게 된 것은 6·25동란 이후부터입니다. 본래 양반계급의 음식인지라 대중성이 없었던 계삼탕이 대중음식점에서 음식으로 만들어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삼계탕이라 잘못 불렸던 것입니다.” 이 광고..
[주영하의 음식 100년](6) 개성의 대표 음식, 편수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개성 부인네의 조미법이 빚은 ‘맛의 황홀경’ “개성 편수 중에도 빈한한 집에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편수 먹는다는 기분만 맛보는 것 같은 그런 편수는 서울 종로통 음식점에서 일금 20전에 큰 대접으로 하나씩 주는 만두 맛만 못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고기라고는 거의 없고, 숙주와 두부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남들이 일컬어 주는 개성 편수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 편수 속의 주성물은 우육·돈육·계육·생굴·잣·버섯·숙주나물·두부 그 외의 양념 등 이렇게 여러 가지 종류이다. 이것들을 적당한 분량씩 배합하여 넣되 맛있는 것을 만들려면 적어도 숙주와 두부의 합친 분량이 전체 분량의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으로 정말 맛있다는 개성편수는 그리 염가로 ..
[주영하의 음식 100년](5) 개장의 변이, 육개장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조선 선비 사이에도 개고기 기피 많아 ㆍ이름은 개장이로되 쇠고기로 만들어 일제시대에 ‘대구탕반’이란 음식이 있었다. 그 이름만을 놓고 보면 대구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밥이란 뜻이지만, 서울에서도 제법 인기를 모았던 모양이다. 1926년 5월14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서울 공평동에도 대구탕반이란 음식을 판매하는 식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 식당의 점주가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라는 데 있다. 당연히 대구탕반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식당이면 점주 역시 대구 출신이어야 함이 마땅할 터이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서 그런 일이 생겼다. 당시 33세였던 송성언이라는 점주는 본래 사기꾼이었다. 목포의 지주에게 벼 400석을 팔아주겠다고 하고서 그 판돈 8000원을 챙겨서 서울..
[주영하의 음식 100년](4) 한국의 대표 음식 ‘육회비빔밥’ 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ㆍ하얀 쌀밥 위 색색 나물과 고기 조화… 간편해서 더 친근한 ‘한국의 맛’ 1931년 양력 설날에 서울 안국동에 사는 안창길은 92세가 되었다. 13세에 창덕궁에 들어가서 침방나인 일을 하기 시작했던 그녀는 줄곧 궁에서 처녀로 살았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라서 동아일보 기자가 안창길을 찾았다. 그녀의 식성이 어떠하기에 이렇게 장수하는지를 묻자, 조카며느리는 안창길이 식성이 좋아 무엇이든지 잘 먹지만, 육회를 비롯한 고기를 특별히 좋아한다고 했다. 그 이후 안창길이 몇 세까지 더 살았는지 아직 확인을 못했지만, 그녀의 장수에 육회가 제법 큰 공을 세웠을 가능성이 많다. 모두 알듯이 육회는 소의 살코기나 간·천엽·양 따위를 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날로 먹는 음식을 ..
[주영하의 음식 100년](3)1930년대 ‘가을 식객’ 사로잡은 추어탕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ㆍ추어가 잡히는 가을 문턱에 개업…입소문 타고 손님, 구름 모이듯 1930년대 서울에는 세 곳의 추어탕집이 이름을 날렸다. 그 하나는 신설동의 ‘유명추탕’이다. 유명추탕에서 일하다 독립한 정부봉이 운영한 일명 ‘곰보추탕집’도 명성이 높았는데 안암교 근처에 있었다. 마지막 집은 지금의 헌법재판소 서북쪽 화동에 있었던 황보추탕집이다. 수필가 변영로(1897~1961)도 이 집의 단골이었다. 자신의 음주이력을 적어둔 이란 책에 황보추탕집은 어김없이 나온다. “윤(尹)빠에 못지않게 유명한 해정(解酊) 주점이 화동에 있었는데 일컫기를 황보추탕집이라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 생각에는 추탕집이면 술집이기보다 밥집이 아니었을까 여기겠지만, 적어도 1980년대 이전 사정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