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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과의 대화](12) 수많은 혈친·인척 명사를 만든 ‘나의 탄생’은 집안의 축복이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대화의 초반에는 주로 선생님의 자아의식이 확장해간 영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규모가 시간적·공간적으로 하도 광활해서 따라가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그것들이 응집된 ‘육신’의 기원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고은=나에게도 루소의 ‘고백’처럼 말할 저주의 용기가 없지 않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복창할 생각은 없다네. “내 인생 최초의 불행은 바로 나의 탄생이었다”는 말은 1712년 서반구 스위스 제네바의 한 갓난아기를 가리키지만 1933년 동반구의 극동 한반도 변방의 아이를 무작위적으로 가리킬 수 없지 않은가. 김형수=선생님의 발자국에서 루소의 영혼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지적인 예리함, 소년적인 열정, 전통을 알면서도 전혀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 등에서 말입니..
[고은과의 대화](11) 어릴적 별명은 ‘암사내’였지만 마음 깊숙이 ‘불’이 들어있었 소설가·평론가 김형수=지난주 ‘폐허’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내내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왜 문명을 비운 ‘영점(零點)의 상태’를 지향하는지, 그것이 왜 데카당스가 아니라 ‘세노야’ 같은, 자연으로서의 인간에 닿는 시를 낳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이제 존재가 머무는 쪽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은데요. 인간의 눈길은 항상 어둠의 세계에서 빛을 향해 열리는 것이 아닐까요? 고은=인류는 당연하게도 태양숭배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왔네. 어찌 인류뿐이겠는가. 무릇 산천초목도 큰 짐승도 잔짐승도 미물도, 심지어는 지하의 흙속의 생명체나 태평양의 심해 그 막대한 수압의 어둠 속 어패류들도 태양계의 한 행성인 지구의 우주적 운명을 한 치도 거스를 수 없는 태양의 소산들이 아닌가. 그러니까 만사는 태양 이후가 아니겠..
[고은과의 대화](10) 다섯 살 때 집 대부분 불 타… 내 폐허의식은 그로부터 시작 소설가·평론가 김형수=랭보는 시인을 “길고 거대한 타락에 바탕을 둔 모든 감각을 통해 선지자가 되는 존재”라고 언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인용해 선생님의 ‘파괴적 행보’가 얼마나 생산적인가를 평가하고자 했던 글이 저의 ‘오십년 동안의 사춘기’입니다. 혹시 그런 정신을 선생님의 시대가 낳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고은=굳이 나의 동시대를 말한다면 나는 지금의 나이기보다 나 이전의 나이고 싶네. 1만년 내지 몇 만년 동안 크로마뇽인으로 살았던 내 먼 인류로서의 조상이 씨족으로서의 내 조상 이전의 나일지도 모르지. 실제로 크로마뇽인의 초상과 현대인류로서의 내 초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네. 지구 몇 10억년의 긴 시간 속에서 만년 단위란 상대적으로 촌음 아닌가. 김형수=말씀이 어렵습니다. 선생..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8) 샤갈의 ‘떨기나무 앞의 모세’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 ㆍ체념의 시간에 만난 신 렘브란트의 밧세바는 고뇌하는 여인인데, 샤갈의 밧세바는 행복하게 다윗과 융화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샤갈은 부끄럼 없는 순결한 사랑의 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또 렘브란트의 모세는 심각한데, 샤갈의 모세는 온화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들어왔던 성서의 이야기가 나이 들면서 열매 맺은 방식은 그만큼 달랐던 거겠지요. 어린 시절부터 성서의 이야기에 매료되었었다는 샤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서는 자연의 메아리와 같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전하고자 했던 비밀이었습니다.” 저 샤갈의 모세를 보십시오. 여성성이 잘 발달된 부드러운 남자 아닙니까? 당신의 모세는 어떤 사람인가요? 나의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한 민족의 지도자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까지 성급..
[김철웅칼럼]사는 게 조금 외롭고 쓸쓸해서 김철웅|논설실장 송경동 시인이 구속되었다. 솔직히 필자는 송 시인을, 그의 시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탓이었을까, 처음 그가 구속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무덤덤했다. 어쩌면 그건 과거의 학습효과 덕분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시인 작가들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가. 군사정권 시절 시인 작가는 연행되고 구속되고 해직되고 단식투쟁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필화사건, 폐간도 친숙한 언어였다. 한순간 옛 기억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미안해진 건 송 시인의 ‘수상소감문’을 접하면서였다. 그는 지난주 부산의 경찰서 유치장에서 신동엽창작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22일 열린 시상식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온 그의 아내가 대신 수상소감문을 읽었다. “…조금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한,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로]반FTA 촛불을 드는 이유 강광석 전농 강진군 정책실장 강진에서 촛불집회를 여러 차례 진행했습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비준되기 전에도, 비준된 다음에도 했습니다. 촛불집회를 시작했을 때 우리가 걱정한 것은 날씨가 추워 몇 사람이나 올지, 혹시 시끄럽다고 민원이 들어오지나 않을 것인지가 아닙니다. 이 협정이 미국의 이익과 맞닿아있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어떤 이는 짐짓 평론가다운 분석으로 정부와 여당이 비준안을 무리하게 처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당내 혼란과 반대여론의 확산, 내년 총선과 대선 등 정치일정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참여정부 시절, 지난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진보적인 사람과 세력이 정권을 운영한다는 시절에도 ..
[고영재의 천관산 편지]숫자의 마술 세상은, 대중은 진실과 ‘맑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사람들은 ‘적당한 자연’ ‘적당한 정의’만을 원한다 요즘 사람들은 숫자의 감옥에 갇혀 산다. 숫자는 현상을 간명하게 설명하는 도구이자 상징이다. 숫자는 현대문명의 밑거름으로 작용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현대인들은 숫자에 울고 웃는다. 가을걷이가 끝났다. 메주콩 600㎏을 거뒀다. 1㎏에 5000원씩, 300만원을 손에 쥐었다. 농사에 들어간 경비가 꽤 많다. 품삯의 비중이 절대적이었다. 홀로 감당하기엔 콩밭이 다소 넓었던 터다. 밭갈이와 김매기, 가을걷이 등 콩 농사 전 과정에 걸쳐 이웃의 도움이 불가피했다. 파종기와 탈곡기, 선별기 등 기계 힘도 빌렸다. 씨앗 값에 비료 대금, 장마철을 전후해 두 차례 뿌린 농약 값을 보태면 경비는 거의 2..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47) 조지 프레더릭 왓츠의 ‘희망’ 이주향 | 수원대 교수·철학 ㆍ누가 나를 위로해 주나 저 소녀, 각박한 현실에 뒤통수를 맞았을까요, 냉정한 사랑에 상처 입었을까요? 어찌 됐건 지독한 상실감에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 나와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남루하지만 소녀의 옷이 섬세하기도 하지요? 누추한 옷이지만, 어떤 화사한 옷보다도 소녀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작가는 단애의 끝에서 통곡도 잊은 채 지칠 대로 지쳐있는 소녀의 마음과 공명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작가는 꿈을 잃어버린 아픈 자리에서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걷지도 않고 맨 발의 곡옥(曲玉) 자세로 현이 끊어진 수금에 고개를 기대고 있는 소녀의 마음을 알고 느끼고 사랑하고 있는 거지요. 악기는 사람을 닮습니다. 현이 끊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