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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1) 순천 중앙시장 구두수선공 황충식씨 이원규 | 시인 ㆍ“한쪽 눈으로도 비뚤어진 세상 다 보인당께… 순리대로 살어”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의사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네거리 모퉁이의 수선공을 찾아갔다. 구두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뒤축을 갈거나 꿰맨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구두를 돌려주며 “2천원만 주시오” 했다. 의사가 버럭 화를 내며 “거 참, 고치지도 못하면서 뭔 돈을 받는 거야?” 소리쳤다. 그러자 의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바로 당신에게 배운 거요.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꼬박꼬박 진찰비는 받지 않소?” 한자리에서 38년째 구두수선을 하고 있는 황충식씨. 그는 노거수처럼 붙박여 먼 길을 걸어온 이들의 닳은 구두 뒷굽을 갈아주고, 터진 곳을 꿰매준다. “신발을 보면..
- 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9) 남원의 ‘칼 만드는 여자 대장장’ 정길순 이원규 | 시인 ㆍ“시린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나만의 활인검 만들고 싶어”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무색하다 못해 처참한 시절이다. 칼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렇다고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칼자루를 쥔 자의 정신 상태에 따라 애국자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는 반면, 위험천만한 망나니나 망국의 역적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고려왕검의 제조명장 이상선 선생은 “왜놈의 칼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지만, 고려의 칼은 나라를 지켜내고 사람을 살리는 칼”이라고 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화덕에서 붉게 달아오른 쇠를 꺼내 커다란 쇠망치로 내려치며 담금질하는 여자 대장장이 정길순씨. 강철을 마치 떡 주무르듯 해 부엌칼·생선회칼·꼬막칼·낫·도끼·작두·곡괭이를 만들어낸다. 그녀가 벼려내는 칼은 여성 ..
- 이원규의 길인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7) 곡성 ‘지푸라기 소 할배’ 신남균 이원규 | 시인 ㆍ평생 고락을 함께했던 소가 그리워 ‘볏짚 황금소’를 키우다 이 땅의 모든 농부들은 예술가였다. “감잎 나올 때 콩 심어라.”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생의 시간표’를 온몸으로 아는 농사기술도 감동적이지만,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 멍석과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지게·쟁기·물레방아를 만들며 초가지붕을 이거나 집을 지었다. 그 모두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제작품들이었다. 농부의 아내는 된장과 간장, 다양한 김치·젓갈뿐만이 아니라 술도 담글 줄 아는 발효미학의 달인들이었다.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바느질·뜨개질로 옷을 만들고 수를 놓았다. 집집마다 웬만한 것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예술의 극치들이 바로 삶 그 자체였다. 서울 명륜동의 짚풀생활사박물관(관장 인병선 시인)에 가보면 우리 짚·풀문화의 진..
- 고은과의 대화 [고은과의 대화](18)굶주렸던 다섯 살에 첫 대면한 별, 내 눈엔 밥으로 보였어. 별밥 소설가·평론가 김형수: 선생님의 미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저번에 실마리를 많이 얻었습니다. 그래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던 소년 고은태의 영혼과 부딪쳐 서정적 파장을 일으킨 것들에 대해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그때와 지금은 지상의 풍경이 많이 다르지요? 고은: 요즘의 십대 이하나 십대의 아이들 대부분은 안경잡이가 되어 있는데 이런 현상은 도시생활, 특히 아파트단지의 생활을 통해서 자라나는 데 그 까닭이 있을지 몰라. 바라보는 대상이 거리 양쪽의 건물이고 창밖의 아파트 건물이니 그 시야가 차단되고 말지. 그러므로 가시공간의 크기가 없어지므로 시력이 퇴화되기에 알맞지. 김형수: 그래서 생기는 현상일까요? 옛날에 실재하던 세계가 지금은 가상이 되어버린 예가 많습니다. 저는 현대 판타지에서 영적 움직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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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품은 사진 하늘 올려다 보기(23)/몽골 헨티아이막에서
- 음식100년 [주영하의 음식 100년](17) 생복회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조선요리옥은 1920~30년대 대단히 번창했다.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1940년대에도 그 사정은 변함이 없었다. 해방 이후 민생이 최악의 상태였지만, 고급요정은 오히려 성업을 하였다. 결국 1948년 10월29일에 국회의원 김상돈이 ‘고급요정봉쇄’를 법령으로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있던 1951년 12월1일에도 정부에서는 위생감찰단까지 조직하여 고급요정의 음식물을 간소화시키고, 요리 가격도 통제하였다. 당시 자료를 통해서 요정에서 판매되었던 요리 종류를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에서 ‘한국요리’로 분류된 요리와 가격을 살펴보자. “신선로 1만1천원, 맥운(매운탕) 1만1천원, 생복(生福) 8천원, 닭쁘꿈(닭볶음) 8천원, 게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