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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여행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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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베네치아(이탈리아)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베네치아가 죽어가고 있다는 말이 많습니다. 환경파괴로 이 ‘물의 도시’는 툭하면 침수됩니다. 주민들은 모두 떠나가고 거리에는 관광객뿐입니다. 실제로 베네치아에서 현지인들에게 둘러싸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베네치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내게 이런 소식들은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개인적으로 다시 가보고 싶은 곳 1순위로 항상 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시에 불로장생이란 없습니다. 한번 태어나 길게는 수천 년의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지만 그 전성기는 기껏해야 몇 번일 뿐입니다. 단 한번 잘나갔거나 한번도 잘나간 적 없는 도시가 세계에는 수두룩합니다. 그러고 보면 도시의 생애가 우리들의 삶과 많이 닮았습니다. 다만 그 생명의 끝이 조금 더 먼 미래에 있다는 점이 다르겠지요..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가나자와(일본)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가나자와는 일본 이시카와현에 위치한 작은 도시입니다. 아직 한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은 아니지만,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옛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요. 물론 전후 일본에 불어닥친 개발붐을 완전히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전통의 소중함을 알고 일본 내에서 옛 가옥의 재개발을 가장 먼저 억제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데 의의가 있을 겁니다. 이 조용한 도시에서 인상적인 장소 중 하나는 21세기미술관입니다. 최근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일본의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가 설계하고 2004년 완공된 곳입니다. 형태는 단순하고 깔끔합니다. 건물은 새하얀 벽과 바닥, 그리고 투명한 유리로 지어졌습니다. 특히 도시와 미술관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원통형으로 된 미술관의 테두리는 투명한 ..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라스베이거스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당장 내일 떠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질문을 받습니다. 상황에 따라 답은 다르지만 나는 대개 “라스베이거스요”라고 합니다. 도박중독자여서는 아닙니다. 감춰둔 추억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단지 그곳엔 100달러짜리 카지노 칩보다 더 즐거운 것이 숨어있기 때문이지요. 그 즐거움은 다름 아닌 욕망의 관찰입니다. 평소라면 겉으로 드러내기 쉽지 않은 마음 속 욕망들로 도시는 구축되어 있습니다. 세계 그 어떤 도시도 라스베이거스처럼 적나라하고 키치적이며 천박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소들로 가득차 있지만 그중 어느 곳도 깊이를 논하지 않습니다. 재료만 콘크리트와 벽돌과 대리석일 뿐, 실제 건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온갖 종류의 욕망이 표출된 이미지들입니다. 여행..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푸껫(태국)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전 세계적으로 쇼핑몰이 유행입니다. 굳이 얘기하자면 미국식 쇼핑몰이지요. 다국적 유통자본과 미국의 설계사무소들이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지구 이곳저곳에 많은 쇼핑몰을 세웠습니다. 거대 자본의 침투에는 마땅히 당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당장 우리의 예를 보더라도 대형 할인점의 손짓을 마다하며 재래시장과 구멍가게만 고집하는 소비자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미 세계는 비슷하게 흘러가는 중입니다. 여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낯선 곳에 머무를 땐 으레 재래시장을 찾고는 했습니다. 그곳에서 묻어나오는 삶의 모습이 무엇보다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여행에선 쇼핑몰의 유혹을 견뎌내기 힘듭니다.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비슷비슷한 상업공간이지만 어쨌든 현지인들로 가득합니다..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뉴욕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뉴욕의 즐비한 스타벅스 중 한 곳에 들어갔습니다. 어설픈 영어로 주문을 하고 창가에 자리를 잡습니다. 창밖으로는 핫도그 노점상이 보입니다. 노점상 너머로는 이런저런 건물들로 가득합니다. 하늘은 약간 보일 뿐입니다. 관찰과 상상은 여행을 풍요롭게 합니다. 시선은 핫도그 노점에 쏠립니다. 저 리어카는 어떻게 움직일까?…노점 허가는 어떻게 받을까?…자릿세는 있을까?…그의 가족은 어떤 사람들일까?…등등. 그러다 문득 그의 리어카가 지하철 환풍구를 밟고 있는 것을 봅니다. 문득 미세먼지에 뒤덮인 핫도그를 걱정합니다.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소시지 냄새가 도시에 퍼지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나풀거리는 치마를 입은 여인이 지나갈 때 치마가 뒤집히는 걸 방지해 주고자 배려심 많은 아저씨..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시드니(호주)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파리 에펠탑과 더불어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가장 널리 알려진 도시의 상징입니다. 아무리 진부한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시드니에 가서 오페라하우스의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겁니다. 세계의 수많은 도시들 역시 자신을 대표하는 독특한 건축을 갖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한편으로 여러 자본 세력들도 스스로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상징적인 건물을 짓고자 애를 씁니다. 그런데 사실 강한 목적을 갖고 진행되는 프로젝트는 어쩐지 정이 가지 않습니다. 연예계에서 기획된 스타보다는 꾸준하게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이에게 더욱 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많은 도시들에선 그곳의 랜드마크가 되고픈 건물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문득 나를 버려야 나를 찾는다는 말이 생각납..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호찌민(베트남)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처음 베트남 땅을 밟았습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거대한 오토바이의 군무와 그에 수반되는 경적 소리에 잠시 정신을 잃습니다. 얼마 후 복잡하게 얽힌 전깃줄과 간판들 사이에서의 혼란에 익숙해지자 특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건물들의 모양입니다. 구시가 쪽에서 줄곧 보이는 콘크리트 건물들은 좁고 긴 형태입니다. 도로에 4~5m 정도 면하고 뒤로 길게 이어진 채로 저마다의 높이를 갖고 있지요. 앞에서 보면 호리호리하고 옆에서 보면 푹 퍼진 형국입니다. 날씬한 집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있는 정면에서의 모습은 마치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이 나란히 서있는 느낌입니다. 1층엔 보통 그 건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의자를 갖고 나와 앉아있는데 건물의 입면과 앉아 있는 사람의 표정이..
[오기사의 여행스케치]보이지 않는 도시들 - 마라케시(모로코)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광장의 형상이 아닌, 광장에서 벌어지는 행위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있습니다. 모로코의 거대한 오아시스 도시인 마라케시의 제마-엘-프나 광장입니다. 특히 사하라 사막의 열기와 먼지가 가라앉게 되는 저녁 무렵의 광장은 장관을 이룹니다. 낮 시간 동안 광장을 점유했던 행상들은 사라지고 어디서 등장한지 모르는 엄청난 규모의 노점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양고기를 요리하기 위한 불을 지피는 연기가 대기에 가득찹니다. 술에 대해선 비교적 관대한 모로코지만 이 광장에 술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포장마차촌과 비슷하지만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차 한 잔과 함께 먹고 즐기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노점상들의 흔적은 연기처럼 사라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