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원규의 길인생

(28)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2) 위기의 구례군 섬진강 둑길 이원규 | 시인 ㆍ“멀쩡한 길에 쎄멘 퍼붓고, 이런 놈의 사업이 어디 있으까이” 길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먼저 걸어가고 다시 가면 그 발자국들이 모여서 마침내 길이 된다. 길이 길을 부르는 것이다. 길을 파보면 그 속에 옛길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길이나 도(道)나 마찬가지. 어쩌다 길 위에서 길을 잃어도 그 또한 길이다. 옛말에 ‘일어나 걷는 자는 동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길은 여전히 ‘발자국들의 살아 있는 화석’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오늘의 길은 그 순결성을 잃어가고 있다. 점점 더 폭력적이며 야만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자동차의 길에 사람의 길이 막히고 야생동물의 길이 막히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위험천만한 길을 걸어서 가려면 먼저 목숨부터 내놓아야 한다. 길이 길을 부르는 것이 아..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1) 순천 중앙시장 구두수선공 황충식씨 이원규 | 시인 ㆍ“한쪽 눈으로도 비뚤어진 세상 다 보인당께… 순리대로 살어”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어느 의사가 낡은 구두 한 켤레를 들고 네거리 모퉁이의 수선공을 찾아갔다. 구두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뒤축을 갈거나 꿰맨다고 될 일이 아니었으니 결국 구두를 돌려주며 “2천원만 주시오” 했다. 의사가 버럭 화를 내며 “거 참, 고치지도 못하면서 뭔 돈을 받는 거야?” 소리쳤다. 그러자 의사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말했다. “바로 당신에게 배운 거요. 병을 고치지도 못하면서 꼬박꼬박 진찰비는 받지 않소?” 한자리에서 38년째 구두수선을 하고 있는 황충식씨. 그는 노거수처럼 붙박여 먼 길을 걸어온 이들의 닳은 구두 뒷굽을 갈아주고, 터진 곳을 꿰매준다. “신발을 보면..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10) 하동군 옥종딸기마을 이원규 | 시인 ㆍ“한겨울 딸기가 효자효녀 아입니꺼, 참말로 살맛납니더” 1년 동안 장장 1만리를 걸은 적이 있다. 2004년 도법·수경 스님과 함께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나부터 평화가 되자”며 ‘생명평화 탁발순례’ 길에 올랐다. 꽃샘추위 속에 지리산 노고단에 예를 갖춘 뒤 ‘밥을 주면 밥을 먹고, 돌을 던지면 돌을 맞는 풍찬노숙의 세상 공부이자 세상 구경’이었다. 지리산의 마을 마을을 돌아 45일 동안 1500리를 걷고 제주도와 부산, 그리고 경남지역 면단위 곳곳의 마을들을 모두 걸었다. 친환경 무공해 딸기가 겨울 한기를 이기며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 이원규 시인 촬영 20일쯤 걸어 경남 하동군 옥종면에 도착했을 때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온 들판을 가득 메운 딸기 비닐하우스였다. 겨울철 주소득..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9) 남원의 ‘칼 만드는 여자 대장장’ 정길순 이원규 | 시인 ㆍ“시린 세상과 사람을 살리는 나만의 활인검 만들고 싶어”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무색하다 못해 처참한 시절이다. 칼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렇다고 아예 사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칼자루를 쥔 자의 정신 상태에 따라 애국자가 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는 반면, 위험천만한 망나니나 망국의 역적이 될 수도 있다. 일찍이 고려왕검의 제조명장 이상선 선생은 “왜놈의 칼은 사람을 죽이는 칼이지만, 고려의 칼은 나라를 지켜내고 사람을 살리는 칼”이라고 했다. 두꺼운 장갑을 끼고 화덕에서 붉게 달아오른 쇠를 꺼내 커다란 쇠망치로 내려치며 담금질하는 여자 대장장이 정길순씨. 강철을 마치 떡 주무르듯 해 부엌칼·생선회칼·꼬막칼·낫·도끼·작두·곡괭이를 만들어낸다. 그녀가 벼려내는 칼은 여성 ..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8)예천군 대죽리의 ‘말무덤’ ㆍ“또 전쟁이 난다카는데, 마캉 그 혓바닥을 다 묻어야돼”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은 혓바닥이 돌처럼 뻣뻣해지는 느낌이 든다. 거짓말을 했거나 아는 것 이상을 말했거나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옛말에 ‘한 마디 말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지만 그 반대로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 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입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귀는 둘이고 입은 하나다. 절묘한 비율이 아닌가. 경청의 전제 없이 하는 모든 말은 비판이든 칭찬이든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구약성서 잠언에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고 경고한 지 실로 오랜..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7) 곡성 ‘지푸라기 소 할배’ 신남균 이원규 | 시인 ㆍ평생 고락을 함께했던 소가 그리워 ‘볏짚 황금소’를 키우다 이 땅의 모든 농부들은 예술가였다. “감잎 나올 때 콩 심어라.” 동네마다 조금씩 다른 ‘생의 시간표’를 온몸으로 아는 농사기술도 감동적이지만, 볏짚으로 새끼를 꼬아 멍석과 짚신을 삼을 줄 알았다. 지게·쟁기·물레방아를 만들며 초가지붕을 이거나 집을 지었다. 그 모두가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제작품들이었다. 농부의 아내는 된장과 간장, 다양한 김치·젓갈뿐만이 아니라 술도 담글 줄 아는 발효미학의 달인들이었다.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바느질·뜨개질로 옷을 만들고 수를 놓았다. 집집마다 웬만한 것들은 자급자족하는 생활예술의 극치들이 바로 삶 그 자체였다. 서울 명륜동의 짚풀생활사박물관(관장 인병선 시인)에 가보면 우리 짚·풀문화의 진..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6) 슬로시티 악양면의 ‘동네밴드’ 이원규 | 시인 ㆍ서로의 아픔 보듬는 어우러짐… ‘전설 속 청학동’이 여기더라 아무리 험하고 힘든 세상일지라도 살아남을 만한 이유는 반드시 있을 것이다. 굳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던 폴 발레리의 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날마다 화려한 꽃의 날들은 아닐지라도 한번쯤은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이 되어 환한 억새꽃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는 날도 있을 것이다. 누구라도 절망과 아픔과 슬픔의 맨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낸 뒤에 오는 희열의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열망의 사람들이 모여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바로 그런 날이 있었다. 지리산과 섬진강의 늦가을, 형제봉 노을이 대봉감 홍시처럼 주렁주렁 내걸리던 11월13일 저녁이었..
[지리산 시인 이원규의 길·人·생](5) 천태산 은행나무 ‘詩祭’ 이원규 | 시인 입력 : 2010-11-09 21:29:40ㅣ수정 : 2010-11-09 21:29:41 ㆍ‘생명의 소리’로 우는 천년수 품에서 시인들은 울고 또 울었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세상의 안부를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지리산이나 계룡산의 도사에게도 묻고 싶고, 곰팡내 나는 을 훔쳐보며 ‘산 아래 핏빛이 돈다(山下血光)’는 등 경인년(庚寅年)의 불길한 예언 ‘백호쟁명살’에 한 갑자 전인 한국전쟁 때와 비슷한 위기의 국운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예언은 그저 불운과 불행의 경계일 뿐이라지만, 당대의 큰 어른들이 다 떠나고 온 산하가 위기에 처한 불통의 시절에 도대체 누구의 무릎 아래 엎드려 길을 물어나 볼 것인가.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요즘의 실세 위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