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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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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의 남미 걷기](14) 볼리비아 투피자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마초들의 계곡’ 위로 달이 떠오른 순간 그대로 멈추고 싶었다 거리는 어두웠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에는 인적마저 끊겨 스산함이 감돌았다. 찬바람에 날리는 쓰레기들만이 골목 사이를 가로지르는 새벽 3시의 도시. 두려움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낯선 도시의 새벽 거리에 혼자 서 있다니. 누군가 내게 “여행할 때 가장 싫은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수 있다. “어두워진 후에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일”이라고. 겁 많고 소심한 나는 밤 시간을 피하도록 늘 신경을 썼는데 오늘은 제대로 걸린 셈이다. 바짝 긴장한 채 버스에서 내렸다. 여기는 볼리비아의 남쪽 도시 투피자. 과연 이 시간에 택시를 잡을 수 있을지, 그 택시는 안전하기나 할지, 숙소는 문이 열려있을지..
[김남희의 남미 걷기](13) 볼리비아 포토시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ㆍ진짜 막장의 삶, 두려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함부로 쓰지 말아야겠다. 막장인생이라는 말. 사는 게 힘들다고, 일에 지친다고도 쉽게 말하지 말아야겠다. 하루 하루를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이들 앞에서는. 두려웠다. 겨우 두 시간. 갱도 안에서 보낸 그 짧은 시간 동안 살아나오지 못할까 무서웠다. 땀으로 흠뻑 젖게 만드는 열기가, 탁한 공기와 매운 광물의 냄새가, 무릎걸음으로 걸어야 하는 낮고 좁은 갱도가 두려웠다. 랜턴을 끄면 완전한 암흑. 그 몇 초의 암흑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매일을, 몇 년을, 몇 십 년을 아침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부끄러웠다. 암흑의 먼지구멍 속에서 일하는 그들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내가. 코카잎과 ..
[김남희의 남미 걷기](12) 볼리비아 라파스와 우유니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하늘이 땅으로 내려와 몸을 섞다 볼리비아라는 나라가 내게 처음 다가온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별이 유난히도 밝은 오늘 이 시간이 가면 그대 떠난다는 말이…”,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 ‘약속’. 염소창법이라 불리던, 간드러지는 바이브레이션으로 노래를 부르던 임병수가 볼리비아 교포라고 했다. 철이 든 후 볼리비아를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체 게바라 덕분이었다. 혁명을 꿈꾸던 그가 마지막으로 들어갔던 곳이 볼리비아의 밀림이었고, 7명의 동료와 함께 눈을 뜬 채 죽은 곳도 볼리비아였다. 그를 살해한 도시의 시장이 체 게바라의 자취를 따라가는 ‘체의 길’을 만들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씁쓸해한 기억도 있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천연자원이 가장 풍부한 나라이면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1..
[김남희의 남미 걷기](11) 브라질 아마존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나를 다시 울게 만든 ‘나가수’ 아저씨 철이 든 이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생명체는 나무였다. 품 넓은 나무 한 그루만 있다면 어디서든 나는 족했다. 팍팍한 일상에 지쳐 주저앉고 싶어지는 날에는 그 나무에 기대어 물기 없이 쪼그라든 내 마음을 적셨고, 혼자라는 게 새삼 몸서리쳐지는 겨울밤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견디는 힘에 대해 생각했고, 뜨거웠던 마음이 식어가는 일에 베인 날이라면 그 나무의 옹이를 어루만지며 제 품에 깃드는 이들을 가리지 않고 품어주는 넉넉함에 대해 가늠하고는 했다. 깊은 콘크리트 빌딩 숲에 갇혀 사는 날이라 해도 근처에 오래 늙어 싱싱한 나무 한 그루만 있다면 나는 늘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많이도 기대어 눈물을 쏟았던 나무가 어느 골목에건 한 ..
[김남희의 남미 걷기](10)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 ㆍ탱고 안보고 떠난다면, 그건 범죄다 모든 사랑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어떤 장소에 대해 우리가 품게 되는 사랑 역시. 내 영혼은 거친 들판에 더 어울린다고 믿어온 나였기에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이곳은 과거의 영광으로 살아가는 도시. 밤새 노래하고 춤추며 깨어있는 곳. 모든 방랑자를 품어주는 땅.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기억하는지. 어린 소년 마르코가 돈을 벌기 위해 떠난 엄마를 찾아왔던 곳으로 한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세기의 불가사의라 불리는 경제위기로 온 나라가 파산한 후 아직 회복되지 못한 도시. ‘좋은 공기’라는 그 이름처럼 바람 들어 함부로 들뜨게 되는 도시. 이쯤에서 당신도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으..
[김남희의 남미 걷기](9) 칠레의 이스터섬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ㆍ수백년 전부터 뜨거운 갈등의 불씨 넓은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배낭을 메거나 슈트케이스를 끌고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몸에서 묻어나는 낯선 도시의 냄새. 흔들리는 눈빛과 얼굴에 서린 홍조. 나와 같은 피를 지닌 사람들이 있는 이곳은 내게 가장 익숙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라면 내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어떤 사연을 품고 어디로 가는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몇 시간쯤은 그냥 보낼 수 있고, 배낭 속에 넣어온 책을 읽으며 하룻밤쯤은 문제없이 지새울 수도 있다.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어 가방을 꾸려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 남은 생을 살 수도 있음을 일러주는 곳. 날개가 없는 내게 날개를 달아주고, 버리지 못한 꿈을 현실로 되돌려주는 곳. 나는 지금 칠레 ..
[김남희의 남미 걷기](8) 칠레의 푸에르토 몬트 김남희 | 도보여행가·작가ㆍ다시 오고 싶은 또 하나의 산을 품다 삶이 그렇듯 여행도 늘 뜻대로 풀리는 건 아니다. 호화 유람선을 타고 우아하게 항해를 하겠다고 예약한 배는 수백마리의 소가 애처롭게 울어대는 화물선일 수도 있고, 4인용 선실에는 가난하나 패기만만한 청년 디캐프리오가 한 명쯤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자들만으로 선실이 가득 차기도 하고, 명성 높은 칠레 피요르드의 빙하를 보겠다는 단순한 욕망마저 성수기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예고 없이 무시되기도 하는 법이다. 칠레의 남부 항구도시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푸에르토 몬트로 올라가는 3박4일의 배 여행(나비맥 크루즈)은 언제부터인가 서구 배낭 여행자들의 ‘wish list’에 올라가 있다. 칠레의 피요르드 해안이 보여주는 빼어난 풍경과 조디악을 타고 ..
[김남희의 남미 걷기](7)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 김남희|도보여행가·작가ㆍ슬픈 기억을 다 묻을 수 있는 ‘세상의 끝’ 당신, 기억하나요? 보영과 아휘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만 끝내 서로에게 가 닿지 못한, 마지막까지 외로울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 영화 에서 아휘의 눈물을 묻었던 붉은 등대가 생각나나요? 저는 지금 그 붉은 등대를 눈앞에 두고 뱃전에 서 있어요. 뺨을 긁듯이 모진 바람이 불어오네요. 지구 끝까지 내려와 슬픔을 묻고 갔을 사람들을 떠올리며 서 있는 지금. 닿을 듯 닿지 못했던 당신의 품 안에서 외롭던 그 시절의 내가 생각났어요. 그래요, 저는 지금 지구의 남쪽 끝 우수아이아에 와 있어요. ‘엘 핀 델 문도’, 세상의 끝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삶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사랑에 무릎 꺾인 영혼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곳. 그 어떤 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