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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 여행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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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사의 여행스케치]기억의 건축 05-인천공항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사실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출발 당일 공항에 도착하는 때입니다. 풍선의 헬륨가스처럼 막 부풀어 오르던 여행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그 정점에 오르는 것이지요. 그리고 곧 고행이 시작됩니다. 긴 줄을 기다려 체크인을 하고, 기분 나쁘게 몸수색도 당하며, 돈을 써가며 면세점 쇼핑도 합니다. 이코노미 클래스의 비좁은 좌석은 나를 짐짝처럼 취급하고, 인내 끝에 막상 새로운 장소에 도착할 때면 몸은 이미 녹초가 되어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공항 자체도 여행의 목적지가 될 만합니다. 공항에서의 기억 역시 추억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지요. 바쁘지 않다면 공항에 일찍 가보려는 것도 가급적 많은 시간을 여유롭게 공항에서 보내고 싶은 욕구 때문입니다. 요즈음의 공항은 단지..
[리뷰]영화 ‘엘 시크레토’ 이로사 기자 ro@kyunghyang.com ㆍ서스펜스 옷 입은 멜로…사랑을 말하다 는 여러 개의 거울상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소설과 현실, 현재와 과거, 모랄레스와 에스포지토의 삶은 서로 닮은꼴이다. 서스펜스물이라는 외피 역시 로맨스와 겹쳐지며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그리고 이 모든 닮은 쌍은 한 점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랑’. 무릇 사랑은 삶의 다른 말이다. 영화는 한 여인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눈동자는 기차역 수많은 군중을 뒤로 하고 떠나가는 기차와 거기 올라탄 한 남자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 한 남자가 자신이 쓴 소설을 들고 옛 동료인 듯한 여자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여자는 놀라는 듯하지만 과한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한때라도 사..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기억의 건축 - 라스베이거스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도시는 건물들의 집합입니다. 그 건물들은 각각의 역사와 사회구조, 문화와 관습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를 띱니다. 모든 도시들이 다른 모양을 갖는 이유입니다. 라스베이거스는 보다 특이한 경우입니다. 도시를 이루는 건축은 이미지로 지어졌습니다. 가장 번화한 스트립 거리의 카지노 호텔들은 과거로부터의 연속성이나 미래를 향한 지향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합니다. 오롯이 현재만을 생각하고, 현재의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 수 있는가가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현재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은 과감하게 뜯어고칩니다. 이미지는 때론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도 손쉽게 무너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이미지로 건축된 도시는 자칫 위태로워 보입니다. 환상의 이미지는 더 큰 환상에 의..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기억의 건축 - 명옥헌 원림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끔 궁금합니다. 은하계 밖은 얼마나 클지, 과테말라는 어떻게 생겼을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바다 밑은 어떤 곳일지 알고 싶은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정보화 덕분에 실마리들은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기에 그런 경험들은 피상적이기만 합니다. 인공위성은커녕 비행기조차도 없던 시절, 우리 선조들 역시 세상을 상상했을 겁니다. 그리고 잘 알려진 대로 대지는 네모났고 하늘은 둥그랗다는 우주관을 마련했습니다. 그런 관념은 곧 건축으로 발전되어 방형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는 구조를 갖는 수공간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자체로서 우주를 대변하는 것이죠. 그리고 물가 근처에 작은 정자를 지어 관조하기를 즐겼습니다. 옛 선비들은 이곳에..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기억의 건축 - 가우디 오영욱 |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바르셀로나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로 유명합니다. 기괴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그의 놀라운 건축 덕분에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바르셀로나로 향합니다. 그리고 건물이 그토록 자유로울 수 있다는 사실에 경탄해 마지않지요. 그런데 바르셀로나 거리를 걷다 보면 가우디의 것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구불구불한 건물들이 여럿 보입니다. 알고 보면 가우디가 활동하던 시기에 비슷한 형식의 건축이 그 지역에서 유행했던 이유입니다. 비슷한 시기, 유럽 북부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건축의 영향이라는 말도 있지만, 무엇보다 19세기 말 바르셀로나가 충분히 부유했고, 그 덕에 실험적으로 맘껏 건물을 지을 수 있었던 시대적 혜택의 이유가 컸을 겁니다. 가우디의 전기를 보면 으레 그가 어릴 적 살던 ..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기억의 건축-뉴욕  오영욱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알랭 드 보통은 저서 에서 여행을 잘하는 법에 대해 길게 서술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예 중의 하나로 스케치를 들지요. 물론 여행지에서의 여유로운 스케치는 그 시간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그가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각자가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여행은 두근거리면서도 긴장되고 체력적, 금전적 부담이 적지 않은 일입니다. 여행의 본전을 뽑기 위해선 그 여행을 잘 기억하며 언제든지 빼서 추억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여행에는 정도가 있을 리 없습니다.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현실이 무료하고 지칠 때 지난 여행을 상기하며 흐뭇하게 웃고 다시 한 번 가슴이 뛰면 더할 나위가 없습..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공간의 프레임-자동차 오영욱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길이 먼저 생기며 자동차를 고려하다보니 길은 으레 넓어지고 반듯해집니다. 차창 밖을 보고 있으면 가끔 우리의 도시는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고 느낍니다. 가령 간판들은 보행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달리는 차 안에서 인식되기 쉽도록 매달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끝나버렸지만 영암에서 열렸던 F1의 모습을 그려볼 일이 있었습니다. 그 극단의 속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떨지 상상해 봅니다. 과속 단속 카메라를 무서워하는 소시민인 나는 꿈도 꾸지 못할 세상이 펼쳐질 것 같습니다. 다행히 세상의 길들은 보통 막혀 있습니다. 속도 제한과 정체 현상 덕분에 우리의 도시는 그래도 조금은 더 인간적일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기사의 여행스케치]공간의 프레임-화암사 오영욱| 건축가·일러스트레이터 개인적으로 지난 몇 주간은 무척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괴로움들이 내게 온 것 같았지요. ‘10분만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고 싶은’ 소망만이 가득했습니다. 도망간다고 해결되는 건 없을 겁니다. 나의 부재로 누군가가 대신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합니다. 혹은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잘 돌아가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어차피 사는 건 상처받고 치유되는 과정의 반복일 겁니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은 다음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약속했습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화암사에 다시 한 번 가봐야지.” 전국에는 화암사가 몇 있는데 여기서의 화암사는 전북 완주에 있는 겁니다.